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미겔 데 우나무노, < 안개 > [도서]

살과 뼈를 가진 인간의 실존에 대하여
글 입력 2018.04.1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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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project를 통해 아트인사이트 내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 해서님은 나에게 '운명을 믿는 실존주의자'라는 별명을 붙여주시며 이 소설을 추천해주셨다. 듣던 대로 소름 돋는 소설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그의 조물주 격인 소설을 쓴 작가를 찾아간다는 내용이라고 하셔서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그 부분을 기다렸다. 예상 외로 그 부분은 소설의 말미에 도달해서야 굉장히 짧게 나온다. 그래서 주인공 아우구스토가 언제 작가를 찾아간다는 것이냐는 생각조차 잊어버릴 때가 되어서야 아우구스토는 자신의 조물주에게 찾아갈 결심을 한다.

줄거리를 설명하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을 듯 하여, 아무래도 책을 읽지 않은 분들은 이 구구절절한 감상들과 두서없는 의견들이 공감되거나 이해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때문에, 아직 이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소제목을 위주로 대충 훑어보았다가 다음에 이 소설을 읽게 될 때 여기서 언급된 것들에 주목하면서 읽어보길 권한다.



안개의 의미



... < 안개 >는 제목에서부터 단일하고 명확한 실체에 대한 회의를 드러내며, 우리가 고정되고 단일한 실체라고 간주했던 것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다.

- 작품 해설 中


제목, 안개. 보통 은유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라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언급이 안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인공은 의외로 '안개'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주인공이 자신의 삶에 대해 꾸준히 느끼는 바이기도 하지만,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전체적인 인상을 함축시켜 이 제목을 붙인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게 이 '안개'의 의미는 크게 두 가지로 읽혔다. 하나는 흔히들 그렇게 표현하는대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운명에 대해 '안개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들은 인간의 행동에 의해 벌어지지만 무심한 조물주에 의해 짜여진 각본이 아닌가 싶은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원치 않을 때에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의 불행은 얼마나 충격적인가 하는, 이를테면 이 소설 속 인물인 빅토르의 자식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다.

두 번째는 인물 내면의 안개이다. 아우구스토는 단연 여느 소설 속 주인공이 그러는 것처럼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내면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 안개 >의 '안개'는 두드러지는 특징을 갖는다. 아우구스토는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을 어렵게 느끼며, 자신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무력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성격이 어쩌면 '아무 성격도 없는 성격'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소설 속 인물은 흔히 어떤 사건을 위한 매개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인물은 평면적으로 그려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작가인 우나무노는 이 인물 역시 하나의 개체로 보고, 인간에게 고정된 성격을 강요할 수 없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자신에 대한 아우구스토의 고민 역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듯 하다. 스스로를 아는 것이 제일 어렵다.



언어와 존재에 대한 감상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 동물인가! ... 그는 사물에 이름을 붙이자마자 그 사물을 못 보며 단지 붙였던 이름을 듣거나 쓰인 것을 볼 뿐이다. 언어는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것을 발명하고 혼동시키는 데 이용된다."

- 313p.


하나의 존재자를 온전히 언어로 해명하려면 얼마나 치밀한 과정이 필요할까. 아마 애초부터 불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게으르지만 소통이 필요한 사람들은 속 편하게 '이름 붙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한다. 개인의 행동과 말에 의해 그 개인이 만들어짐에도, 정합적인 행동의 논리에 따라 그 개인이 구성됨에도 우리는 처음 붙인 이름으로 그들을 부름으로써 그들을 끊임없이 제한한다. 마치 아이를 아이라고 정의내리는 순간 그 아이는 '아이'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받게 되는 것처럼, 이름 안에 정체성을 가둬버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무언가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그것을 불사자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의 논의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인물의 차이란 무엇인가



"신은 인간들이 지배하는 것처럼 지배하지 않아요. 신 역시 무정부주의자요. 신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한다. 그 말이죠?"

"맞았어. 맞았어요. 신이 당신을 깨우쳐준 거요. 이리 와 봐요!"

그는 부인을 붙잡고 이마를 바라보더니 흰머리가 드리워진 곳을 훅 불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당신 스스로 영감을 얻은 거요. 그렇소. 신은 복종을 하지... 복종을..."

- 70p.


에우헤니아의 고모부 페르민 씨가 생각하는 신은 인간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는다. 세계와 인간을 창조해냈지만, 인간이 고유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동력을 제공하며 그들 행위의 수단이 됨으로써 복종한다.
 
17장에서, 이 책의 서문을 썼다는 빅토르 고티(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 인물이 소설 속 그 빅토르 고티인 줄 몰랐다...)가 말하는 '소셜'이 이 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 빅토르는 아우구스토에게, 자신이 소설을 쓰려고 한다고 밝힌다.


