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 너, 우리, 그들, 낯선사람

글 입력 2018.07.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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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나, 너, 우리, 그들, 낯선사람



현대사회는 자아를 수많은 조각으로 쪼개버렸다.

분열은 우리에게 무한한 자유를 선사한 것처럼 보였지만,사실 동시에 끔찍한 불안을 선사했다. 수많은 성공 신화와 판타지를 전광판에 매달아놓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실제 현실이 어떻게 전개되건, 수많은 광고가 우리 머리맡에서 짤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북극성처럼 빛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북극성을 따라 걷다보면 수많은 이미지가 우리의 자아를 온통 뒤흔들어 놓는다. 당장 티비를 키면 귀부인이 자신의 행복을 아름다운 거실에서 찾고, 잘생긴 남자 아이돌이 맥주를 들이킨다. 우리는 돈을 벌어 똑같이 아름다운 거실에서 살며 행복하길 바라고, 맥주를 들이킴으로써 잘나가고 싶어한다. 그리고 돈을 벌어 그렇게 하다보면, 정말로 그렇게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그것은 침투된 이미지일 뿐, 진정한 우리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들이 실제로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을 건들긴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우리 그자체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지는 우리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훨씬 빨라서, 그것이 정말 '나'인지를 고민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것들이 정말 '나'다. 최소한 그런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수많은 물질들에 집착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정말 그것들이 '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소비하고 이미지를 대여하면서 스스로를 정의하는데 너무 익숙해졌다.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뒤집어쓸 얼굴가죽을 찾아 헤매는 달걀귀신과 같다. 그 어떤 것도 '나'인지 모르기에, 수많은 달걀귀신이 끔찍한 혼동을 겪는다. 당연하지만 그건 아주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것이 비참하고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어떻게 '귀신'일 수 있겠는가.

연극 <낯선사람>도 수많은 파편들을 그러모은 듯한 연출을 보여준다. 장면들은 파편으로 쪼개져 낡은 행주처럼 거칠게 꼬매져 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연출은 관객들에게 당혹감을 선사하지만, 그것이야말로 파편화된 세상에 대한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나 싶다. 이 혼란스러운 장면의 연결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뭔지 모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린다. 이런 '모호한 공포'는 조명과 음악으로 표현된다. 음악은 어떠한 구체적인 형식없이 흘러가지만, 듣는 사람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감정은 명백히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낯선사람>이 음악을 각 장면마다 전면적으로 배치한 것은 음악의 이런 특성을 현대사회의 침투적 불안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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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샤보오와 울리히는 의화단 운동 때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이런 연극에서 내가 '현대사회'의 불안을 찾아내는 것은 아이러니한 해석처럼 보일 수 있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천샤보오와 자신을 혼동하는 늙은 울리히와 과거의 세상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정체된 천샤보오가 현대인과 너무 닮아있었다. 이 둘은 다르지만, 분명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울리히가 천샤보오와 자신을 헷갈릴 수 있는 것도 그들의 상황이 소름끼치토록 닮아있기 때문이다. 서로 낯선 이들은 서로 '악마'나 '쥐새끼'였고, 침투를 막기 위해 폭력이라는 무기를 들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과 조악한 성찰은 언제나 결핍을 낳는다. 낯선 것들을 밀어내기 위해 침투된 면모를 잘라내다보니 등장인물들은 그 자신마저 잘라버렸다. 팔하나가 잘려진 이들은 결코 '온전한 나'일 수 없다. 무대 중간에 세팅된 나무는, 예수의 상징은 모르겠지만 예수를 구속하고 고통스럽게 했던 십자가를 닮았다. 등장인물들은 이 십자가에 영원히 못박혀있다. 침투의 기억이 굳은살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피를 흘리게 된 것이다.

이들 이야기를 정말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책감'과 '복수심', 혹은 '애국심'이라는 키워드를 파고들어야 하겠지만, 나는 연극의 이번 해석에 있어서 '옳다 그르다'의 윤리적 기준과 이들의 서사를 잠시 미뤄두고 싶다. 애당초 그런 것들에 대해 서술하기에 연극은 너무나 '불친절'했다. 등장인물을 이해하기도 전에 등장인물들은 행동하고, 괴로워한다. 파편화된 장면은 이들의 이야기보다 혼란스러운 등장인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관객이 이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연극이 이들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낯선사람>은 각기 다른 자리에서 낯선 것이 침투되는 경험에 몸서리친 개인들의 분열과 혼동, 파괴와 자멸에 대한 혼란한 묘사로 받아들여진다. 애당초 몬드리안의 모자이크처럼 구성된 연극은 천샤보오와 울리히의 개인적 서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들은 그저 낯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몸부림 치고 융합되고 마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천샤보오는 과거에 붙박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오페라라는 환상마저도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막지만 결과적으로나, 환상에 대한 발악 자체가 사실 의미없는 일이었고, 재현된 오페라라는 환상에서도 여전히 총성은 울렸다. 울리히도 비참한 생활에서도 자신과 천샤보오를 착각하면서도 그 '오스트리아의 충실한 군인'이라는 빈약한 자아를 지키기위해 자살했다. '관객을 속일뿐'인 오페라에서 얽매이는 천샤보오는 얼마나 안쓰러운가. 비쩍 마른 몸으로 훈장을 매만지는 울리히는 비장한 죽음을 맞이하려하지만 얼마나 비참한가. 십자가를 진 이들은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물밀듯이 밀려오는 침투의 바람에 익숙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들처럼 십자가에 못박혀 있지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 보일뿐'이다.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낯선 것들에게 창을 들이밀고, 악마나 쥐새끼라 부른다. 그들의 모습을 한가지로 그러모아 '비슷비슷한 자'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계급과 차별은 이런 식으로 재생산된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환상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낯선사람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환상보다 그 환상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시선이 그렇게 만들었다. 어떤 문제의 원인을 사회가 아닌 개인으로 돌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이것이 거대한 세상에 맞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낯선사람의 환상'은 우리 마음은 자신의 팔을 잘라내고 십자가에 붙박는다. 실제가 아닌 환상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하고,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자아를 발견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낯선이의 눈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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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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