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뮤지컬 스모크

글 입력 2018.06.2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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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스모크는 한국 모더니즘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되는 시인 이상의 오감도 연작 중 시제15호를 원작으로 하는 창작 뮤지컬이다.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와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 중이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의 음울하고 약간은 기괴한 구절로 시작하는 시제15호를 비롯해, 작품 곳곳에서 이상의 작품 속 시구를 다양하게 차용한 뮤지컬 스모크는 트라이아웃 공연과 초연을 거쳐 올해 재연으로 돌아온 작품이다. 이상의 작품만큼이나 난해하다는 평을 받으며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 돌아온 스모크를 소개한다.
 

 
1. 미스터리 스릴러 형식의 스토리 전개

뮤지컬 스모크는 죄수복을 입은 시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어딘가에 갇혀서 시를 쓰는 남자. 이내 환청처럼 당시 이상의 독자들의 비난이 쏟아져 들려오고, 견디다 못한 그는 자신의 문자를 가둔다며 일어서 펜으로 목을 찌르려 한다. 그 순간 무대 뒤편에 조명이 비추고, 무대 배경 너머로 희미한 남성의 모습이 비친다.

암전과 함께 다음 순간, 이번에는 장막 너머 2층에서 한 여성의 실루엣이 노래한다. 그는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며 노래하고, 1층에서는 첫 장면의 두 남자가 여자를 납치할 작당을 꾸민다. 시를 쓰는 남자 ‘초’와 그림을 그리는 남자 ‘해’는 바다로 떠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자 ‘홍’을 납치하고, 초는 해에게 여자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긴 뒤 전보를 치러 퇴장한다.

둘만 남겨진 상황에 겁이 난 해는 홍이 깨어나자 그녀를 그만 풀어주고, 홍은 해를 보고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모르겠냐고 묻는다. 돌아온 초는 홍을 풀어준 해를 질책하며 홍을 모르겠냐고 비웃는다. 모든 기억을 잃은 해와 서로를 아는 듯하는 홍, 초. 스모크는 이 세 인물의 미스터리한 관계를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2. 자아의 분리와 화해

초가 떠나고 단둘이 남았을 때, 기억을 잃은 해에게 홍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주 옛날에 한 소년이 있었고, 어려서 부모를 떠난 그는 사랑받기 위해 그의 모든 감정들을 가슴 속 보따리에 숨긴다. 보따리는 점점 커져서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그는 고통을 못 이겨 보따리를 내다 버리고 만다는 이야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홍의 감정선을 따라가다 보면 관객들은 그것이 그들의 이야기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해는 어린 시절의 이상, 그리고 홍은 그의 사랑, 그리움, 미움, 증오, 열망 등을 담은 감정의 보따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초는 누구인가? 극의 후반부, 세 인물 간의 갈등이 극대화되는 시점에서 극 전체를 관통하는 비밀이 풀린다.

인정받지 못하는 글을 쓰는 패배감과 폐결핵에서 비롯한 신체적 고통,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느끼는 무력한 좌절감에 절여진 이상의 주인 격 자아, 해는 극의 첫 장면에서의 초와 같은 모습으로 자살을 기도한다. 홍은 그런 해를 만류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차마 자살하지 못하는 해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문득 분노한다. 현실의 삶에서 회피하기 위해 그는 거울 속 또 다른 자신, 즉 거울 밖으로 꺼내어 모든 책임을 돌리고 거울 속으로 들어가고, 자신을 비난하는 홍을 끌어내어 거울 안의 또 다른 거울 속으로 그를 가둬놓는다. 그리고 무엇도 책임지지 않는 거울 안 세계에서, 그는 모든 기억을 잃고 마냥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뮤지컬 스모크는 이상의 자아를 초, 해, 홍의 세 가지로 분리시킨다. 이는 얼핏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정신을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누었는데, 현실에 얽매이지 않는 근원적 욕망의 저장고를 원초아(id), 원초아의 욕망을 사회적 합의의 수준에서 적절하게 배출하게 하는 현실의 나를 자아(ego), 사회의 금기를 내면화해 원초아의 발현을 억제하며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감독관을 초자아(super-ego)라고 명명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자아가 견딜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원초아, 즉 무의식의 상태에 저장해두며 이것이 자아의 경계로 떠오르는 순간 인간은 죽음까지도 다다를 수 있는 강렬한 충격을 경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상의 모든 근원적 욕망의 저장고이며 동시에 견디기 힘든 고통의 보따리인 홍이 원초아, 그리고 해에 의해 거울 밖으로 끌려 나온 이후 인간 김해경(이상의 본명)을 이끄는 초가 초자아라고 볼 수 있겠다. 이는 그들의 이름에서부터 얼추 예상이 가능한데, 홍은 생명을 의미하는 붉은 피면서 강렬한 욕망인 붉은 태양, 새살을 돋게 하며 동시에 일시적인 고통을 주는 붉은 소독약을 떠올리게 하고, 초는 ‘초월하다’의 초를 쓰기 때문이다. (해가 초를 거울 밖으로 이끌어내면서 던지는 대사 역시 “넌 나를 초월해서 살아봐.”이다.)
 
