[Review] 그것은 사실 옳지 않았다, 연극 노라이즘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8.01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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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페미 씨어터가 주관하는 제 1회 페미니즘 연극제에 다녀왔다. 필자가 관람한 연극의 제목은 < 노라이즘 >. < 노라이즘 >은 그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헨릭 입센의 1879년 작 희곡 < 인형의 집 >을 원작으로 한다. 그러나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현대 한국으로 바꾸어 각색을 시도하고, TV 프로그램이라는 색다른 소재를 들여왔다. 현재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가장 핫한 키워드로 떠오른 만큼, 연극 < 노라이즘 >의 이러한 시도는 1879년의 여성이 아닌, 2018년의 한국 여성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건만.
 
< 노라이즘 >의 무대는 간결하게 구성되어 있다. 철봉 4개가 사각형의 꼭짓점을 이루고 네모난 블록들이 그를 둘러싸며 노라와 진규의 집을 형상화한다. 천장에는 모빌이 달려있고, 집의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식탁과 의자 몇 개가 전부다. 이곳은 노라가 생활하는 곳이다. 남편 진규는 철봉 너머 관객이 볼 수 없는 본인 소유의 서재가 있고 그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지만, 노라는 언제나 관객이 볼 수 있는 이 거실에서 홀로 끊임없이 쓸고 닦는다. 객석의 앉아있는 관객들까지도 노라를 지켜보는 시청자 역할을 맡았기 때문에, 관객이 볼 수 있는 영역은 카메라에 비춰지는 노라의 공간으로 한정되어 있는 셈이다. 연극은 액자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액자 바깥에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MC이자, 노라가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 역할을 하는 4명의 앙상블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액자 안에서는 이들이 몰래 촬영 중인 노라의 일상이 펼쳐진다.

노라는 노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다. 마치 아이처럼 남편 몰래 단 것을 먹다 들키고, 남편에게 아양을 떨어 생활비와 용돈을 받아낸다. 즐겁게 쇼핑을 하면서도 노라는 자신의 물건은 하나도 사지 않는다. 오직 아이들과 남편의 물건을 사고 행복해한다. 노라에게 노라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와 남편의 관계는 화목해 보이지만, 노라가 진규의 의견에 토를 달 때면 분위기는 완전히 바뀐다. 진규는 노라를 자리에 앉히고 강압적으로 눌러 말하면서 천장에 매달린 모빌을 건드리고, 모빌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노라는 홀린 듯이 그의 말에 순종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장면은 극 중 두어 번 정도 반복된다. 노라는 남편과 대등하게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진규에게 노라는 아기나 애완동물(반려동물이 아닌)에 가깝다. 노라에게는 사랑받음에 감사하며 계속해서 사랑받을 수 있도록 아양을 떨고 천진하게 구는, 유아적인 모습이 기대된다. 그리고 그것을 강제하는 행위가 모빌을 건드리는 동작으로 함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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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지금은 1879년이 아니란 것이다. 그때에 비하여 현대 한국사회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었고, 법적으로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권리가 남성과 대등하게 보장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여성들의 피해 경험은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되어 받아들여지며, 가부장제는 더욱 교묘하고 면밀하게, 수면 아래에서 여성들을 지배한다. 그리고 이를 깨닫기 위해서는 현실의 문제 상황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던 것들에 대한 고발이 필요하다. 여성이 사회로 나오게 되면서, 오히려 여성에게 요구되는 역할은 더욱 다양해졌다. 성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무해한 이미지여야 하면서 때로는 섹시해야 하고, 동시에 사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남성의 ‘등골을 뽑아먹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하지만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능력이 있어 남성의 자리를 빼앗아서도 안 된다. 아름다워야 하지만 미모를 위해 비용을 들이는 것은 사치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 노라이즘 >에서 노라에게 강요되는 여성상은 1879년의 그것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저 얌전히, 순종적이고 아름답고 바보 같은 아내. 현대의 기혼 여성들에게 이 같은 역할 수행이 기대되는가? 현대 여성들을 향한 다각적인 견제를 다루지 못한다면, 배경을 현대로 바꾼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덧붙여 비슷한 맥락에서,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절하는 장면 역시 매우 작위적이다. 이혼하고 혼자가 되어 즐겁게 사는 친구, 방해꾼2의 모습에 흔들리는 노라는 남편의 스킨십을 거부한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캠코더와 프로젝터를 이용해 남편을 대문짝만하게 비춰주는데, 이때 그의 표정은 거의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과장되어 있다. 부부나 연인 관계에서, 남성의 성욕은 이해해야 하는 영역이라며 억지로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당하는 여성들이 많음을 안다. 그리고 이러한 강요는 대부분 지속적인 회유와 가스라이팅에 의해, 개구리가 끓는 물에 익어가듯 이루어진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못한 여성들로 하여금 ‘그 정도는 아니야.’라는 덫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한 마디로, 원작에 없던 두 장면 모두 본질을 흐리는 불필요하고 과장된 연출이란 소리다.

