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느닷없이 불어온 이국의 향기_집시의 테이블

글 입력 2017.10.0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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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무심하게 공기를 흔들어 놓는다. 낮엔 살짝 땀이 비집고 났었는데. 이제는 그것들이 바삭바삭하게 식어버린다. 가을이 문틈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것만 같다. 그런 날씨였고 애매한 하루였다, 사랑하는 동생과 함께 <집시의 테이블>을 만나러 바삐 발길을 옮겼던 그 날은.


집시 : 인도 북부에서 이동을 시작해 유럽 등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랑민족


  진부한 말이지만, 어떤 공연에서도 ‘호흡’이란 게 중요하다. 관객과의 소통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공연이든, 그냥 자기 할 일만 하고 떠나버리는 공연이든 마찬가지다. 공기에도 색깔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첫 만남에서는 그 색깔이 뚜렷해진다. 어색함의 색. 그것은 도시의 밤하늘처럼 진한 푸른빛일 수도, 회색기가 도는 보라색일 수도 있다. 소박한 우연으로 한 데 모인 관객들이 공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에 따라 공기의 색깔은 쥐도 새도 모르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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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은 공기를 조금이라도 밝은 빛으로 바꿔보기 위해 무조건 박수를 유도하거나 환호성을 내뱉기를 요구하고는 한다. 공기가 색깔을 가졌다는 사실을 짐짓 자신만 아는 척하면서. 하지만 하림은 그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여러분, 우리 너무 어색해요! 배에 힘 좀 푸세요. 집시들은 배에 힘도 안주고 다녀요!” 해결 방법도 꽤나 신박했는데, 몇몇 객석 아래에는 조그마한 장난감 같은 와인이 하나씩 붙어있는 게 아닌가? (나는 받지 못했지만) 그 때부터 마음이 확 풀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름 열린 마음으로 공연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쳐놓은 빗장 따위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무대 앞 객석이 아닌, 집시들이 앉아 있는 무대 위 테이블, 그 한 귀퉁이로 살며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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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함께 여행을 떠났다. 프랑스로 갔다가, 그리스, 아일랜드. 멍하니 한 군데 앉아만 있으면서 멀고 먼 유럽을 방랑한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건 둘째 치고 억지스럽진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테이블에서 함께 하기로 한 순간부터는 집시의 음악을 타고 자유롭게 흐르기 시작했다. 실제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아코디언, 그를 비롯한 이름 모를 악기들의 소리가 뭉쳐진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음악, 웃고 싶으면 웃고 공상하고 싶으면 공상하는 듯 한 모습의 하림과 집시앤피쉬오케스트라 단원들. 그 앞에서 나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배에 힘을 빼고, 어깨도 축 늘어트리고, 비어있는 앞좌석에 마음껏 몸을 기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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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테이블엔 단순히 음악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지 않았다. 무대 위를 자기 멋대로(?) 돌아다니는 집시 행색의 한 남자를 내내 지켜볼 수 있었고, 그리스어로 그리스 집시들의 노래를 읊조리는 호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통통 튀는 매력의 아이리쉬 댄스와 사랑이 넘치는 두 남녀의 스윙댄스도 볼 수 있었다. 집시가 나눠주는 빵조각도 조금 집어먹었다. 언젠가부터 공연장의 공기는 노란빛과 붉은 빛을 띠며, 자연스레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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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준비된 멘트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림이 말하길 돈이 없어서 그렇단다. 항공권 인아웃이 같아야 좀 더 싸다면서. 여행을 끝낸 집시는 집으로 돌아가 누더기 자켓을 벗어 걸어두고, 화장실에서 쭈뼛댈 필요 없이 양치질을 한다. 그러고는 자신의 살 냄새가 얼룩진 이불을 덮고 곤히 잠이 든다. 나는 이 모든 말과 행동들이 배려로 느껴졌다. 마음껏 즐겼고 열심히 걸었으니 편히 쉬고 또 힘찬 하루를 시작하라는 배려. 괜한 허무함에 짓눌리지 말고 여행을 떠났던 바로 이곳에서 여독도, 아련함도, 느닷없이 불어온 이국의 향기도 충분히 머금은 뒤 집으로 돌아가라는 마음.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바깥으로 나오니 바람이 조금 더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눈앞에 있는 지하철역을 등지고 조금 떨어진 버스터미널로 천천히 걸어갔다. 현실의 고민들을 등 뒤에 잠시나마 버려둔 채, 이젠 어렵지 않은 서울의 길을 여행객이라도 된 냥, 숨막히게 행복한 기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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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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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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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연
    • 리뷰 읽으면서 채은님 글인 것 알아챘어요ㅎㅎㅎㅎ 딱 읽어도 보암보암같은, 채은님만의 글이 느껴져요! 저도 기대했던 공연인데 사정상 함께하지 못해서 아쉬웠지만..ㅜㅜ 즐거우셨다니 기뻐요!! 잘읽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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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달곰
    • 2017.10.14 11: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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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나연나연씨, 안녕하세요! 리뷰에 댓글이 달리는 일이 거의 없어서 깜짝 놀라 들어와봤는데 너무 반가워요. 다음에 기회 있으시면 꼭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ㅎㅎ 댓글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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