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알코올이 사람을 만든다, < 행복한 세계 술맛 기행 >

Alcohol maketh man
글 입력 2017.07.2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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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실 때, 알코올의 작용은 입에만 집중되는 것이 아니다.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감각이 확연히 느껴진다. 온몸에서 희미한 취기가 느껴질 때는 살아 있다는 것이 그다지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꽤나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아니, 아니다. 살아있다는 것이 즐겁다. 아니, 그게 아니라......
술을 마시면 낮에 있었던 기분 나쁜 문제들도 모두 용해된다.
알코올은 인간을 만들어준다.
술과 맛있는 안주가 인격을 육성해준다.

-p.255



   이 책의 에필로그의 끝자락. 무슨 느낌인지 와닿기 때문인지, 너무나 공감하기 때문인지 잠깐 멈춰서 다시 읽어본 부분이었다. 지난 프리뷰에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술의 단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돋는 술의 모습을 강조했었다. 나쁜 존재를 단지 매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오랜 기간 좋아하긴 힘들다. 작가 니시카와 오사무는 술의 부정할 수 없는 장점을 글의 끝에서 다시 읊어준 것이다. 술만큼 합법적이고 전통적이고, 보편적이면서도 개성넘치는 일탈이 있을까.

   이랬다 저랬다 자아분열 같기도 한, 우유부단한 것 같기도 한, 저 말이 생각보다 참 공감됐다. 술잔 앞에 앉으면 살아 있는 것이 즐겁기도 괴롭기도 하다. 온통 술내음이 만연한 이 책의 리뷰를 쓰는 지금도 나는 즐겁기도 하고 괴롭다. 다 썼다고 생각했던 글에 화룡점정 사진만 찍으면 되던 찰나에 안타깝게도 글이 날아가버리고 만 것이다. 다른 의미로 술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술이다. 새 술은 가볍게 새롭게 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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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따라 술을 마시면 의아할 때가 있다. 작가는 아주 어릴 적부터 술을 마셨다고 했으니 어쩌면 익숙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겐 술은 그 전까지는 왠지 뇌세포를 더 파괴시킬 것 같은 매혹적인 금기같은 것이었다. 고작 몇 년만에 가끔은 몸인지 마음인지 술을 찾는게 신기하다. 그리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직장인의 고충을 안주삼아 술을 마시게 된 것 역시. 그렇게 한바탕 시원하게 이야기하면서 밤이 지나면 다음 날엔 마치 꿈을 꾼 것 같다. 허망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고 몽롱하기도 하다. 어제의 술 자리는 정말 있었을까, 내가 지금 눈을 뜬 이 아침은 진짜일까. 쉽게 잠들고 싶지 않은 날 술은 잠을 부르는 역할을 한다. 잠이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잊을 것들과 기억할 것들을 조심스레 정리하듯 술도 그런 역할을 한다. 전날 터진 봇물처럼 쏟아지던 우리의 수많은 독백과 대화, 속상함과 기분나쁜 일은 술이 목을 타고 넘어가면서 씻겨내려간다. 알딸딸하니 세상은 보다 아름다워보이고 동시에 허공에서 곤두박질치듯 서글프고 고통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새롭게 우리를 일으킨다. 문제는 그대로 해결되지 않았더라도 망각이 축복인 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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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담백하고 간결하다. 이 책이 술에서 시작해 술로 끝나듯, 비유하자면 청하나 사케같은 책이다. 작가가 일본 분이라서 사케를 고른 건 아니다. 소주랑은 좀 느낌이 달라서. 어느 날 번개모임으로 가서 도란도란 부드럽게 넘어가던 사케 잔을 비우며 이야기를 하던 그 느낌과 비슷해서 그렇다. 술 이야기보다 술이 남긴 여행의 흔적, 로망의 실현이 강하다. 술을 마시며 만났던 사람들, 상황이 더 많아서 가끔은 '응? 그래서 그 술이 어떻다는거지?' 이런 느낌이 들면서 벌써 한 챕터가 끝나있기도 했다.  술맛 기행이라면서 왜 술 이야기는 생각보다 중점적으로 담지 않았느냐 하면 간단히 말하면 술을 머리로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몸으로 마시자는 생각때문이다. 와인의 라벨을 보며, 각각 술의 기원을 따져보며 머리로 배우며 마시는 술도 좋지만, 직접 맛보면서 술을 느끼고 기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동의한다. 더군다나 그가 머리로 술을 마셨다면 그의 '행복한' 술맛 기행은 없었을 터. 패기롭게 서부영화의 멋진 주인공들처럼 따라하느라고 버번위스키를 안주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퍼마시다가 꽐라가 되었다는 그의 모습이 상상만으로도 재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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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별 뜻 없이 쓴 말 같은데 어느 문장은 멈칫하며 다시 읽어본 순간이 있었다. 우선은 가장 기대했던 대로 우리나라의 술, 막걸리와 소주를 소개한 부분. 생각보다 아쉬웠다. 그의 글이 아쉽다기 보다는 더 다양한 술이 있는데 접해보지 못한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이다. 막걸리만 해도 서울 남대문에서 접할 수 있는 막걸리 이외에 지역마다 각각 맛이 다른 막걸리가 많다. 소주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는 꼭 좋다고 볼 순 없지만 누구나 생각보다 쉽게 제조(?)할 수 있는 다양한 폭탄주도 있고, 오미자나 매실 등 풍미가 좋은 과실주도 소개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친구네 집에서 오미자 엑기스에 소주를 마셨던 그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한 사람으로서, 혹여 만약 작가 분과 한국의 술을 소개한다면 시작은 오미자주로 건네드리고 싶다. 그리고 소줏잔이라면 자고로 술잔의 아랫잔을 부딪혀 나는 영롱한 소리로 귀가 즐겁게 마셔야 하지 않았겠나!