이 세 자아가 서로 통합해서 조화를 이루어야 인간은 살아갈 수 있으나, 극 중 세 자아는 분리되어 갈등한다. 번갈아 김해경의 삶을 살아내는 두 자아인 해와 초가 끊임없이 죽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초는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아이의 모습으로 깊이 숨어버린 해를 찾아 헤맨다. 그는 현실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죽일 수가 없으므로 현실의 주인 격 자아인 해를 찾아야만 자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자살을 위해서는 해 역시 죽음을 바라야 하므로, 희망이고 꿈이고 욕망이면서 희망을 가지는 자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좌절과 절망까지 상징하는 고통의 근원, 홍을 납치해 그의 눈앞에 보인다. 원초아를 마주한 자아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할 것이므로. 그러나 절망이고 죽음이면서 동시에 희망이고 삶인 홍은 해와 초에게 눈물로 호소한다. 이런 세상이지만 다시 한 번 살아내 보자고. 고통을 끌어안고 빛이 나는 글을 쓰자고. 사실은 진정으로 삶을 바랐던 초는 결국 고통인 홍을 끌어안고, 그들을 바라보던 해는 가만히 팔을 들어 천장을 향해 총을 쏜다. 그리고 한 발의 총탄으로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반원형 세계, 그의 정신을 이루면서 각 자아들을 분리시키던 거울 세계가 깨지며, 분리되어 대립하던 초와 해, 홍의 극적인 화해를 암시한다.


 
3. 독특한 무대연출

뮤지컬 스모크의 무대는 거대한 여러 겹의 반원형 구조물이 무대를 감싸 안는 모양으로, 앞서 말했듯 겹겹이 나뉜 이상의 정신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은 어릴 때부터 거울로 빛을 비추는 놀이를 자주 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시제15호에서는 거울이 서로 다른 자아를 마주하게도 하고, 만나지 못하게 분리시키기도 하는 감옥 역할을 한다. 그에 따라 극 중 무대에서도 여러 겹의 장막이 초가 해를 발견하기도, 해가 홍을 떠밀어 가두어 놓기도 하는 거울 세계로 기능하며, 특히 해의 각성 이후 세 자아가 화해하면서 각자의 고립을 상징하는 이 구조물을 향해 총을 쏘자 마치 거울조각처럼 깨어져 내리는 장면에서 무대연출의 의도를 명백하게 볼 수 있다.

스모크는 좁은 소극장에서도 조명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다양한 조명과 프레젠테이션으로 자칫 심심하거나 이상해보일 수 있는 구조물을 상황에 맞게 설득적으로 연출했는데, 특히 해가 그림을 그릴 때 배경에 바다와 태양을 묘사하는 붓 터치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면과, 맨 마지막에 세 명의 자아가 희망을 노래하는 넘버 ‘날개’에서 극 중 인물들이 무대를 노니는 동안 그의 시구와 소설의 구절들이 새겨지는 부분이 아주 인상 깊었다. 또, 중간 중간 마치 일렁이는 듯한 무늬의 영상이 나타나는 장면들이 있었는데, 무대 전체가 이상의 내면을 형상화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인간의 뇌 같기도 하고 내적 갈등을 나타내는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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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시 희망으로, ‘날개’

필자는 뮤지컬 스모크를 보기 위해 그의 작품집을 사 읽었다. 이상의 작품을 무력한 절망, 권태, 허무주의로 기억하고 있던 필자는 그의 단편 소설 ‘날개’를 다시 읽고 적잖이 당황했다. 물론 해석의 여지가 다분한 작품이긴 하지만, 박제된 천재 이상답지 않은 꽤나 희망찬 결말이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스모크의 결말 역시 비슷한 노선을 따른다.

폐결핵 말기로 인한 고통, 실패한 사랑, 빼앗긴 나라, 버려짐에 대한 아픈 기억 등, 그는 평생을 고통스러워하고 죽음을 꿈꾸고 내내 유서 같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결국 그의 세 자아인 초, 해, 홍은 다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그러나 거울 세계를 깨뜨리고 나서도 죄수복을 입은 김해경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석방되는 장면을 통해, 비록 세 자아의 갈등이 해소되었다 한들 현실적인 상황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관객들은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인물은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고 외친다. 극 중 홍의 말마따나, 그들은 고통을 끌어안고 빛을 낸다. 희망을 꿈꾸고 절망을 견디면서 암흑의 시기를 살다간 시인 이상을 통해, 관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희망을 노래하는 메인 넘버 ‘날개’는 극 중 여러 버전으로 변주되어 곳곳에 들어가 있는데, 세 인물이 갈등을 겪고 울고 좌절하고 죽음을 바라면서도 끝끝내 버텨낸 마지막 순간 가장 힘차게 연주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마지막 한 장면을 보기 위해 스모크를 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끝맺으며,

사실 뮤지컬 스모크가 아쉬운 점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작품이다. 세 번의 수정을 거치면서, 초연의 세 인물 간의 관계성이나 세계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정의 부분들이 대거 삭제되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이 스토리라인이나 각 인물들의 감정을 온전히 따라가기에 무리가 있다는 평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러 번의 관람을 통해 극을 탐구하며, 새로운 해석을 만들어 나가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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