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기억에 대한 단상 [영화]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기억을 남긴다
글 입력 2018.04.01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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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나뭇잎 흘러 내리고
언덕 너머로 지나쳐 버린
너는

흐린 머릿속 헤집어 놓은
파란 손 끝 기억에 남아

제비꽃 떨어지던 날엔
투명하게 빛나
우 아
 

실리카겔의 <기억>. 초반의 아르페지오, 느린 베이스 선율, 공간감 가득히 울리는 기타 톤 위로 담담하게 올려진 보컬을 듣고 있으면, 기억 그 자체를 노래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각자 너무나 달라서 형상화 할 수 없는 그 기억의 형체를, 이 노래를 듣는 몇 분 동안에나마 머릿속에 그려보는 기분이다. 최소한의 단어로 이루어진 기억들 속에서 부유하는 것 같은 느낌. 누군가에게 이 기억들은 사람일수도, 물건일수도, 냄새일수도, 음식일수도, 음악일수도, 영화일수도 있다. 이처럼 각자가 가진 기억의 형태는 다를지라도, 기억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두 영화를 (감독의 의도에서 다소 벗어나더라도) ‘기억의 힘’을 주제로 풀어보려고 한다. 노래를 들으며, 각자 기억에 대해 떠올려 볼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

1. 우편배달부로 평범한 삶을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 날 밤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의문의 존재가 나타나 세상에서 한 가지를 없애면 하루를 더 살 수 있게 해준다는 제안을 한다. 첫 번째 물건은 전화기. 전화기는 주인공과 예전 여자친구가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계기이자, 그들 사이를 이어주던 끈과 같은 존재였다. 주인공은 다가올 결과를 예상하지 못하고, 전화기를 없애는 결정에 수긍한다.

주인공과 예전 여자친구는 함께 만나고 나서도 몇 시간씩이나 전화기를 붙잡고 있었을 정도로 통화를 각별히 했던 사이였다. 그러나 전화기가 사라지자 과거의 감정과 추억마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여자친구는 주인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 다음 날 가장 친한 친구와의 우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사라지고, 이어서 시계까지 사라지면서 주인공은 그 물건들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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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억은 단순히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존재를 매개로 남겨진다. 사람들은 물건, 음식, 영화, 노래, 때때로 또 다른 사람까지, 다양한 것들을 통해 누군가를 기억하고 이야기를 추억한다. 방을 정리하다 보면 회상에 잠기게 되는 것도, 함부로 물건을 버릴 수 없게 되는 것도 물건들에 우리의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래는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이십 대 초반의 어느 여름날을 떠오르게 하고, 어떤 냄새는 비 내리던 초가을 무렵 함께했던 사람을 떠오르게 한다.

기억이 가진 힘은 제법 강력해서, 기억이 아니었다면 지나쳤을 단순한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때때로 목숨만큼 소중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하루의 생존과 맞바꿀 고양이의 상실을 거부한다. 하지만 전화기와 영화, 시계와 고양이가 있다면 그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기억으로 세상에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세상에서 없어지더라도 그에 대한 기억은 세상 곳곳에 남아 그 부분을 더욱 소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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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에게는 노래로 기억되는 사람이 있다. 더 이상 볼 수 없어도, 내가 그 노래를 잊지 않는 한 나에게서 그는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해 얘기하고 추억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그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가 키우던 고양이, 그가 사랑했던 음악, 그가 즐겨 했던 게임, 그가 머물던 장소 … 마치 ‘양배추’와 같은 흔적들. 영화에서 주인공의 생사보다 그의 인생이 담긴 존재들에 더 눈길이 갔던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이미 세상은 그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가 세상에 살았던 흔적은 수많은 사람에게로 퍼져 나가 씨앗이 되었고, 매일 그 씨앗에서는 싹이 튼다. 그를 생각하며 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시 그의 흔적이 된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한, 그가 만들어낸 변화는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기억은 소멸되지 않는 연료이다.

기억은 세상 모든 것들을 매개로 하지만, 기억하는 주체도 기억되는 객체도 결국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기억은 사람 간의 연결에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다.


*
주의: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너의 이름은

1. 도쿄에 사는 고등학생 타키는 어느 날부터 이상한 꿈을 꾼다. 시골 소녀 미츠하가 되어 생활하는 생생한 꿈이었다. 시골에 사는 미츠하 또한 타키가 되어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알바를 하는 꿈을 꾼다. 두 사람은 곧 꿈이 아니라 서로의 몸이 실제로 때때로 바뀐다는 것을 인지하고 일기를 통해 대화를 주고 받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사생활을 공유하게 되었지만, 각자 배려할 부분을 규칙으로 정해 놓고 나름 그 삶을 즐기기도 한다.

어느 날 타키는 눈물을 흘리며 일어나고,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미츠하와 몸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타키는 기억에만 남아있는 미츠하의 동네를 그림으로 재현해 간신히 찾아가는 데 성공했으나, 3년 전에 유성 충돌로 인해 파괴된 마을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쿠치카미가케에 담긴 주술적인 힘을 이용하여 살아 있는 미츠하의 몸으로 돌아가, 미츠하를 살려내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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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너의 이름은>은 거주지도, 성격도, 취향도, 말투도 완전히 다른, 생판 모르던 두 사람이 시간을 공유함으로써 죽음까지도 극복하는 이야기이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판타지이기에 가능하지만, 은유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럴 듯하다. 타키는 미츠하가 죽은 날 원인이 되었던 그 혜성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타키는 미츠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였기에 혜성이 떨어지는 장면은 그에게 그저 아름다운 풍경이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난 뒤의 타키는, 마을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죽은 미츠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그에게도 이제 혜성은 재앙이다. 몸이 바뀌었다는 특수한 상황 덕분인 것으로 설명되지만, 나는 서로가 서로로 살았던 기억이 둘을 이어주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아무 접점이 없던 두 사람이 공통의 기억을 가지게 됨으로써 정신적으로 연결되고 함께 생(生)으로 나아간다. 이는 나눌수록 강해지는 기억의 잠재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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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억을 나눔으로써 우리는 어떤 사람을 더 깊이 알게 된다. 잊지 못할 시절을 함께 경험하고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을 끈끈하게 이어 준다. 서로가 서로를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에 좀 더 진한 흔적을 남길 수 있다. 기억은 집단적으로도 기능한다. 월드컵이 열린 2002년의 초등학생 시절을 공유하는 나와 또래들은, 평창올림픽이 열린 2018년을 20대의 중반으로 함께 기억하며 나눌 것이다. 우리를 묶어주는 것은 나이보다도 하나의 기억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기서 기억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본다. 예를 들면 집단적 트라우마를 남긴 세월호와 천안함 사건을 잊지 않는 것.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를 제대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 연대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 기억에 진심으로 함께하고자 한다면, 죽음을 삶으로 바꾸는 것까지는 아니겠지만 생의 의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줄 수는 있다고. <너의 이름은>에서 읽어낼 수 있는 비유는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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