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예술가의 예술가, 몽마르트의 뮤즈, 마리 로랑생.

글 입력 2017.12.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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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마리 로랑생, 그녀는 아름답고 쾌활하며 묘한 매력을 발산하여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의 뮤즈’라 불렸다. 그렇지만, 소녀와 뮤즈라는 별명으로 남기에 그녀는, 그녀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꽤나 독립적인 여성상이였다. 여성화가가 드물던 약 100여년 전, 그녀는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재능을 인정받으며 화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의 ‘벨 에포크’ 시대에 전 세계 예술가들을 대표하며 ‘예술가의 예술가’로 불리던 20대부터 70대까지, 약 몇 십년에 걸쳐 그녀만의 화풍을 확고히 하였다. 여성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는데까지 걸린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더군다나 제 1,2차 세계대전과 당시 유럽의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라는 풍파를 온몸으로 맞으며 예술의 길을 걸었던 그녀에게 체감상 시간은 가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예술적 삶은 어떠했을까, 더욱 궁금해지는 바이다.





청춘시대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ee Marie Laurencin.jpg 
자화상, 1905년경, 목판에 유채, 40x30, Musee Marie Laurencin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ee Marie Laurencin.jpg
파블로 피카소, 1908년경, 캔버스에 유채, 41.4x33.3, Musee Marie Laurencin
 

풍경화, 정물화, 자화상, 피카소초상화 등이 주된 작품이 되는 시기이다. 파리의 아카데미 앙베르에서 재능을 인정받은 후,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실이자 전 세계 예술가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세탁선(洗濯船: Bateau-Lavoir)을 드나들며 기욤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앙리 루소 등과 어울리며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를 일궈나갔다.

 
열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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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아폴리네르와 노르망디의 여행에서, 1913


그녀는 피카소의 소개로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연인이 모더니즘의 선구자였던 동시에 막스 자코브, 앙리 루소 등과 교류하며 그녀의 작품은 입체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는 영향을 받되 본인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지적인 관념을 대입하는 모더니즘의 화풍을 반대하며 본능과 직관에 따라 그림을 그려내었다.

 
망명시대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jpg
33세무렵, 마드리드에서, 1916
 

기욤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엉뚱하게 휘말리게 되며, 그들의 연애는 1911년에 끝을 내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귀족 출신의 연하의 독일인 남작과 결혼하게 되었지만, 신혼 역시 평탄치 않았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남편과 스페인으로 망명을 가게 되었고, 당시 남편의 알코올 중독 및 방탕한 생활이 이어졌다. 따라서 이 시대의 작품에는 작가의 고통, 비애, 외로움이 잘 드러난다. 그림과 문학만이 그녀의 구원 통로였기에, 섬세하고 미묘한 색채를 사용하여 그녀만의 화풍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한다.

 
광란의 시대

성(城)안에서의 생활, 1925, 캔버스에 유채, 114.4x162.3, Musee Marie Laurencin.jpg
성(城)안에서의 생활, 1925, 캔버스에 유채, 114.4x162.3, Musee Marie Laurencin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ee Marie Laurencin.jpg
꽃과 비둘기, 1935년경, 캔버스에 유채, 105x125, Musee Marie Laurencin
 
샤를 델마스 부인의 초상, 1938, 캔버스에 유채, 100x73, Musee Marie Laurencin.jpg
샤를 델마스 부인의 초상, 1938, 캔버스에 유채, 100x73, Musee Marie Laurencin
 

그녀는 결국 독일인 남편과 이혼한 후, 그녀의 예술적 고향이였던 파리로 복귀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예술세계를 구축해 나가 유럽과 미국까지 화풍의 세계를 알리게 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걸쳐 예술활동에 집중했고,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 받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성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시대를 잘 타고난 작가와는 거리가 멀다. 오직 그녀만의 색채에 대한 매혹적인 감각만이 그녀의 자리를 확고히 해준 도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황홀한 핑크, 옅은 블루, 청록색, 회색 등 감미로운 색조에 단순한 형태를 더해 슬픔을 표현한 시적인 여성상으로서, 그녀의 작품만이 보여주는 평안함으로 세상의 고통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려 했다. 또한, 최초로 여성의 눈으로 응시한 여성성을 포착했다. 당시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로부터 역할을 분리해 여성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했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당당히 거부하며, 남성의 시각에서 여성을 바라봤던 서양미술사의 흐름에서 탈피한 예술가였다.
 
혼란스러운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있는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면서도, 본인만의 화풍을 탄생시켜 여성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 마리 로랑생, 그녀의 작품을 직접 두 눈으로 곧 향유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이기까지 한다. 이것이 바로 *걸크러쉬인가.


*걸크러쉬 : 여성이 다른 여성을 선망하거나 동경하는 마음 또는 그런 현상. (출처: 시사상식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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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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