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키치적 감성 :: 국뽕에 대한 고찰 [기타]

해외 반응에 끌리는 우리들과 좀 더 노골적인 이야기
글 입력 2018.05.29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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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반응에 끌리는 우리들

옛날부터 이해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

왜 김연아 피겨 해외 반응이라는 영상이 있는 걸까? K-pop 아이돌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걸까? 꼭 한글 자막까지 달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제일 이상했던 건 나조차도 무의식적으로 이런 것들에게 끌린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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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pop 아이돌 뮤비 리액션 영상과 김연아 피겨 해외 반응 영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단에 달리는 한글 자막, 쉴 새 없는 과장된 제스처와 사운드, 마치 자기가 미친 듯이 영상을 애호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만 같다. 그리고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보여주기식 리액션도 맞다.

번외 버전도 있다. 올림픽 시즌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때, 그 운동선수가 매우 매우 인기를 끈다. 광고도 여럿 찍게 되면서 인터넷상에서 반응이 뜨겁다. 다만 그 인기는 한 달을 가지 않는다. 올림픽이 끝나면 급격하게 사그라든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미'를 이제는 아무도 외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는 작년 교양 수업에서 밝혀졌다. 키치적 감상이었다. 어원은 키치에서 온다. 키치는 1860년대에서 1870년대 사이에 뮌헨의 화가와 화상의 속어로 사용되었으며, 하찮은 예술품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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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의 발생 배경은 미학적으로는 낭만주의 예술에서, 사회적 배경으로는 19세기 중반 부르주아 사회의 형성과 예술의 상업화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에는 유럽 전역이 이미 급속한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의 파급 속도도 빨라 중산층도 그림과 같은 예술품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에 따라 미술품이나 그림을 사들이려는 욕구가 강해졌다. 키치는 바로 이러한 중산층의 문화욕구를 만족시키는 그럴듯한 그림을 비꼬는 의미로 사용하던 개념이다.

키치가 가리키는 구체적 대상은 고미술품을 모방한 가짜 복제품이나 유사품, 통속 미술작품 등이다. 미켈란젤로의 '모세'와 같은 걸작품을 석고나 플라스틱으로 복사한 '가정용품'에서 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저급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이르기까지 조악한 감각으로 만들어진 미술품과 저속한 대중적 취향의 대중문화들을 지칭한다."

- 키치 [Kitsch] (문학비평 용어 사전, 2006. 1. 30.,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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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적 감성은 키치에서 나온다. 싸구려 감성이다.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라, 눈물을 흘리는 분위기에 휩싸여 우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가 본 김연아 영상이나 K-pop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경기하는 연아를 보고 감탄하는 게 아니라, 경기하는 연아를 보는 해외 반응을 보며 같이 감탄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반응을 보고 감탄해도 되는지 가늠하는 것처럼 말이다. K-pop 리액션 영상도 그렇다. 그들의 과장된 리액션을 보면서 같이 즐거워한다.

지나치게 공동체를 중시하는 집단 문화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너무 눈치를 본 나머지, 자기감정이나 생각도 분위기에게 허락을 구해야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심화되어 키치적 감성이라는, 하나의 사회 분위기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좀 더 노골적인 이야기

위 예시들은 단순하지만, 키치적 감성은 좀 더 우리 생활 깊숙이 박혀있다. 전에 모성애에 대한 글을 쓴 적 있다. '우리나라는 친족 어휘가 발달했고 대상을 개인보단 역할로 구성한다. 그 역할이 사람을 숨 막히게 하며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중 하나로 보게 한다.' 의외인 것은 공동체 문화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키치적 감성이, 또 다른 산물인 역할에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가령, 가정을 이끌어가며 희생하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책임지는 맏자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런 역할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역할놀이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이 있다. 역할놀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면, 사회에서 굳어진 보편적 이미지를 자기에게 씌우며 수행하는 '척'에 심취하는 것이다. 물론 사회에서 요구하는 역할을 꼭 이행할 필요는 없고 이행해도 상관없으나, 이미지를 수행하는 데서 작은 기쁨을 챙기고 의무를 도외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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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쉽게 생각해보자. 드라마에서 흔히 부모가 자식에게 "내가 뭘 더 해주길 바라니, 이 정도면 됐잖아. 남들 가는 학교 학원도 다 보내주고 밥도 먹이고 재워주잖아."라고 내뱉는다. 극적 요소 때문에, 과장된 면도 있지만 우리 사회 저변을 잘 반영한 드라마기 때문에 전혀 비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변을 살펴보면 이런 말을 하는 부모님도 결코 드물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학교와 학원에 보내주며, 용돈을 주고 밥해준다. 바쁘게 일하며,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님 역할에 사로잡혀있다. 사실 아무도 그렇게 해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식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해달라고 요구한 적 없다. 바라지 않은 희생은 자식에게 부담이 되며, 후에 자신도 부모를 위해 희생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다른 경우도 있다. "해준 것도 없는 데 알아서 잘 컸다. 너만 보면 뿌듯하고 자랑스럽다."라는 말, 결코 칭찬이 아니다. 자식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희생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그런 류의 상이다. 사랑이든 경제적 지원이든 실제로 받은 건 없다. 알아서 잘 큰 이유는 해준 게 없어서, 필사적으로 내가 알아서 잘 커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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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부모님은 어느새,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며 노력하는 부모님이 됐다. 사랑 표현이 없는 것도, 윽박도 나름의 사랑 표현으로 포장한다. 비록 사랑은 자식에게 닿지 않은 채 흩어졌지만. 그래도 부모님 입장에선 표현한 거니까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사랑을 받지 않았고 경제적 지원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희생과 사랑은 자식이 온전히 책임지며, 받지 않은 것들의 은혜를 갚기 위한 부담감에 어이가 없을 정도다.

맏아들, 맏딸 역할에 심취한 나머지 온갖 책임을 떠맡은 것처럼, 가정의 불우와 고통을 다 떠안은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형제들은 그런 고생들을 모를 것이라 지레 짐작한다. 동생들을 철없다고 여긴다. 오직 자신만이 이런 고난 속에서 서서, 부모님을 도와드리고 형제들을 이끌어 간다고 생각한다. 동생들은 평생 가난과 고통, 불우 따위를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역할에 너무나도 심취해서 형제들 고통을 무시해버린다. 정작 철없이 행동하는 것, 형편에 맞지 않게 요구하는 맏이들을 보면서, 아껴가며 돈을 썼던 나 자신이 초라해지며 한심해지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류의 소리 하는 사람을 많이 봤을 테다. 그만큼 키치적 감성은 우리 사회 기저에 풍기는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키치적 감성을 비판하는 이유는 이런 사회 속에서 사는 필자조차도 키치적 감성에 절여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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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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