이해할 수 없는 연출은 이 뿐만이 아니다. 극 중 사용된 TV프로그램이라는 설정은 노라가 현모양처에 적합한가를 평가하는 세간의 시선을 나타낸다. 그러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MC들은 이 역할을 충실히 해내기보다 그저 개그캐릭터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노라의 ‘현모양처 되기 프로젝트’를 막고 상금을 타 가려는 방해꾼들은 웬일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이 프로그램의 비윤리성을 꼬집고 노라를 깨우치게 하려고 노력한다. 남편밖에 없어보이던 노라는 그들 부부의 친구로 등장하는 방해꾼1의 고백을 거절하면서도 갑자기 그와 춤을 추고, 치마를 추켜올려 다리를 보여주고, 영화를 보면서 어깨에 기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각 인물들의 행동에 개연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저 원작에서 따온 몇 장면들을 구현하기 위해 짜 맞추었다는 인상이 강했다. 이를 보다보면 오히려 행동의 일관성에서 가장 납득 가능한 인물은 남편인 진규라는 생각마저 들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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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인형의 집 >에서, 노라와 남편 헬메르의 평온한 일상은 변호사 크로그스타드의 등장과 함께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저 순진무구한 것처럼 보이던 노라는 사실 오래 전 헬메르가 위독할 당시 아버지의 이름으로 크로그스타드에게 돈을 빌리고, 남편 몰래 아낀 생활비와 사무 보조 업무를 하며 번 돈으로 조금씩 빚을 변제해왔던 것이다. 자신에게 보장되어 있던 은행원 자리를 친구에게 줘 버린 노라에게 분개하면서, 크로그스타드는 남편에게 노라가 빚을 졌다는 사실을 폭로할 거라 협박한다. 이러한 스토리의 진행은 여자 혼자서는 차용증을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상황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현대로 배경을 바꾼 < 노라이즘 >은 이를 어떻게 각색했을까?

원작의 크로그스타드 역을 맡은 방해꾼3은 결국 자신의 복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노라를 찾아와 비밀을 폭로해버린다. 노라가 그토록 숨기던 비밀은 바로 임신 중절 이력이었다. 임신 중절은 확실히 뜨거운 감자로, 여성의 권리를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이슈이다. 그러나 연극 < 노라이즘 >이 이를 다루는 태도는 가히 경악스러웠다.