 신기하게도 그는 한국에서 술맛 기행을 이어가고 있을 때 우연찮게 생일이었고 생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한국인의 마인드가 반영된 것마냥 미역국을 맛보게 되었다.  우연이라고 할 수 없지만 유창한 오사카 사투리로 일본어를 구사하는 할머니를 만나 가게 주인인 그 분과 대화를 하고 안주를 나누며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할머니는 젊은 날 큰 전쟁들 사이에서 일본에 건너가 공부도 했던 분이었고 작가는 자주 유창한 일본어를 하시는 한국의 노인을 만났던지 과거에 억지로 일본어를 배웠던 우리나라의 역사를 안타까워했다. 역설적이게도 그 안타까운 과거가 그의 여행에는 좀 더 포근하고 친밀한 기억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것이 없다. 현재의 그에게 기억에 남을 생일과, 기억에 남는 저녁을 만들어 주었다면 현재 우리나라의 역사엔 아쉬움이 덜 하다.

  불편한 점도 있었다. 그는 막걸리편에선 '술은 항상 젊은 여성과 마셔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고 했다. 대체로 담백한 그의 문장을 생각해보면 불필요한 사족이 아니었나 싶다. 젊은 사람과 마셔서 젊은 기운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술에 젊은 여성과 나이든 여성 사이에 부등호가 필요할까? 그저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고 해도 충분했지 않았을까 싶다. 소주편에서는 그의 생일이라고 해서 주변사람들이 더 좋은 곳으로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에 그는 '장소를 바꾸는 것은 좋지만 여자가 있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했다. 이 점은 불편하다기보단 궁금하다. 한국에서 '더 좋은 곳'으로 가자고 할 때 그는 여자가 있는 곳으로 자주 초대를 받아 불편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분명 거북하고 불쾌한 기억일 수도 있다. 어떤 맥락의 말인지 궁금한 부분이었다.

