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연극이 끝나고 우리에게 남는 것 [공연예술]

글 입력 2018.02.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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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출판사 인턴을 하고 있던 내게 굉장히 큰 울림으로 다가온 연극이었다. 연극은 잡지사의 외형을 띄고 있지만 잡지사에 국한되는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연극 자체가 ‘사람’과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지 라는 말처럼 사람+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모두 비슷하니까 말이다.

 이 연극을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고상한 것은 아닐 수도 있겠다. 라는 것이다. 순수예술을 하고, 연주를 하고, 무용을 하는 사람들보다도 책은 더 상업적인 측면에 물들어 있구나. 정말 고상한 작업과 고귀한 직업만은 아니구나. 그래서 더 슬프게 느껴졌다. 현실적인 부딪힘이기 때문에. 저번 학기에 학교에서 들었던 공연기획 수업에서 첫 시간에 교수님이 해주셨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예술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수업을 듣지 마세요. 그런 사람은 밝은 면만 봐야 되요. 이 수업은 어두운 면까지 낱낱이 보여줄 겁니다.”



짚어야 될 이야기
 
대본집이 있다면 정말로 구매하고 싶다. 많은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하고 싶은데 연극의 특성상 책이나 영화와 달리 현장성과 동시성, 지나가 버리면 다시 보기 힘든 특성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되새겨야 하는지 기억을 하기가 쉽지 않다. 짚어야 할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이 이 연극 안에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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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좋아하는 가수(라고 말하는)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뉴스로 시작하는 직장의 아침이지만 사실 그들은 그녀의 제일 유명한 노래조차도 잘 모른다. 따라하지도 못할 뿐더러, 음도 틀린다. 그녀가 어떻게 살았는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내가 정말 좋아했던 가수라고 쉽게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내’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를 드러내는 것에 흥미를 가질 뿐이고, 실제로 그들이 가지고 있던 관심의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 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켄드라와 딘이 2부에서 스타벅스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은 피해자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범위 안에 있는 피해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 일반적인 삶이 파괴된 이야기들은 가슴 아프게 한다.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세월호에 대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세월호 이후의 시간이 어느새 3년이 지났다. 그 사건이 있은 후 예술계에서는 다뤄야 한다, 지금, 여기, 이 사태를, 누군가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한다. 라는 생각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의 접근 자체가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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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피해자가 아닌 어느 누군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다룰 수 있겠는가? 에 대한 고민도 많았던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눈 먼 자들의 국가'가 출간되었다. 하지만 연극 안에서는 그런 사건에 버금가는 충격적인 사태를 ‘책’이라는 ‘상업적’인 도구로 사용해내려는 의도가 다분하게 느껴진다.

 이 부분이 출판사에서 인턴을 하고 있던 내게 책 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고상한 작업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결국 움직이는 것은 돈이었다. 켄드라도, 딘도, 편집장도 각각의 이윤에 맞춰 벌어진 사건을 재조명할 뿐, 실제로 이 사건의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에겐 진실이 누군가에겐 위선이다. 그리고 켄드라의 이야기. “사건은 점점 밀려나는 거야.”


 
배우들의 연기

 글로리아의 연기는 큰 임팩트를 남겼다. 1부에서 몇 마디 하지 않고 들어가지만 나올 때마다 존재감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극의 중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고, 2부에서 편집장으로 역할을 바꿨을 때도 1부의 글로리아 맞아? 싶을 정도로 확연히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인턴 마일즈의 연기는 이 사람의 다른 연기를 좀 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이 연기를 잡아먹은 느낌이 강했다. 애니의 연기는 최악이었다. 연극 이란 건 결국 우리에게 일상을 보여주지만 무대에서는 과장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애니는 연극이라는 무대에 올라선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이랑 대화하는 줄 알았다. 대사도 잘 안 들리고 묻히고.. 2부에서 편집장과 캘리의 대화에서 캘리가 “어떻게...” 라는 단 세 글자를 말 하는데 그 모든 몰입과 감정을 다 깨트려놓는다.

 마지막에 로린이 저는 좀 더 존재하고 싶은 걸요. 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울림은 사실상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작정하고 이 마지막 멘트에 힘 줄거야, 이 멘트에 감동해! 라고 강요하는 느낌이 강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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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호혼이 가지는 의미
 
 좀 더 존재하고 싶다는 멘트 자체의 울림보다 내게 더 큰 여운과 울림을 준 것은 모든 연극배우가 내려간 무대에서 로린의 책상에서 혼자 조용히 움직이고 있던 노호혼이었다. 노호혼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빛을 받아 고개를 끄떡끄떡 거리는 장난감이다. 일본어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태평하게 있는 모양, 유유자적, 빈둥빈둥 이런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아마 노호혼이라는 명칭을 몰라도 찾아보면 아 이거, 하고 금방 알 듯하다. 실제로 직장인들 책상, 혹은 자동차 선반에, 서재에, 카페에, 일식집에 많이들 비치가 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내가 그것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노호혼이 내포하는 의미 때문이다. 우리는 안티 스트레스성 성격을 가지고 존재하는 노호혼을 일상에서 접하고, 흔하게 알아본다. 하지만 우리는 그만큼 스트레스, 혹은 우울증에 대하여 민감한가? 생각보다 우울증을 가볍게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로는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는 노호혼이 막이 내린 뒤에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에서 끊기지 않는 ‘연속성’을 생각하게 한 것이다. 극은 끝나고 배우는 내려왔고,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관객이었던 우리의 인생은 계속되고 있다.

 당신들의 인생은 어떠한가? 글로리아와, 혹은 여기 나오는 사람들과 다른가? 라는 물음을 던져주는 느낌을 받았고, 이것이 마지막의 여운과 울림을 장식했다. 로린의 마지막 대사인 좀 더 존재하고 싶다는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말이다.
 
    
[신승욱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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