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 겨울, 큐슈 -3 [여행]

글 입력 2017.12.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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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날은 굉장히 이상적인 아침이었다. 우리는 그날 온천으로 유명한 유후인에 가기로 했었고, 유후인으로 가는 특별한 기차인 '유후인 노모리'는 표를 구하는 것이 힘들다고 들어 도착한 날 바로 표를 예약해 놨었다. 이른 시간에 일어나 하카타 역에 도착했고, 그 유명한 에키벤을 사러 갔다. 고르고 골라 구성이 가장 마음에 드는 벤또(일본식 도시락)을 골랐고, 유후인 노모리를 타기 위해 플랫폼으로 향했다. 일찍 도착한 덕에 유후인 노모리가 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우리는 우리 좌석에 앉아 열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까지는 굉장히 완벽했다. 우리는 좌석에 앉아 온천 여행을 기대하고 있었고, 처음에는 비어있던 좌석도 하나둘 채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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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누군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중화권 국가에서 온 것 같은 가족은 우리에게 이곳이 우리 좌석이 맞냐고 물었고, 우리는 당연하다고 답했다. 그런데 정말 웃기게도, 그들이 우리에게 내민 표에는 우리가 앉아있던 좌석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물론, 우리의 표에도 우리가 앉아있던 좌석의 번호가 찍혀있었다. 다른 것은 딱 하나, 날짜였다. 날짜가 달랐다. 다시 보니 우리 표에 찍힌 날짜는 우리가 여행을 떠나려 한 셋째 날이 아닌, 그 다음 날, 우리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의 날짜였다. 너무 당황스러워 그들에게 연거푸 죄송하다 사과를 하고 짐을 챙겨 서둘러 내렸다.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다. 당장 계획이 없었기에 우리는 일단 호텔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돌아가는 내내 미안함을 전하는 나에게 친구는 '한 번만 더 미안해하면 가만 안 둔다.'고 말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초조함에 덜덜 떨리던 마음이, 그 말 한마디에 차분해졌다. 나였다면 노발대발 화를 냈을 것 같은데, 친구는 이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어딜 가야 할지 다시 찾아보자는 말을 건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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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호텔로 들어온 우리는 침대 위에 앉아 에키벤을 먹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맛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맛과 관계없이 굉장히 특별한 식사였다. 에키벤을 호텔 침대 위에서 먹다니, 다시 생각해도 유쾌하다. 에키벤을 먹은 후, 우리의 목적지는 후쿠오카 근교의 '다자이후'로 결정됐다. 어차피 하루 일정이 통째로 취소된 것이기 때문에 조금 느긋하게 숙소 옆 텐진 거리의 골목 골목을 둘러보다 지하철에 올랐다. 40분 정도를 달려 종착역에 도착했을 때, 밖은 빗소리로 가득했다. 우리가 후쿠오카를 떠나올 때부터 한 두 방울 내리기 시작한 빗줄기가 생각보다 거세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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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역을 빠져나오자 엄청난 인파가 우리를 반겼다. 비가 내리는 날씨이기에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큰 착각이었다. '공부의 신'을 모셔놨다는 다자이후까지 가는 길은 상점으로 빼곡했다. 어묵을 파는 곳, 장난감을 파는 곳, 기념품을 파는 곳들을 지나쳐 우리는 유명한 '모찌'(일본식 찹쌀떡)를 파는 가게에 들러 허기를 채웠다. 친구는 모니카 같은 것을 사고, 나는 딸기가 올라간 찹쌀떡을 샀는데 생각한 것보다 딸기가 너무 셨던 기억이 난다. 사당에는 정말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북적북적한 곳을 빠져나가자 넓은 호수가 있었고 비 때문인지 굉장히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그때 그 호수를 거닐면서, 호수 위에 떠 있는 작은 나무통들을 보며 저게 도대체 뭘까, 혹시 무덤은 아닐까 고민했는데 사실 여전히 그게 무엇인지 답을 찾지 못했다. 궁금하다. 그건 정말로 뭐였는지, 그리고 맑은 날의 그 호수는 어떤 분위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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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을 빠져나온 우리는 또 주변을 무작정 걸었다. 도대체 골목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골목대장들도 아닌데 또 골목이란 골목은 죄다 들어갔다 나와보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걱정 없이 걷다 사당과는 대조적으로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도착했다. 아마 주민들이 살는 곳 같았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개미 하나 안 지나다닐 정도로 고요한 그곳이 왠지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북적북적한 곳을 빠져나와 또다시 아무도 없는 곳에 우리 둘만 남게 되었을 때의 그 정적과 적막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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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를 다 둘러보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후쿠오카로 돌아갈 생각이 들었고, 처음 다자이후에 올 때와는 다르게 버스를 타고 하카타 역에 도착했다. 하카타 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허기짐 때문에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아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가 선택한 메뉴는 일본식 곱창전골인 '모츠나베'였고, 브레이크 타임임에도 불구하고 가게 앞에는 이미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다. 첫날, '키와미야 함바그'를 먹으러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허기짐에 잠식된 우리는 다른 메뉴를 생각한 적도 없고, 생각할 힘도 이동할 힘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식당에 앉아 모츠나베 국물을 한 입 떠먹었을 때의 그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곱창'을 넣고 끓인 전골이기 때문에 느끼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오히려 굉장히 담백해서 정말 며칠 굶은 사람들처럼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 맛이 정말 감동이어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몇 번 비슷한 음식을 먹으러 갔었지만 글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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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하카타 역을 나와 우리는 나카쓰 강변을 거닐었고, 또 숙소 주변을 걸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실패하지도 않았던 우리의 여행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는 2년이 다 되어가는 그 겨울이, 그때 걸었던 그 길들이 눈을 감으면 아직도 펼쳐지는 걸 보면 우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일도 서울은 춥겠지. 그리고 길 한복판에서 나는 다시 추억할 것이다. 그 겨울의 규슈와 그 겨울의 길들, 그리고 그 겨울의 우리를. 추운 이 밤, 아마 가장 그리운 것은 그곳에서 나를 가장 따뜻하게 만들어준 너일지도 모르겠다.





PHOTO BY. J.UKJ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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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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