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망쳐도 괜찮아, 『그래, 잠시만 도망가자』 [도서]

글 입력 2018.05.26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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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프로스트를 통해서 알게 된 작가 이종범. 그가 만화를 통해서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스토리, 연출이 나의 마음을 울렸다. 그가 글로는 어떤 감동을 줄까 기대가 되었다. 평소에 에세이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지만, 좋아하는 작가가 쓴 에세이니 기대를 하고 읽었다. 앞에서 밝혔던, 생각을 드러내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 지겹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마치 다른 것을 들려주듯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시선에서 바라보게 한다.

글을 통해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어떤 새로운 시선을 줄지 기대가 되었다.

 
 
도망쳐도 괜찮아
 

“그 누구도 도망간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겁쟁이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도망자의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고 누구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15년, 20년 동안 우리 모두는 그런 이야기를 듣고 살아왔다.”

 
그의 작품, 말에서 항상 이 말이 빠짐없이 나온다. “도망쳐도 괜찮아.” 우리나라에서는 유독 도망치는 것을 죄악(?)으로 여긴다. 도망치는 건 악당들이나 하는 것. 비겁하고, 나약한 자들이 도망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TV, 영화, 소설, 만화 등 어느 곳에서 도망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도망칠지언정, 차라리 여기서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한다. 우리는 이것에 익숙해져있다. 그래서 머리에는 ‘도망자 = 비겁자’ 라는 공식이 박혀있다. 겁에 질려 있는 우리에게 노력이 부족하다고, 열정이 부족하다고 책망하기까지 한다. 또한, 남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런 책망을 한다.

한때 열정을 불살랐던 고3 시절, 내게 도망칠 곳은 없다는 생각으로 공부에 임했다. 자기 자신에게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지 않고, 내 모든 것을 던져야만 했던 그때. 지나고 보니, 대단하게 느껴지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안쓰럽기까지 한다. ‘나를 그렇게 몰아붙여야만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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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프로스트’ 중 닥터 프로스트는 정신병원에서 한 사람을 자살로 몰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도망가는 장면이 있다. 심리학에는 ‘방어 기제’ 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방어 기제라는게 부정적인 것도 있지만, 긍정적인 것도 있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들이 취하는 방어 기제. 그 중에 억제(suppression)라는 것이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억압이 무의식이라면, 억제는 의식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억제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아가 어느 정도 힘이 있어야 한다.’

그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그의 죄를 인정해야 했을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해야 했을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가 감정을 직면하기 위해서는 먼저 도망쳐 직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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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프로스트 中


도망가는 건 비겁한 것이 아니다. 다시 돌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다시 그 상황에 직면하기 위한 후퇴일 뿐이지, 실패가 아니다.


“피부에 생채기가 나서 피가 흐를 때, 마치 거기에 상처가 없는 것처럼 때수건으로 벅벅 미는 사람은 없다. 너무 아프니까. 보통은 그 상처를 일단 덮어둔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서 남들이 만지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너무나도 다르게 대한다. 마음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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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벌어져서, 나 자신이 너무 싫고 괴로울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도망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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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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