노라는 비밀이 폭로되자 그가 왜 아이를 지웠는지를 독백으로 밝힌다. 다들 축복받을 일이라고만 했지, 임신과 출산이 그렇게 고통스럽고 지독한 것임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아들이 아니라고 구박받는 것도 싫었다고. 이 역시 현대 여성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절규가 와 닿지 않았던 것은, 극단 불한당이 소재를 진지하게 다루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노라는 쇼핑을 할 때조차 자신의 물건은 사지 않는, 오직 가족만을 위하는 여성이다. 그게 행복한 줄로만 알고, 그것을 자신의 진짜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속여 오면서. 그런 노라가, 알을 깨고 나오기도 전에 스스로만을 위해 남편을 ‘배신’하는 행위를 결심했다는 점은 개연성이 부족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아팠다고 해봐야, 보는 관객 입장에서는 인물의 행동을 납득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의 삶의 무게를 느끼기보다, 그저 임신 중단이라는 ‘핫한’ 키워드를 끼워 넣기 위해 인물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의 작위적인 움직임만이 느껴질 뿐이다. 노라의 고통을 자랑스레 전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소한 그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여성에게는 엄청난 죄로 느껴질-선택을 했는지, 그 삶의 궤적을 관객들이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특히 윤리적인 문제로 찬반 논쟁이 여전히 뜨거운 임신 중단이라는 소재는 더욱 그렇다. 그렇지 못하면, 연극 < 노라이즘 >이 잘 보여주었듯이, 그저 자기 아프다고 아이를 죽인 ‘이기적인’ 여자의 징징대는 하소연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그 뒤의 연출은 더욱 심각하다. 방해꾼3은 자랑스레 노라의 임신 중단에 대한 의사소견서를 읊고, 남편은 테이블 주위를 맴돌며 노라에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 이에 정신이 나간 노라는 미친 듯이 블록으로 무대를 가로지르는 도미노를 세우고, 도미노를 다 세우자 의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 위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축 늘어진다. 마치 임신 중단 수술을 받는 여성처럼. 그리고 시뻘건 조명이 쉬지 않고 번쩍이며, 남편은 노라를 저주하고, 방해꾼3은 공격적으로 대사를 읊고, 노라의 친구는 집 밖에서 돌아다니며 4개의 쇠기둥을 두들겨 소리를 내면서 노라를 부른다. 귀가 찢어질 듯한 음향이 계속해서 울리는 내내, 노라는 무대의 한 가운데서 다리를 벌리고 앉아 “때려주세요, 난 나쁜 아이에요. 잘못했어요.”라는 질겁할 만한 대사를 외친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장면은 페미니즘의 측면에서, 또 극이 가지고 가는 맥락과 개연성의 측면에서도 비판할 점이 충분하다. 그러나 그 전에, 가장 먼저 관객을 생각하지 않는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로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여지가 있는 장면이 있었다면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을 할 필요가 있다. 그저 노라의 고통을 전달해주겠답시고 이 장면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연출한 것은 중대한 실수를 넘어 무례하다고까지 여겨진다. 거기다, 임신 중단이 여성의 권리라고 말하고 싶었더라면 저런 가학적인 대사를 주인공의 입으로 내뱉게 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 그러고 나서 이에 대한 수습이라도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장면 이후, 노라는 자신의 삶이 생방송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분개하며 자각할 뿐, 임신 중단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도 정리하지 않는다. 도대체 저렇게까지 충격적인 장면을 통해 연출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무리 개연성이 부족하고 인물이 이해가 안 갈 지라도, 소재 선택에 대한 어떠한 신념이나 입장이라도 엿볼 수 있었다면 이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싶다. 극단 불한당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는 고작 이정도인가? 이후에 이어진 스토리는 원작과 비슷하다. 자신의 삶이 이때까지 허위와 위선이었음을 깨닫고 노라는 남편이 지배하는 집을 떠난다. 이제 인형 놀이는 끝났음을 선포하며. ‘난 나쁜 아이이니 때려 달라’던 노라의 갑작스러운 자각이나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지적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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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평등이 당연한 곳으로 가기 위해,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모두가 약자에 대한 가해자다. 다만 그 정도가 조금씩 다를 뿐.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빈곤 계층 등에 대한 혐오는 만연하고, 우리는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숨 쉬듯이 혐오를 배우고 실천한다.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끊임없이 의심할 것. 우리가 정상적이라고 느끼고 있던 상황이 누군가에겐 비정상이 아니었나를 계속해서 돌아봐야 할 것이다. 입센의 < 인형의 집 > 역시 이 같은 시선을 담고 있다. 세상 사람들도, 책도, 신부님도, 어쩌면 심지어는 신까지도, 헬메르를 옳다고 한다. 노라 역시도 그런 줄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하고 돌아보며 마침내 깨닫는다. 그것은 사실 옳지 않았음을. 지극히 내밀하고 사적인 곳, 편안하고 익숙한 집이라는 공간마저 자신을 얽매고 있었음을. 혐오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곁에, 우리의 속에 있다. 그러니 이러한 사회고발적인 작품들은 특히, 과장하고 가르치려들기 보다, 진솔한 성찰을 바탕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을 그려냈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물론, 부부강간이나 임신 중단 등 나름의 현실적인 주제를 선정하여 고전 속에 녹여내려 했다는 점은 눈에 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숙고는 심각할 정도로 부족했고, 고전을 현대물로 각색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2018년, 이제 2030세대 여성들 사이에서는 긍정적인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페미니즘이 하나의 주요한 트렌드가 되었다. 남성 중심의 연극판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페미니즘 연극제는 따라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상황에서, 숙고가 부족했다는 지적을 ‘시도가 좋았다’라는 말 뒤에 숨어 피하기는 너무 비겁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앞으로도 여성을 내세운 연극이라면 의지를 가지고 최대한 많이 소비할 것이다. 그 내용이 어떤지를 세세하게 따지고 골라내기에는 이러한 목적을 가진 여성 중심의 작품 자체가 연극판에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작자들 역시,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를 하나의 노림수만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앞서 프리뷰에서 이야기했듯, 페미니즘은 지금, 바로 여기 서 있는 여성들의 생존을 위한 사투이다. 최소한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페미니즘 연극을 올리고자 한 만큼, 극단 불한당은 좀 더 깊은 성찰과 자기반성이 필요해 보인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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