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공감이라는 이름의 위로, 연극 '경남 창녕군 길곡면'

글 입력 2018.01.13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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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길에 부랴부랴 지하철을 타고, 나보다 늦게 퇴근해서 더 분주했던 친구와 혜화에서 만났다. 혜화에 도착하니 7시 20분, 연극 시간은 8시. 둘 다 배가 많이 고팠지만, 식당에 가기엔 애매한 시간이었다. 지금은 일단 대충 때우고, 끝나고 나와서 맛있는 거 먹자. 그래그래. 유난하게 바람이 부는 대로변에서 포장마차를 탐색하다가 미니라는 이름으로 농락하는 붕어빵을 패스하고 떡볶이를 골랐다. 사람이 유독 복작이는 곳을 골라서 들어갔더니, 웬걸. 서울에서 먹어본 떡볶이 중 거의 손꼽히는 맛이었다. 늦을까 싶던 걱정이 무색하게 떡볶이와 튀김, 어묵 국물까지 따끈하게 비우고는 여유롭게 소극장에 들어갔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젊은 직원분이 싹싹하게 자리를 안내해주었다. 또 다른 직원분은 관람 전 주의사항을 관객들에게 일러주었다. 큰소리로 말하는 내용에 연기하는 사람 특유의 어투가 묻어 나왔다. 주연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게 자질구레한 일을 도맡느라 늦게까지 분주해 보이네. 최저임금은커녕 열정페이 중에서도 가장 심한 곳이 연극계라던데. 꿈 하나로 버티고 있는 분들이려나. 오늘 연극의 주제가 주제인지라 씩씩한 그분들을 보면서 자꾸만 상념이 피어올랐다.

 암흑 속에서 배우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함께 막이 올랐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며 수다를 시작하더니 한참을 그렇게 세상에 둘만 있다는 듯 대사를 나누었다. '하와이에 가면...'으로 시작하는 상상(혹은 환상)을 말리지 않으면 내일모레까지 떠들 기세였다. 한데 그 수다가 참 맛깔나서 연극의 막이 올랐다는 느낌보다는 누군가의 일상을 훔쳐보는 기분이었다.

 단 두 명이 꾸려가는 극이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지만 괜한 기우였다. 한정된 인원의 연극인만큼 때론 굳이 옮기지 않아도 될 소품을 옮겨가면서까지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또, 그런 연출자의 노력만큼 배우 두 분의 호흡도 빛났다. 10년 전 캐스트 그대로라는 주연들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가끔 상대가 버벅거리려는 순간마다 감쪽같이 받쳐주며 위기를 모면했다.

 그 자연스러움은 신이 바뀔 때마다 의도적으로 잠시 깨졌다. 다음 신으로 넘어가기 위해 배우들이 직접 소품을 재배치하는데, 그 모습을 조명도 안 끈 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걸 관객들이 보든 말든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준비가 완료되면 배우들은 뻔뻔하게 다음 대사를 친다. 헐떡이는 호흡을 숨기면서, 마치 방금까지 그 자리에 있었던 양 순식간에 감정을 잡은 것이다. 대단한지고.

 조명이 꺼진 채로 시작했던 연극은 다시 조명이 꺼지며 끝을 맺었다. 창피하게도 중간에 두 번 정도 눈물을 흘리는 위기를 겪은 건 비밀이다. 오열하는 박선영 배우님의 연기가 너무 현실적이어서 복받치지 않을 수 없었다. 창피함에 옷으로 재빨리 눈물을 찍어냈는데, 중간중간 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던 걸 보면 그냥 울 걸 그랬다.

 연극은 만족스러웠다. 내용도 좋았고, 연기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보고 나면 한동안 먹먹한 감정으로 나의 미래, 우리의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는 여운도 좋았다. 사실 이 연극을 보러 가기 전 어떤 힌트나 해답을 얻길 기대하고 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러진 못했다. 애초에 정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었는데 나도 참 뭘 바랐던 건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약속했던 맛있는 걸 먹으러 치킨집에 갔다. 오래간만에 과식을 잔뜩 하며 인턴과 수습 이야기, 정직원이어도 깜깜한 회사생활 등 친구와 암울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두웠던 수다와는 달리 꽤 후련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그날 연극과 친구를 통해 공감이라는 위안을 얻어서 그랬을 것이다. 나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었다는 공감만으로 큰 힘이 난, 고마웠던 하루의 마무리, '경남 창녕군 길곡면'의 후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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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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