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공.감.대] 감각08. 뒷모습이 머금은 것들

글 입력 2017.09.1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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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머금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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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친구가 찍어준 내 모습


  친구에게 받은 사진이 있다. 내 뒷모습이다. 연인의 눈에 비친 사랑스럽거나 그럴싸한 뒷모습이 아닌 진짜 내 뒷모습. 버스에서 막 내려 휘적휘적 발을 뻗어 앞으로 나아가는 어딘가 모르게 씩씩해보이고 엉성해보이는 모양. 연출된 거 하나 없이 비율도 엉망인 이 사진이 이상하게 나는 계속 애정이 가서 한동안 메신저 프로필 사진으로 지정해 놓곤 했다. 뒤통수와 등, 그리고 떠나가는 다리를, 내 자신을 언제 그렇게 들여다 본 적이 있었던가? 사실, 앞모습만큼이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드넓은 구석자리'인데, 주인의 시야에 잡히는 경우가 드물다는 이유로 자주 소외되곤 했던 부분이다. 반짝이는 눈빛이나 매혹적인 입술, 당당한 자세만큼이나 존재감이 있는 것이 사람의 '뒤'이지 않은가? 사랑하는 사람의 뒷모습 혹은 피하고 싶은 사람의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쿵쾅거리는데.

  생각해보면 영화가 결말을 그려내는 가장 흔한 방식도 주인공의 뒷모습을 무심하게 혹은 끈질기게 담아내는 것이다. 백 마디 대사보다,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표정보다 중요한 건 '그 너머의 것'을 보여주고 '그 이상의 것'을 상상하게 하는 효과들이다. 그런 쪽이 실제로 '진짜 이야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인상적인 뒷모습'을 남기는 일이 작품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일 수밖에 없다. 일단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한번 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에 스토리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을 말하기는 어렵지만 강렬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면, 결말 부분 주인공 조제의 뒷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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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나고 다시 홀로 남은 조제가 이전보다 훨씬 굳건한 모습으로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혼자였을 때 늘 그랬듯 자신에겐 너무 높은 주방 의자에서 쿵, 하고 유쾌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모습. 그것들이다. 사람의 뒷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인생이 좀 더 '의연하게, 성숙하게' 변화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내겐 주인공들의 그 어떤 처연한 대사나 사연들보다 아무 소리도 없는 뒷모습이 더 뭉클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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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화 <라라랜드>, (아래) 영화 <아무르>


  매력적인 OST와 기가 막힌 엔딩 연출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라라랜드> 역시 그렇다. 아름다운 환상이 막이 내리고 영원함은 없다는 것을 다시금 제대로 확인하게 되는 순간에 남녀 주인공은 굳이 눈을 마주쳐 침묵 속에서 뜨거운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다시 씩씩하게 뒤돌아서 각자 가던 길을 가고 하던 연주를 마저 하며 깔끔하게 헤어진다. 서로의 등 너머로 사라질 옛 연인에게 애틋하긴 해도 그 이상은 없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춘 것이다. 고맙고, 미안하고, 반가웠어, 여전히 멋지네, 안녕, 따위의 말은 필요 없다. 노부부의 여생과 사랑을 담은 영화 <아무르>도 먹먹하고 아름다운 결말처리 덕분에 여운이 길었던 작품 중 하나다. 우두커니 넋을 놓은 남편 조르주 앞에 아내 안느의 환영이 나타나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설거지를 하고 그에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건다. 조르주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외투를 걸치라는 아내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문을 열고, 다정하게 함께 나선다. 이게 전부다. 문 밖으로 나서는 뒷모습들. 여기에 이 부부가 나눈 전 생애에 걸친 사랑과 이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넌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앞장을 선다
저 길 모퉁이를 돌기 전에 싱긋 뒤돌아보겠지

가뿐 숨 삼키며 그 뒷모습 바라보다가
문득 이 평화를 잃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해 본다

언제라도 너를 편히 보낼 수 있게
그때 내가 행여 나를 놓치지 않게

너와 걷는 거리, 느린 하루의 시작
오늘 같은 내일, 그건 더없는 행복

너와 걷는 거리, 너와 함께한 날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한 번 더 눈에 담는다

너를 눈에 담는다
너를 눈에 담는다 


  뒷모습에 관한 내가 가장 애정하는 노래를 소개하고 싶다. 제목은 <산책>. 양희은이 "뜻밖의 만남" 시리즈에서 이상순과 함께 작업한 곡이다. 곡 자체의 분위기만으로도 좋지만 가사만 음미해도 충분한, 아니,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깊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 것 같다. '나'와 '너'의 관계가 젊은 연인인지, 부모와 자식인지, 노부부인지, 신과 인간인지, 주인과 반려동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누구의 이야기라 해도 '너'의 뒷모습을 향한 '나'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은 거의 '영원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깊고 뜨겁다. 잔잔한 선율과 함께 따뜻한 일상을 가르고 가는 '너'. 그 감사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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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


  친구로부터 받은 사진을 계기로, 내가 내 작은 뒷모습에 뭔지 모를 감명을 받고나서부터 거리에서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다. 뒤돌아선 발끝에서 이어지는 그림자나, 핸드폰을 보느라 웅크린 어깨의 모습, 우산을 들고 바쁜 걸음으로 멀어지는 남자, 버스에 올라타는 여자, 엄마 옷깃을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아이의 짧은 다리, 뒷짐을 지고 가는 아빠, 그런 아빠의 팔짱을 낀 엄마, 땅을 보고 걸어가는 학생,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 창에 비쳐 공간의 희미한 빛들과 어우러진 내 연인의 뒷모습. '뒤'를 발견하고 나니 매순간 속에서 내가 눈 담아야 할 광경들이 배로 늘어났다. 본능적으로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뒤태가 아니어도 사람의 뒷모습은 때로 진정어린 표정만큼이나 무방비한 모습으로 자기 모습을 나타낸다. 아주 사소하고 고요한 순간에 깜박, 빛난다. 뒷모습이 머금은 것들이란.

  이렇게 또 내겐 미지의 영역이 늘어났다. 이렇게 또 내겐 전부의 영역이 넓어졌다. 이렇게 또 내겐 현상되지 않을 사진들이 생겨난다. 나만 알고, 그래서 나만 몰라 애끓는 사랑을 또 앓아야 한다. 앞모습과 뒷모습이 감싸고 있는 지금 이곳의 여러 실체와 허상들 사이로 걸으면서 함께 견디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들을 반복해야한다. 쉽진 않지만 어렵지도 않다. 내게서 중요한 것들은 항상 그런 애매한 것들이었다. 뭐, 그러다보면 언젠가, 문득의 순간에, 나의 뒷모습도 누군가의 공기와 시야를 가득 채우는 계절 같은 것이 되어 살다 사라지는 날도 있겠지. 그런 영광도 열심히 나를 찾아오는 중이겠지.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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