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영혼이 쏟아지는 소리, 나이팅게일의 소리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5.25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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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한 영혼이 쏟아지는 소리
나이팅게일의 소리


초등학생 때 기르던 토끼가 죽은 적 있다. 토끼는 입을 조금 벌리고 발을 까뒤집고 있었다. 나는 그 애가 자는 줄 알고 눈 살덩이를 살짝 들춰봤는데, 그 까만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죽음이란 것은 생각보다 가깝고 친숙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형태는 여전하지만 토끼는 죽어있었다. 어떤 이유로 토끼가 죽었는지, 왜 내가 그렇게 그 토끼를 아꼈는지, 그 토끼의 이름은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토끼 시체를 들고 뒷산으로 가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힘없이 축 늘어선 토끼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름의 온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토끼의 시체로부터 내 팔안쪽과 손을 타고, 병균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토끼가 병으로 죽은 것도, 바이러스가 실제로 그런 것도 아니었을텐에 온몸이 간지러웠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죽음의 병균같은게 나를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안고있으면서도, 어딘가 내던져버리고 싶었다.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나왔었다. 그게 내가 최초로 경험한 죽음이었다.

사랑한다는 것은 영혼의 일부를 쪼개 서려넣는 것과 같다. 토끼는 내 영혼의 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애가 죽는 것은, 나의 일부가 죽는 것과 같았다. 영혼의 상실은 온갖 망상과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그래서 '사랑한 무언가가 죽는다'라는 공포를 잘 이해하고 있다. 내 육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내가 죽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애완동물이 아니라,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땅으로 쏟아진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은 다시 쓸어담을 수 없다. 더운 콘크리트 위에 뿌려진 물은 증발될 뿐이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사람의 삶은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아주 실험적인 연극은 아니었다. 사회적 문제를 다룬 연극은 그 전에도 많이 감상했었다. 밤에 일어나 울부짖는 특이한 새, 사람이 많은 도로에서 더 크게 우는 나이팅게일을 모티브로 가져온 이 연극은, 다른 나이팅게일이 그러했듯이 극장과 거리를 날아다니며 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의 울음소리가 더 귀에 잘 울렸던 이유는, 이 연극의 근본이 되는 '여고생강간방화' 사건이 나에게 너무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 한 여고생이 집단강간을 당하고 불에 타죽은 잔혹한 사건이지만, 시간이 지나서인지 이제는 저 단어 그대로를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봐도 잘 나오지 않는다. 모든 사건은 색이 바래지는 법이지만, 아이를 잃은 부모의 마음의 일부는 아직도 죽어있을 것이다. 폐허가 된 채로 남아있을 그 빈공간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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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연극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연극의 형태는 사이코드라마를 연상하게 한다. 최소화된 연극 오브제를 배경으로 관객을 향해 쏟아지는 배우들의 탄식과 움직임은 이것이 사회의 문제 이기 전에 개인들의 끔찍한 비극이었음을 시사한다. 소녀가 불에 타버린 자신의 옷을 프로코네와 필로멜라의 신화를 이야기하며 널어놓는 장면은, 강간 피해자의 옷을 찍었다던 사진작가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옷은 평범하고 친숙하다. 한때 누군가가 입었던 옷이기에 경험이 녹아들어있지만, 그 경험의 연쇄는 잔혹한 범죄로 끊겨버렸다. 소녀와 아버지가 맡았던 기름통 뚜껑의 기름냄새는 아직도 이 세상을 맴돌았다. 연극을 감상하는 관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연극의 중간에 울면서 운동화 끈을 정리하는 아버지 뒤에서 소녀가 의자를 끌며 이야기를 중간중간 끊는 장면이 있다. 신발이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데 필요한 안전장치임을 생각할때, 아버지는 소녀가 잘 떠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행동을 계속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정말 아이를 잘 보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간중간 끊기는 아이의 대사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과 사회를 잘 반영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나이팅게일의 소리>는 피해자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이야기도 실었다. 어려운 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이야기는 잘 녹아들었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해하지 않아서도 안된다. 이해하지 않고 고발하는데만 그친다면 문제는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나는 이 지점이 이 연극의 가장 특별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연극을 보고 나간 관객들에게 뚜껑을 건네주면서도 폭력의 본질에 대한 실마리를 놓치지 않는다. 단순히 피해자 가족의 사이코드라마에서 멈췄다면 슬픔에서 끝났을 지점을 좀 더 심도있게 다루게 만든 점이었다.

나이팅게일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밤에 사람이 많은 도로를 뚫으며 크게 울었다. 이번 연극은 정말이지,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를 너무나 닮아있었다.


+)
개인적으로  우범진 배우는 <전화벨이 울린다>에서 얼굴을 본 적 있다. 그때도 문제의 주변에서 오이디푸스를 연기하는 배우로 남았는데, 이번에도 그 비슷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 익숙한 울림에 왠지 모를 반가움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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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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