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대화가 이끌어낸 침묵보다 더한 단절, 연극 붉은 매미

글 입력 2017.07.17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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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가 이끌어낸
침묵보다 더한 단절
연극 붉은 매미


극단 죽죽_붉은 매미 포스터.jpg
 


소외시키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비명


나는 국어국문과에 재학 중이고 학보사 기자를 하고 있다.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보다는 ‘언어’에는 익숙하고, 또 능통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어 중심’을 내세운 붉은 매미를 보러 갈 때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수많은 언어에 둘러싸여 사는 사람이니, 연극 공간에서의 그 2시간여쯤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리고 이 생각이 착각이란 걸 깨닫기까지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극은 총 4개로 구성돼 있었는데, 사진작가-모델/ 가난한 아파트 주민-부유한 아파트 주민/ 동생-(가상의)누나/ 아내-남편이 각각 대립하고 이었다. 첫 번째로 사진작가와 모델이었다. 둘의 대화에서 파악할 수 있던 정황은 이 정도였다. 모델은 사진작가의 연락을 1주일 정도 피했다. 사진작가는 모델을 찾기 위해 모델의 집까지 찾아갔다. 둘은 모델이 연락을 피하기 전까진 어느 정도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연락을 피한 모델에게 무척이나 화가 나 있다.

이 정도의 정황을 담은 말을 빼고서 사진작가가 모델에게 뱉는 모든 말들은. 또 모델이 사진작가에게 뱉는 모든 말들은 그저 자기주장에 지나지 않았다. 사진작가는 모델에게 끊임없이 ‘왜’ 자신의 연락을 피했는지 묻는다. 그 ‘왜’에 모델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던가 혹은 ‘당신은 내게 무척이나 고마운 사람’이라는 뜬금없는 소리만을 늘어놓는다. 사진작가의 화는 극대화 되고, 급기야는 ‘당신이 일주일동안 폰만 봐 봤냐’는 비명을 지르기에 이른다. 왜 연락을 못했는지 이해시키고, 왜 연락을 못했을까 이해하기 보다는. 서로 왜 자신을 이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화풀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모델의 마지막 대사가 인상 깊다. “당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했던 건 회사였어요.” 그 말을 듣고 허망한 표정을 했던 사진작가도. 그 둘 사이에서 ‘회사가 시켰다’는 말이 주는 층위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 하나는 파악할 수 있었다. 사진작가에게 ‘답’을 주지 않으려 했던 모델의 태도는, 그 나름의 배려였다는 것 말이다.


붉은 매미 2.JPG


두 번째 막에서는 가난한 아파트의 주민과, 부유한 아파트의 주민이 등장한다. 여자의 아버지기도 한 가난한 아파트 주민은 부유한 아파트를 가로질러서 딸을 데리러 가려고 한다. 그 앞을 부유한 아파트의 주민이 막아선다. 처음에는 그래도 왜 자신이 이 길을 지나가야하는지, 그리고 왜 나는 당신을 막아서야하는지에 대해서 토의한다. 가난한 아파트의 주민은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어둡고 비효율적인지’에 대하여, 부유한 아파트의 주민은 ‘당신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피해를 봤는가’에 대하여 설파한다. 그러던 둘의 대화는 점차 서로를 비방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당신같은 인간들을 잘 안다’며 싸잡는 것은 물론, 단지 ‘소리를 지를 것’이라거나 ‘당신보다 높은 아는 사람이 있다’며 협박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이 대화는 가난한 아파트의 주민이 밖으로 나왔던, 애초에 부유한 아파트 주민과 대립하게 만들었던. 그 원인인 ‘딸’이 다친 채로 나타났을 때도 끝나지 않는다. 이미 대화의 목적은 상실됐고, 그저 ‘이기는’ 데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다. 온전한 타인이 딸을 걱정할 때도 이미 이기는데에만 혈안이 된 아버지는 딸을 걱정하지 않는다. 딸이 그 어둡고 먼데다 공사까지 하는 길을 돌아올까 걱정했던 그 아버지의 마음은 사라져 버린지 오래다.

세 번째 막은 아마도 모델이자, 딸의 동생인 남자의 독백으로 이뤄진다. 독백이라고 하지만 집을 떠난 누나에게 하는 말, 혹은 누나와 싸우는 것에 가깝다. 동생은 과거의 여러 기억 조각들을 근거로 누나를 ‘허영에 찬 존재’로 규정한다. 허영에 차 가족이고 뭐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말이다.

동생은 가족 사이에서의 부재감을 말하는데, ‘자신 또한 외롭지만 그래도 가족을 위해서’ 있다고 말한다. 가족의 존속을 위해서는 당연히 참았어야 할 것을 ‘자기만 생각하고 이기적인 누나’는 참지 않았다는 것이다. 동생은 평화로운 가족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희생은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서의 ‘개인’, 그 ‘누나’는 동생이 과거의 기억들로 끼워맞춘 허상에 불가하다. 동생의 독백은 말 그대로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누나를 이해하고 누나와 소통하는 데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생 나름대로, 자신의 상상 속 누나를 세워두고 ‘대화’를 하고 있지만 이는 결국 자신의 선입견을 강화해 더더욱 단절되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네 번째 막에서는 여자와, 여자를 데려간 아내와, 그의 남편, 그리고 한 청년이 등장한다. 클라이막스인만큼 가장 수많은 말이 오가면서, 또 가장 이해하기 힘든 막이다. 제시된 정황을 따져보자면 이렇다. 전날 여자와 아내, 청년은 한 호텔에서 노래를 틀고 춤을 추며 놀았다. 그 사실을 남편을 알고있고 그에 분노하고 있다. 남편은 아이를 원하고, 아내는 원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집에만 있는’ 아내의 힘듦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자와 청년, 아내는 어제 처음 만난 사이다.