"내 소설은 줄거리가 없어. 다시 말하면 펜 가는 대로 쓰는 거야. 줄거리는 자기 스스로 만들어지지. ... 그러나 일반적인 소설이 아니라 사람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모른 채 현재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를 종이 위에 옮기려고 해. 나는 앉아서 종이 몇 장을 꺼내어 줄거리에 대한 어떤 계획도 없고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도 모른 채 내게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쓰기 시작했어.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의 말과 행동에 따라서 만들어질거야. 특히 말에 의해서 말이야. 그렇게 그들의 성격이 조금씩 형성되는데, 때때로 아무 성격도 없는 게 성격이 될 수 있어."

- 159~16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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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 안개 >의 작가 우나무노는 소설과 '소셜'을 구분한다(스페인어로 소설을 의미하는 노벨라(novela)의 개념을 전복하기 위해 니볼라(nivola)라는 이름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번역이 '소셜'로 된 것이다). 소설이 작가의 계획으로 인해 인물의 배경과 성격, 그리고 줄거리의 끝이 처음부터 정해져있는 것이라면, '소셜'은 작가가 손 가는대로 쓰기 시작해 결국엔 형성된 인물상에 따라 그 결말이 맺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 그러니까 '소셜'은 사실 작가가 쓴 것이 아니라, 작가가 낳았지만 글 속 인물이 스스로 살아낸 전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 너는 네 손으로 인물들을 이끌어간다고 믿으면서 시작할 거야. 그런데 결국은 그들이 너를 이끌어간다는 것을 쉽게 깨닫게 되지. 작가가 오히려 자신이 낳은 허구적 산물의 장난감이 되며 끝나는 경우가 많거든..."

- 161p.


아우구스토는 누군가가 꿈을 꿈으로써, 그러니까 누군가의 꿈 속에서 서술됨으로써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자신을 포함해 그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면 존재성을 잃어버리는 것처럼, 우리는 창조자(내지는 신)의 꿈 속에 서술됨으로써 존재하거나, 두 사람 이상의 꿈 속에 기록됨으로써 존재한다. 아우구스토는 자신의 삶이 시작부터 그 끝까지 계획되어 고정된 것인지, 아니면 신의 꿈 속에서 자유로운 것인지 고뇌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그가 작가의 꿈, 내지는 소설 속의 존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본인에게 자유의지가 있느냐(특히 죽음에 대한)의 문제는 그에게 중요한 가치였다.


"아, 오르페오, 오르페오. 이렇게 홀로, 홀로, 홀로 잠든다는 것은 단 하나의 꿈을 꾼다는 것이야. 단 한 사람의 꿈은 환상이고 외양일 뿐이지. 그러나 두 사람의 꿈은 진실이고 현실이야. 현실 세계는 우리 모두가 꾸는 공통의 꿈인 것이야."

이어 그는 잠이 들었다.

- 116p.


그렇다면 우리는 소설 속 아우구스토와 무엇이 다를까? 실은 살고 있는 시공간의 차원만 다를 뿐, 소설 속 인물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우나무노가 보여주고자 했던 바이다. 아우구스토나 우나무노 모두 유한한 존재로, 타자의 기억 속에서 재현됨으로써 존재한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의 이름으로 살아남는 것처럼,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통해 살아남는 것처럼. 인간은 불멸을 갈망하는 존재이지만 그럴 수 없음에 생물학적으로 대를 이음으로써 자신을 보존하거나, 업적을 남김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회자되는 방법으로 보존하려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이 책의 저자 미겔 데 우나무노 역시 < 안개 >를 통해 독자들의 기억 속에 재현되고 있으며, 이 책을 주인공 아우구스토의 전기로 본다면 아우구스토 또한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운명을 믿는 실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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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언어라는 것은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온전히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짓 증언이다. 돈키호테가 세르반테스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하며, 안개 또한 우나무노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언어는 그것을 불사로 만드는 수단이기도 하다. 어쨌든 그들은 타인의 기억 속에 각인시켜주는 매개인 언어를 통해 일부로나마 남아있다. 일부일지언정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 살아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자신을 만들어낸 조물주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음에도 실존적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가 창조자의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어했다. 이 지점에서 내가 왜 이 책을 추천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의 탄생과 내 앞에 놓여진 사건들이 체계적으로 정해져있다고 한들, 나는 결국 내가 여태까지 행해온 나의 행동에 따라 형성된 나 자신으로써 그 사건들을 대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고 있는 자, 내지는 조물주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소설, 아니, '소셜'에서는, 그리고 소셜과도 같은 이 인생에서는 그 작가마저 결말을 단언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책의 주인공 아우구스토는 그 삶의 마지막인 죽음까지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살아있는 소설 바깥의 사람들보다 실존적일지도 모른다. 또 한 번 언어와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하게 해주셨음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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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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