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국회의장과 목수 망치의 가치, 왜 달라야 하죠? [문화 전반]

김제동과 노엄 촘스키, 아나키즘 좌파
글 입력 2018.07.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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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jpg
방송인 김제동
- 단순 수치적 동등성이 아닌
응당 인정 받지 못했던 것에 대한 요구라 사료된다.


방송인 김제동이 위와 같은 화두를 던졌다. ‘공존’을 주제로 하는 KBS 명견만리 시즌 3에 27일 출연하여 사회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에 대해 목소리를 낸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해서 돈을 버는 속도보다 빠르다며 돈이 돈을 버는 속도를 낮추거나 낮출 수 없다면 그것에 대해 세금을 더 부과하고 노동이 돈을 번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가치를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공동의 자산을 함께 분배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덧붙여 “나중에 아이들이 갖는 것이 완전히 차이가 없을 순 없겠지만 그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 욕구는 충족되고 욕망은 공정한 경쟁을 통해서 보장되고 대신 탐욕은 규제되는 것”라고 하였다.

비슷한 논지로 대통령비서실 장하성 정책실장도 한국사회의 불평등은 가진 자와 재산보다는 적게 주는 자와 소득 때문에 ‘원천적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이루어진다고 설명한다. 재벌 개혁이라는 말과 더불어 진보 세력에 이념의 고수보다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대응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 변화를 유도하지만 갈 길은 멀고 이루어져야 할 것도 많다. 김제동에게 박힌 안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경제계 인사들도 “역시나 노동가치설은 대중의 심금을 울린다. 경제의 복잡하고 냉정한 논리는 덜 가진 자의 분노를 자아내기 딱 좋고”, “김제동의 출연료는 왜 행사장 무명 MC보다 더 높을까? 김제동은 차액을 기부하나? 만약 기부한다면, 타인에게도 강제할 수 있을까?”와 같이 비판과 조소를 보냈다.

과연 김제동이 말하는 것이 공산주의 이념에 경도되어 같은 값의 임금을 받아야 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일까. 그 스스로 공유제의 획일성과 평준화는 전제적이며 그에 반대되는 소유제는 불평등을 야기하고 법을 존중하지 않음을 여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다 아는 옳은 소리하면 빈축을 사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나머지들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고 있으나 여건 때문에 혹은 개인적 이유 때문에 못지키거나 안지키고 있는 것이고 그것을 잘못으로 얘기하니 자신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혹은 “너라고 다르냐” 라는 방어기제로 작용하는 것이다. 공직자와 경제학자 혹은 정치인들은 위와 같은 진보가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를 순진한 소리하는 사람 혹은 속이는 사람으로 아니면 어려운 일을 가는 사람으로 보거나, 그 반대 급부에 있는 사람들은 단순히 정치적 올바름만 말하는 PC충 이라는 표현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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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살아있는 현대 석학 노엄 촘스키


미국의 진보 지성이자 세계적 석학으로 불리는 노엄 촘스키는 앞으로 도래해야 할 사회는 고전자유주의에서 자유사회주의로의 변화라고 보고있다. 고전 자유주의는 애덤 스미스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인간 본성에 관한 어떤 개념으로부터 발전한다. 그 개념은 다양성과 자유 창조를 중시하며 임금 노예제, 노동의 소외, 사회경제적 조직의 위계질서인 권위주의적 산업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이는 자본주의 이념에 속해있는 소유욕 강한 개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다. 착취로서의 속박은 사회적 유대로 대체되어야 하며 경쟁적 탐욕, 배타적 개인주의, 국가 또는 개인 차원의 기업제국, 개인에 앞서 불멸하는 권리의 소유자인 법인도 없애고 싶어한다. 더 나아가 아나키즘, 자유사회주의는 프루동의 주장처럼 재산의 소유는 실로 도둑질과 같다는 기치로 시작한다. 정부에 의한 생산의 조직 또한 국가사회주의를 비판하며 국가 관리들, 관리자들, 과학자들, 공장 관리자들의 지시와 명령을 거부하고 이와 같은 해방은 새로운 통치계급의 도래로는 이루어 질 수 없기에 다만 노동자들이 일종의 노동자위원회 형식을 통하여 스스로 생산의 주인들이 되어야만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사회주의자는 국유제도가 결국 관료주의적 독재체제로 추락할 것이라 보기에 민주적으로 산업 시스템을 마련하고 사회행정위원회의 대표들을 공동체의 욕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으로 뽑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학상의 국가란 지배계급에 의한 사람의 지배였기에 사회주의 공화국은 전체 공동체를 위하여 산업을 지배하고 다수의 정치경제적 복종이 아닌 만인의 경제적 자유를 목표로 한다. 이 점에서 고전 자유주의는 마르크스와 아나키즘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대표제는 산업사회에서 모든 기관에 참여하거나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노동자 위원회, 소비자위원회, 공동체 의회, 지역 연합체 등을 구성하기에 사회단체에 대하여 대표자들이 직접 보고하고 책임을 지며 상위 단체의 의사결정 과정에 참석한다. 이렇게 사회단체를 대변하기 때문에 우리 사회의 대의제와는 매우 다른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는 두 가지 범주의 반론을 받을 것이라고 촘스키는 예상했는데 하나는 그러한 조직은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조직단체는 효율성이 떨어진다. 첫째에 대한 반론으로 200년 전 루소는 “인간의 본질적이고 규범적인 특성인 자유”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궤변을 늘어놓은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을 비난했다. 자유 그 자체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과 훔볼트와 칸트의 말로 혁명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옹호한다. 두번째에 대해선 중앙집권의 체제가 이미 경제 엘리트조차 억압받게 하고 효율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념으로 가득 차있음을 꼬집는다. 상품을 극대화하는 것이 품위 있게 생존하는 유일한 수단이 결코 될 수 없기에 공동체의 결정이 엘리트의 결정 사항을 포함하면서 각종 인간적 욕구와 관심들을 반영하는 것은 분명 생각할 수 있고 실현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교육학자 존 듀이에 따르면 정치는 거대 기업이 사회에 던진 그림자다. 아담 스미스에게도 자명한 진리였던 그 그림자는 이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념적 기관들이 그림자를 던지는 세력을 상당히 대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유의 형식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토마스 제퍼슨의 우려와 같이 미국의 리버럴들은 대중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굳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철학자 러셀과 마르크스는 노동의 본질을 교환가치와 부가가치가 아닌 “인간이 외부의 힘에 이끌려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일한다면 공동체의 관심은 일을 즐겁게 만드는 것이 되리라”와 같이 단순 삶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가장 높은 목표로 보았다. 물론 노동의 기쁨이라는 위선적인 말로서 보이기도 하지만 “순전히 거래 활동이 아닌 위선을 무릅쓰는 것이 낫다”라는 생각이 이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점이라기보다 관리, 통제가 아닌 인간의 창의성과 자유에 관한 본성에 관한 점이어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다.

