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무(無)에서 유(有)로 향하는 길보다 유(有)에서 유(有)로 나아가는 길이 더 어렵다. [문학]

글 입력 2018.04.1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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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의 시집, <유에서 유>


혹시 '오은'이라는 시인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오은은 언어유희로 유명한 시인인데요, 소위 말장난처럼 동음이의어나 각운 등을 이용하여 재미있게 이목을 끄는 그의 시는 어렵지 않지만 어렵습니다. 어렵지 않지만 어렵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요? 저도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애써 외면해왔던 제 깊숙한 곳의 감정 혹은 서사를 그의 시는, 구절은, 단어는 콕콕- 찌르고 있습니다. 내면에선 고통과 슬픔, 회의감으로 울부짖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저 자신도 거짓된 표정과 말투와 행동으로 감추고 외면해왔던 그 '무언가'를 오은의 시는 '공감'이란 이름으로 때로는 날카롭고 예리하게, 때로는 다정하게 끄집어 냅니다. 스스로 감추고 외면해왔던 것들을 직접 시를 읽으면서 스스로 무의식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글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또 그의 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나의 일상을, 나의 내면을 도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그는 나의 일상을, 나의 감정을 담아냅니다. 아마 나만의 일상과 감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상과 우리 모두가 살아오면서 겪어왔던 그 평범한 감정을 말입니다. '평범한' 우리를 '특별'하고 '아름'다운, 또한 '평범'하고 '재미'있는 언어로 그려냅니다. 무질서하며 비논리적으로 복잡하게 뒤엉켜있기에 설득력 없어 그동안 하고싶었지만 못해왔던 말들을 그는 마치 능력 있는 '변호사'처럼 대신 해줍니다.

오은의 시집인 <유에서 유>에도 역시 오은의 시를 '오은의 시'답게 만드는 유쾌한 말놀이와 단어들이 제공하는 재미는 여전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자리한 사회의 부조리를 향한 거침없는 폭로와 상처, 어둠 등의 감정을 기록해내고자 하는 의지는 더욱 강해졌다고 합니다. 이 시집 안에는 제가 좋아하는 많은 그의 시들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발췌해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시의 전문이 아닌 시의 일부분만을 가져왔으니, 만일 마음에 드신다면 햇살이 좋은 날 혹은 빗소리가 귀를 두드리며 추적추적 내리는 날 혹은 잠시 나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날, 아무때나 시집을 손에 쥐고 직접 읽어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

여기를 벗어난 적이 없는데
단 한 번도 여기에 속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속이 상한 것은
겉은 멀쩡하기 위한 거지

오은, <미시감>

*

국어 영어 수학 과학 사회 음악 미술 체육
비결은 있었지만 도덕은 없었다/

사회를 미처 다 배우지 못하고
사회에 투입되었던 학생들이
학원에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
준비가 완료된 준비물처럼
입을 앙다물고

오은, <우리 학원>

*

우리 중 하나는 이제 떨어진다는 거죠?
우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만 중요했다/

하나만 남았다
나만 남았다

오늘부로 나는 우리라는 말을 쓸 일이 없게 된다

오은, <서바이벌>

*

핑계는 언제든지 댈 수 있다
책 속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수히 접한 처음들
무수히 남은 마지막들

마음이 한번 마음먹고 얼면 봄이 되도 녹지 않는다

오은, <읽다 만 책>

*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오은, <아찔>



내 주변 사람들에겐 항상 친절해야 해
대신, 나만 사랑해야 해
나한테만 베풀어야 해

뭐든 잘해야 해
뭐든 잘하는 척을 해야 해
나를 과장해야 해
대신, 은은하게 드러내야 해/


다움은 닳는 법이 없었다
다음 날엔 다른 다움이 나타났다
꿈에서 멀어진 대신,
대신할 게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비밀처럼

다움 안에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다음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오은, <다움>

*

아무개에 대한 말들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왔다
아무개가 아무 개라도 되는 듯이
개 잡듯 물어뜯고 헐뜯었다
뜯긴 자리는 비열한 웃음으로 채워졌다
웃는 얼굴에 서로 신나게 침 튀기는 동안,
아무리가 아무렴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알고 싶은 사람이 모르고 싶어졌다
알고 있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 같았다

오은, <아무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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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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