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야기꾼과 함께한 유럽 일주 : 2017 하림과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의 < 집시의 테이블 > [공연]

글 입력 2017.10.08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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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적으로 살다 보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의 영역에 들어오지 못한다.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나 필자는 한국이라는 한 공간에서, 또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20여 년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 조차 하지 못했었다. 20여 년 동안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으면 자연스럽게 도착했던 집, 익숙한 동네의 풍경과 내음, 자주 보던 얼굴들. 자잘히 바뀐 것도 있겠지만, 삶에서 집은, 이 나라는 한 뭉텅이가 되어 차마 떨어트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그래서 여행을 싫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방랑하는 삶은 낯설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사는 삶은 차마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이기에, 디즈니 주인공들의 이야기인 양 생각했었다.
 
관성적인 삶이 아닌, 낯선 정취를 목격하고 싶었기에, 집시의 테이블 앞에 앉아, 그들의 여행담을 들었다. 이곳은 한국이고, 신당이고, 작은 공연장인데, 어떻게 사람들을 저 먼 유럽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9와 4분의 3번 승강장을 통과하듯, 집시의 마법은 우리를 저 먼 곳으로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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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려한 이야기꾼의 동행


공연장 안으로 들어가면 집시의 테이블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스크린에는 신비로운 광선들이 춤을 추고 있고, 테이블 위에는 자잘한 음식과 술이 놓여 있다. 그리고 테이블 앞에 악기를 든 집시들이 앉아 연주를 시작한다. 파리에서 그리스로, 아일랜드로 다시 파리로. 이 기나긴 여정에는 우리가 흔히 ‘여행’하면 떠오르는 여행지의 배경이 없다. 공연 시작 전에는 영상 빔을 쏘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지만, 스크린은 심령술사의 마법 구슬 속 전기 광선들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파리에서 시작하겠다는 집시의 말은 그래서 와 닿지 않는다. 여긴 한국인데? 여기가 어떻게 파리야? 지루한 상상력을 가진 관객에게 불쑥 반감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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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션이 만드는 이국의 음악은 환상적이다. 마치 파리에 가면, 그리스에 가면, 아일랜드에 가면 목격할 수 있는 버스킹처럼, 세션의 연주에선 그 나라의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나 바이올린 연주자의 절도 있던 연주가 큰 인상을 남겼다. 불쑥 솟았던 반감과 함께 낯선 음악이 다소 지루해지려던 찰나, 이 프로페셔널한 이야기꾼은 시각적인 장치들을 배치한다. 아일랜드의 아이리쉬 댄서, 결혼식 피로연의 스윙 댄서, 그리스의 여신과 몽마르트 언덕의 여인 호란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호란의 화려한 의상과 신비한 음색은 그리스 음악의 대미를 장식하고, 아이리쉬 댄서와 스윙 댄서의 춤사위는 세션의 힘찬 연주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더한다. 특히, 관객들은 호란의 노래에 ‘oppa!’라는 추임새를 넣기도 하고, 무대 위로 올라가 아이리쉬 댄스를 배우기도 하며, 집시의 여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지레 걱정했던 우려와 반감은 유려한 이야기꾼의 재간으로 눈 녹듯 사라졌다.

 
 
마임이스트의 활용

 
시각적 장치의 정점은 바로 마임이스트의 활용이다. 집시의 대표성을 띠고 움직이는 이 마임이스트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되기도 하고, 악기를 훔치기도 하고, 하림의 멘트를 비웃기도 하며, 공연 중간중간의 휴지(休止)를 몸의 움직임만으로 채운다. 가면으로 눈과 코를 가린 마임이스트는 몸과 입의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뺏는다. 이 마임이스트는 관객에게 끝까지 얼굴을 노출하지 않는데, 그래서 그의 움직임만이 강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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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임이스트는 공연 스토리텔링의 주인공이다. 특히 파리부터 다시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는 마임이스트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음악과 함께 펼쳐진다. 물론 이 스토리텔링에 개연성과 핍진성은 부족하다만, 마임이스트의 움직임과 집시들의 연주로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갈 만하다. (완벽한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공연도 아닐뿐더러) 마임이스트가 여행을 끝내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오는 공연 후반부에는 마임이스트는 관객 자신으로 완벽하게 동화된다. 냉장고를 열고 무언가를 마시고, 익숙한 내음의 이불을 덮고 잠을 청하는 모습은 여행을 마치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온 많은 여행객들을 떠오르게 한다.


 
다시, 집으로

 
잠시간의 환상적이었던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모습. 이로써 공연은 무한한 방랑이 아닌, 일상으로의 회귀로 막을 내린다. 평생을 방랑하며 살 순 없는 다수의 사람들처럼. 여행에서의 소중한 기억을 안고 익숙한 곳에서 다시금 잠을 청하는 집시의 모습은, 공연장을 벗어나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향해야 할 관객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힘을 건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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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시의 마법이 풀리는 순간에도 허무함을 느끼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 마법의 기억을 행복하게 안고 갈 수 있게. 여행의 행복한 기억을 서랍 속에 넣어, 지칠 때마다 꺼내보며 그렇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그렇게 집시의 테이블은 기억을 선사한다. 공연장을 나서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졌다면, 이 집시의 이야기는 성공한 게 아닐까.  저 곳을 목격했다고, 관성적인 삶을 멈출 수는 없겠다. 그러나,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의 아름다운 기억 한 조각은 오래도록 서랍 속에 간직할 것이다.

여행이 떠나고 싶은 가을 날, 책상 서랍을 열어 집시의 선물을 꺼내본다. 숨을 고르고 다시, 일상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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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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