자유로운 민주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종사하는 산업의 운명에 대한 주인이어야 하고 고용자들의 임차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생각이 공고해지길 원한다. 토마스 제퍼슨의 구분처럼 귀족주의자는 “국민을 무서워하고 불신하여 그들로부터 모든 권력을 빼앗아 상위계층에게 주려는 자”였고 이와 대조적으로 민주주의자는 “국민과 하나되고 국민을 확고하게 신뢰하고 그들을 사랑하며 설사 항상 최고로 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공공이익을 정직하고 안전하게 지키려는 자”였다. 새로운 기업 형태의 조직들이 권력을 키워감에 따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은 깊어갔고 당시 기업가들과 결탁하여 이익을 법원들이 있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의 말마따나 민중의 투쟁을 이용하여 독재적으로 국가 권력을 잡은 붉은 관료제도 있었고 민중투쟁으로는 권력을 잡을 길이 없다 생각하여 개인 권력과 국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앞잡이가 되어 민중의 지팡이로 민중을 때리는 자도 있었다. 대중은 무지하다고 생각하는 행태는 계속해서 반복되어 기업과 언론이 이용하는 프로파간다는 보도 범위를 정하여 속였고 정직하게 무엇을 인정해야 하는지 모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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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동 기사 공감순 댓글 반응


과연 진보, 좌파, 아나키즘은 문제에 대해서만 제시할 뿐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들인가. 미국이 남베트남을 먼저 공격한 것이 미국 엘리트 계층에게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보수성은 어찌하여야 하는 것인가. 군비 경쟁 같이 파괴적 소모적 행위를 어떻게 개선해야할 것인가. 공적 자금의 책임과 그 대안 제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교육, 언론, 정치, 과학에서 두각을 나타낸 촘스키의 주장과 같이 복잡히 얽혀있는 고민일 것이다. 때로는 이러한 거대 담론이 부담스럽게 느껴져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한다. 언제나 평등을 전제하고 차이를 만들어가는 것이 정치라고 했던 랑시에르와 같이 대안에 있어서 동의를 구하지 못한다면 허공과 같은 논의 체계일 것이다. 개개인의 독립과 다른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갖는 것, 언론과 이념기관의 프로파간다를 파악하고 멀어지는 것이 중요하고 그에 따라 대학의 기능이 취업학교로부터 당연히 멀어져야하는 것임에도 틀림 없을 것이다.

김제동은 과연 자신이 다른 무명 MC보다 더 많이 번 돈을 내놓아야 하는가? 만약 그런다면 남들도 따라 할 것인가? 그걸 강요할 수 있냐는 질문에 앞서 질문자는 그럴 준비와 의향이 있는가? 지속적으로 힘들고 천천히 움직이더라도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쏟을 수 있는가? 하버드 행정학과 교수라는 새뮤얼 헌팅턴은 “권력의 건축가들은 느껴지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창조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통제권의 필요성을 암암리에 요구한다. 이전에는 법률가와 금융가가 월스트리트를 잘 다루었지만 지금은 대중들과 무지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공무원이 되는 것이 많은 이들의 염원이지만 그것은 안정적인 수입원의 요구인가 아니면 국가 경영의 투명화와 개선인가. 우리는 작위, 부작위의 착각에 빠져 작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김제동, 피케티, 여성주의, 난민, 통일 문제가 마치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유지에만 급급하여 사실 손해를 보고 있는 부작위보다 문제라고 보는 것이 아닌가?

분업화와 전문화가 자본주의의 문제인 것을 다 알면서 그것에 대해 은밀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 놀랍다. 사건의 발생을 필연적으로 본다면 그 원인을 찾으려 노력하겠지만 가능한 것으로 본다면 앞선 조건에 의해 가시화만 안되었을 뿐 이미 예기치 못하게 다른 방식으로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것처럼 이미 불평등한 것에서는 불평등 밖에 야기되지 않는다. 이렇듯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기에 가능한 것으로 존재하고 있고 자유를 향한 의지와 지식인들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몫이 없는 자들을 위해 실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왜 우리는 어릴 때 배운 격언들을 다 잊는 것인가?


- 촘스키와 본문의 관한 내용은
촘스키, 사상의 향연에서 발췌


[김혁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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