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에겐 암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문화전반]

휴식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
글 입력 2018.01.24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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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극에서 암전이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보이지 않고 특별히 들리지도 않는, 감각이 사라지고 어딘가에 정신만 떠있는 느낌이 좋기 때문이다. 잠들기 전에도 같은 경험을 함에도 암전이 다른 것은 집중과 집중 사이에 잠시 모든 감각을 내려놓고 쉬는 시간이기에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암전의 느낌은 극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휴식의 느낌이다.

 비록 그 느낌은 다르지만 암전과 같은 휴식시간은 대부분의 매체에 존재한다. 글에서는 문단이 구분되는 지점이나 챕터가 바뀌는 지점이 있고, 노래에는 쉼표와 간주가 있고, TV에는 광고 시간이 있고, 게임에는 로딩 시간이 있다. 대부분의 매체를 흡수하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하기에 이런 휴식시간이 없으면 금방 지쳐버리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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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암흑이 필요하다 -


 장기하와 얼굴들이 부른 ‘TV를 봤네’에는


“왜 자막이 올라가는
그 짧디 짧은 시간 동안에는
하물며 광고에서 광고로 넘어가는
그 없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시간 동안에는”


 라는 가사가 있다. TV의 휴식인 광고는 감각의 휴식이 아니다. 광고라는 자극이 계속 들어올 뿐만 아니라 광고 시간에 리모컨을 들어 새로운 자극을 찾아가는 일이 흔하다. 결국 감각의 휴식은 없게 되는 것이다. 감각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채널을 찾아가거나 광고의 정보를 흡수하는 것은 생각의 부분도 차지하는 일이다. 암전은 당연히 그렇거니와 문단 띄기 역시 부분과 부분 사이에서 생각을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새로운 자극을 찾는 것은 생각의 정리는 둘째 치고 가만히 보던 것보다 더 많은 새로운 생각들을 구성하는 부분이다. 결국 TV를 볼 때 우리는 감각과 생각 모두를 계속 자극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자극을 계속해서 공급하는 것은 더 큰 재미를 유발하기도 한다. 계속되는 자극은 자극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하고 이는 자극 외의 것과 자신의 분리를 만들어낸다. 즉 기존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다. 하지만 암전이 주는 특별한 휴식의 느낌은 주지 않는다. 그 자극에서도 벗어나는, 기존과 자극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상태를 만들어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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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


 일상의 휴식도 이와 유사할지 모른다. 종종 휴식이 사치라고 느낄 때가 있다. 어쩔 때에는 사치를 넘어 죄악으로까지 느껴진다. 그리고 이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모습인 듯하다. 그러기에 휴식의 시간에도 무엇인가를 하려고 한다. 새로운 목적을 수립하려고 한다. 하다못해 휴식을 목적으로 설정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여행을 갈 때에도 목적을 설정하고 여행을 하려고 한다. 아무것도 안하는 휴식도, 갖춰진 틀 없이 떠나는 여행도 그것이 목적으로 설정된다면 목적에 국한되게 된다. ‘아무것도 안 하기’가 목적인 휴식에서는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자극을 찾아가는 것과, 다른 채널을 찾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결국 자신이 세운 목적에 갇히게 되는 순간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휴식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여기까지 말한다면 휴식에 대한 사고가 부족한 것일 것이다. 우리가 휴식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흐름에 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내가 하던 일에 대한 흐름이자 다른 사람들이 가져가는 거대한 흐름을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휴식을 막는 것이 아닐까. 휴식을 취하면 가야하는 흐름을 타지 못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휴식을 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적어도 필자 자신은 그런 부담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면 일상에서 암전을 가지는 두려움은 잠시 내려놔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극에서 암전이 흐름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극의 흐름을 위해 존재한다. 문단 띄기 역시 그렇다. 더 큰 흐름을 위해서 문단의 구분은 꼭 필요하다. 그러니 아무런 목적이 없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적막을 누려도 되지 않을까. 이것은 사치가 아닌 당연한 시간의 한 부분이 아닐까.


[김찬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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