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언어는 썩지 않는다 [문화 전반]

글 입력 2017.09.16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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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동안 많은 세월을 살아온 건 아니지만, 나름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내가 최근 들어 가장 크게 깨닫고 있는 점 중 하나는 ‘인구와 낱말의 개수는 비례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표현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지기 마련이고, 또 그러다 보면 자연히 세상은 조금 더 복잡해진다. 그리고 당연히 언어의 세상도 이에 비례해 복잡해지고, 변화한다. 따라서 만약 시시각각 변화하는 온 세상의 모습을 들여다 보고 싶을 때가 오면 말의 그릇 안을 들여다 보면 된다. 언어를 보면 세계의 흐름을 가장 잘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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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요즈음의 세상을 표현하는 말들이 담긴 그릇 안을 들여다 보고 이렇게 말하곤 한다. ‘언어의 물이 흐려지고, 이끼가 끼어가고 있다’고. 꽤나 우려 섞인 지적이다. 실제로 근래의 우리에게는 많은 말들이 생겨났고, 이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이 우리의 손에 쥐어지거나 입으로 불려지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어디서부터 생겨났는지 알 수 없지만 언어의 바다에 물밀듯이 흘러 들어온 새로운 말들이 있는가 하면, 수도 없는 그 낱말들의 물결에 떠밀려 이제는 더 이상 잘 쓰여지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마치 생명을 다한 무인도 백사장의 난파선과 같은 사어(死語)들도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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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말들이 서로 구분되는 경계가 점점 옅어지고 있기도 하다. 대중 매체 속에서 쓰여지는 말들을 찬찬히 받아 나열해 보면 이러한 현상은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과거, 공적인 영역 속에서는 ‘낯선 언어’라는 이름의 주머니 속에 담겨 좀처럼 쓰이지 않았을 새로운 말들이 이제는 방송이나 대중 매체의 영역에서까지 낯설지 않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부정적인 의미의 은어이거나 비속어로 쓰이던 낱말들이 변형되어 새로운 낱말을 이룬 것 또는 언뜻 봐서는 그 생성 과정을 도통 알 수 없는 말들이 대중 매체 속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를 통해 누군가는 ‘아재’로 규정되며 언어의 흐름에 도태된 것에 대한 일종의 굴레를 쓰게 되기도 한다. 따라서, ‘말에 이끼가 끼어가고 있다’는 혹자들의 지적은 요즈음의 언어 생활 양상에 대한 당연한 우려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과거의 시각에서는 일상적인 영역에서만 통용되었어야 할 언어들이 공공연히 ‘언어 규범’의 경계 안에 놓여있는 대중 매체의 영역 안으로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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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언어의 바다에는 결코 이끼가 끼고 있지도, 그 물이 흐려지고 있지도 않다. 단지 그러한 세상을 그릇 안에 담아냈을 뿐이다. 오늘이 어제가 되고, 수많은 어제가 모여 과거의 조각으로 남는 일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섭리이듯이 모두의 지금을 거울처럼 비추어 가장 ‘오늘스러운’ 말들로 말의 꾸러미들을 채우는 것도 언어 문화의 아주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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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이러한 언어의 흐름에 적지 않은 이들이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하고 그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이 수많은 ‘오늘’의 낱말들이 그리 넉넉하지만은 않은 우리의 오늘을 그대로 담고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 말의 그릇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그 안에는 어딘가 부정적이고, 희망보다는 절망의 색깔이 짙고, 맑기보다는 흐리며 우리 모두를 일컫는 것보다는 각자 개인을 일컫는 낱말들이 가득 담겨져 있다. 그리고 이 낱말들은 한편으로 시대가 점점 더 외로워지고, 삭막해지고 있어서, 그래서 우리가 점점 각자의 칸막이 속으로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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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가장 ‘오늘스러운’ 말들 몇 가지를 한 번 꺼내어 볼까. ‘헬조선’, ‘프로혼술러’, ‘싫어증’, ‘관태기’, ‘인구론’, ‘사이다’…… 우리는 취업의 문턱에서 허덕이고, 억지로 애써 유지해야 하는 인간관계와 회사생활에 싫증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 이러한 우리 사회의 현실에는 ‘지옥’이라는 말이 마치 수식어처럼 붙어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이 낱말들은 가감 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정글 같은 오늘날의 세계와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는 결국 스스로 외로워지는 것을 하나의 ‘도피’로 선택해 버린 지 오래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가진 오늘의 낱말 꾸러미 속을 보다 희망적이고, 맑고, 긍정적인 말들로 채워 지금은 마치 이끼가 끼고 색이 바랜듯이 보이는 오늘날의 언어를 다시 푸른색의 물결로 바꾸기 위해서는 다 함께 스스로의 칸막이 속에서 나와 자신을 숨기지 않는 것에서부터 또 다른 변화를 시작하면 된다. 물론 당장 우리의 오늘이 급변해 모든 관계와 일상이 지옥보다는 천국에 가까워지는 삶의 풍경을 맞이하는 일은 결코 없겠지만 말이다.

 과연 내일의 우리가 들여다 볼 말의 그릇 안에는 어떤 색깔의 새롭고 수많은 낱말들이 또 가득 채워져 있을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어는 지금까지 흐려지거나 썩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나는 내일 우리가 살아갈 삶이 조금은 덜 외롭고 덜 삭막해졌으면 좋겠다. 조금 더 나아질 우리의 세상의 풍경이 곧 언어 문화 속에 투명하게 담겨져, 환하고 맑은 느낌의 새로운 낱말들이 곧 언어의 바다 속으로 기분 좋게 밀려들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인사이트, zum, 연합뉴스, 이슈데일리)


[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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