이를 배경으로 아내와 남편은 계속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데, 알맹이를 짚기보다는 그 겉만을 맴돈다. ‘왜 아이를 낳기 싫냐’는 남편의 물음에 대한 아내의 답은, 남편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말 뿐이다. ‘어제 무엇을 했냐’는 물음에 대한 답도 마찬가지다. 대화는 끊임없이 빙빙 돌 뿐이다. 가끔 ‘여자’나 ‘청년’과도 대화를 나누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 폰을 보고 있는 둘의 존재는 아내와 남편의 대화에서 이질적이다.

아기의 이야기가 어젯밤의 이야기로, 어젯밤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관계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로. 무엇 하나도 답은 나오지 않은 채  빙빙도는 그 상황을 끊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제 3자인 청년이다. 남편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이 있고, ‘어젯밤’은 그와 관련됐다는 것. 1막에서 답을 하지 않던 모델의 행동이 사진작가에 대한 배려였듯, 4막에서 말을 빙빙 돌리기만 하던 아내의 행동도 일정 부분 남편이 대한 배려였다. 남편의 비밀이 밝혀진 충격의 순간. 여자는 화장실에서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고서는 나타난다. 그리고 막이 내린다.


붉은 매미 10.JPG


 
소외당하는 이들이 소외시켰던 관객


사실 1막부터 극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해, 3막에선 절정을 이뤘었다. 4막에선 얼른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연극은 정말 언어중심의 연극이었다. 무대장치는 최소화 됐고, 동선도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은 말, 말, 말. 언어로 이뤄졌다. 그런데 그 언어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언어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단지 표출하기 위한, 이기기 위한, 자신의 생각을 공고히 하기 위한. 해결점은 없이 끊임 없이 빙빙빙 돌기만 하는 언어들. 언어가 상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공중을 배회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상대에게 ‘전달’됐더라면 그 상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끝났을 텐데. 언어가 공중을 배회하니, 그 자리에 함께있던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각 막마다 정리되지 않은 언어들이 극장을 가득 채워, 그 무게에 힘겨웠다. 

1막, 2막처럼 상대가 딱 정해져 있지 않고. 독백, 혹은 3-4명의 대화로 이어지는 경우는 더 심했다. 누군가와 싸울 때, 점점 목적을 잃고 ‘이기기’위한 혹은 ‘지지않기’ 위한 싸움이 되어갈 때. 그때 느꼈던 지독한 피로감이 연극을 보면서도 밀려왔다. ‘자기’밖에 없는 대화들. ‘소통’을 위해서라고 여겨지는 ‘대화’가 ‘침묵’보다 더한 단절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피부로 와 닿았다.

그럼에도. 전보다 더더욱 단절되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대화하는 이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어쨌든 대화를 이어간다는 것은 끈을 놓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사실 정말 온전히 단절되고 싶었다면 침묵하면 된다. 하지만 대화를 했다는 것은 혼자라는 소외감, 부재감에 그거라도 놓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시도는 더한 단절로 이끌 뿐이다. 1막과 4막에서 보았던 ‘침묵’이란 배려는, 그나마 서로를 위하려던 그 시도는. 목적을 잃은 대화 속에 그 빛을 바랠 뿐이다. 서로를 배려하는 방식은 단지 침묵일 뿐이고, 각자 소외당한 고통을 말하면서도, 그 고통에 서로를 놓지 못하면서도, 소외감을 덜기위해 하는 대화로 더 소외당하고 있는 아이러니. 그 아이러니가 주는 고독감과 피로함을 정말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가 언어에 민감해서일까. 정말 지독하게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피로감이 너무 심한 나머지, 관객마저 그 극 속 타자들이 되어간다는 것이었다. 3막까지 갔을 때는 더 이상 인물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대화를 할수록 소외돼갔던 인물들처럼. 관객들도 극이 진행될수록 소외돼 갔다. 마치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은 채 빙빙 돌았던 대화처럼. 관객들에게 극을 이해할만한 정보들은 충분히 주지 않은 채 배회하는 언어들은 관람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이기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대화처럼, 관객들로 하여금 그 자리를 ‘버텨내는 것’만이 목적이게 만든 것이다.

인물들의 대화를 보며 과연 나는 저런 언어를 사용한 적은 없었나, 이 무의미한 작업을 반복한 적은 없었나 돌아보게 됐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의미에도 불구하고 다시 볼 것이냐 물어보면 다시는 보지 않을 것 같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주체로 있어도 충분히 피로한 그 상황이. 완벽한 타자로서 개입할 수도 없게 진행되었을 때는 정말이지 버터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단절’을 말하며 관객들과도 ‘단절’되게 했던 것이 연출의도라면 의도랄 수 있겠지만, 글쎄. 2시간여 동안 소외돼 있었다는 불쾌감을 주는 극을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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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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