  책의 추천사를 쓴 작가 우메다 미카는 '아시아편은 약간 비위가 상하는 내용도 있지만 유럽편-미국편을 읽다 보면 술을 마시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충동이 느껴진다'고 했다. 확실히 니시카와 오사무가 여행한 아시아 지역 중에서는 술에 작은 벌레가 있기도 했었고, 또 같이 먹는 음식 중에 부화하기 4일 전의 오리알도 있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산낙지도 약간 징그럽게 느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징그럽다기보다는 워낙 열성적으로 달라붙는 다리를 보고 벙쪄있던 순간도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현지인처럼 직접 체험하면서 얻는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편이었다. 술을 하도 마셔서 코끝이 빨개지고 체취도 와인향으로 바뀌었던 때가 있을만큼. 비위도 강한 편인 것 같다. 스웨덴에서 온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심한 통조림 수르스트뢰밍도 의외로 잘 먹어서 현지인들이 놀랐으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유독 나는 그런 것들이 호기심이 더 갔다. 아시아편은 비위가 상할 수도 있지만 호기심 면에선 단연 유럽편-미국편보다 돋보이는 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전혀 술과 상관없는 뜬금없는 부분이다. 바쁠 망(忙). 밀라노에 있을 때 그는 바쁜 사람이 부러웠으나 전혀 바쁘지 않았다고 했다. 마음(心)을 잃어버린다(亡)해서 만들어진 바쁠 망. 젊은 시절은 마음을 잃어버릴 정도로 바쁜 것이 좋다고도 했다. 그 한자를 보는 순간 나는 다른 망인 잊을 망(忘)이 떠올랐다. 마음을 잃어버린다 혹은 죽는다고 하는 바쁠 망(忙)자는 내 기준에서 해석해보자면 적어도 마음이 잃어버린 것 바로 옆에 있다. 동등한 높이에서 있으니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조금 삐그덕거리더라도 아직은 균형을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망(忘)은 다르다. 이제는 잃어버린 것들, 사라진 것들이 마음을 뒤덮고 마음보다 위에 있다. 균형을 깨져버리고 우리는 작게는 사소한 물건을, 크게는 소중한 이나 나 자신을 잊을 수도 있다. 바쁜 것과 잊는 것은 사실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아직 기운도 열정도 포부도 넘치는 젊을 때 마음을 잃을 정도로 뭔가에 몰두하며 바쁘게 지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는 젊은 날 바쁘지 않았던 그를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왜일까. 지금 젊은 날을 보내는 이들은 일부러라도 바쁜 일상을 벗어나 인생은 한번뿐이고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며 바쁘지 않게 여유를 찾아나서기도 한다. 아마도 그건 어차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늘 바쁘기 때문일 것이다. 바쁨에 제동을 걸어줄 장치가 마땅치 않다. 바쁜 것에 익숙해지면, 더 과해지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만다. 작가는 아마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바쁜 것은 어쩌면 이렇게 하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가 했던 말처럼. 바쁘게 살아간다는 건 고통스럽다. 아니다, 바쁘게 살아간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아니,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꽂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 <술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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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나는 나의 인생에 술을 아마도 여러번, 자주 사주게 될 것이고 인생이 나에게 술을 사주는 일은 많이 없을 것이다. 상한 기분을 풀 수 있도록, 잊을 건 잊을 수 있도록, 늘 여유롭게 술을 만끽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음과 일상 속의 균형을 잡느라 한 평생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알코올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 영화 < 킹스맨 >의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Manners maketh man)이란 말만큼이나 짧고 굵고 깊은 말이다. 사실 술(alcoholic drink/beverage)이 사람을 만든다고 해야겠지만, 차치하는 것으로. 알코올이 없어도 멋진 사람도 너무나 많지만 이 책의 문구 덕분에 새로운 좌우명이 생겼다. 오피셜은 아니고 그냥 개인소장할 좌우명. 나는 알코올이 만들어주는 멋진 사람, 멋진 술상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저 사람 진국이다 싶은 시원하고 뜨끈한 국물같은 사람, 언제 만나도 늘 기분좋은 술같은 사람. 나는 어떤 술이 되어있을까.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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