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신은 공부가 아닌 사람의 몫, < 공부의 배신 > [문학]

공부가 배신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세상이, 내가, 나를 배신했다
글 입력 2017.07.1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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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배신.jpg

 
  안도감과 안타까움이 함께 드는 요상야릇한 책이었다. 안도감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교육만 문제점이 유독 많아보였던 생각에 우리만 그런게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서 그렇다. 많은 이들이 부러워하는 아이비그의 대학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점이라고 하니 말이다. 고등학생 때에도, 대학교에 와서도 가끔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만약 내가 다른 나라의 교육을 받았다면 어땠을지 수능을 앞두고 망상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했었다. 안타까웠던 건 이 책이 잘 정리되고, 더 많은 팩트폭력이 넘치는 '대나무숲'같아서였다. 페이스북엔 각 학교마다 대나무숲이 하나씩 있다. 보다 보면 질문도 답도 얼추 이 책과 비슷하다. 이름 모를 고등학생도 공부의 의미나 대학의 진학을 고민하고, 새내기며 고학번이며, 취준생들의 사연이 가득하다. 생각보다 잦고, 생각보다 비슷하다. 생각보다 훨씬 대학생활은 우울하다. 많은 학생들은 한때 자신을 엘리트쯤으로 생각했다가 곤두박질친 열등감이며, 인간관계와 미래의 불확실함과 허망함에 사로잡힌 자신을 익명의 힘을 빌려 토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 내용과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하버드생의 바보는 못만나봐서 모르겠다고 치고. 공부가 배신한 건 아무것도 없다. 배신이란 믿음을 저버렸다는 얘기다. 그런데 애당초 공부라는 녀석, 존재, 그 분, 님이 호칭이 뭐건 그 이는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심어준 적이 없다. 공부가 어떤 인격체였던 적도, 전지적 시점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한 일도 없다. 책을 덮고 나니 우리가 공부라는 녀석에게 참 많은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믿음은 엄밀히 따지면 우리가 심어놓은 덫이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람이 공부에게 틀을 덧씌워 인생의 진리나 법칙처럼 신봉해온 것이다. 공부는 덕분에 아주 전지구적인 연예인이다. 사람으로 치면 뇌섹남/녀같은 지적인 두뇌에, 돈과 명예, 행복과 안락한 삶 등 좋다고 여겨지는 온갖 가치를 자랑처럼 몸에 치장하거나 튼튼한 몸매와 매력을 지닌 아주 전통적이고 보편적이며 신비로운 연예인인 것이다.

  책의 문제의식도 해답도 명확한 편이다. 많은 아이비리그 출신의 학생도, 심지어 저자 자신도 엘리트인 줄 알았으나 무비판적이며 현실과 타협하며, 주변의 시선에 휘둘려 자신이 원하는 것조차 잘 깨닫지 못한 헛똑똑이에 바보들이었다고. 궁극적으로는 해결방법도 크게 세가지이다. 소수 대학들만 경쟁적, 자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누리는 것들을 공적 교육에서 다수에게, 민주주의적 교육으로 확산해서 현재의 엘리트적 교육을 줄여야 한다는 것. 교수는 지나치게 연구 실적에만 치중하지 않고 강의와 학생과의 진솔한 소통에 좀 더 중점 혹은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타인의 기준이나 기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알고 그에 맞춰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이 책은 추천받은 책이라서 인상깊은 책이다. 추천한 이는 이 책의 내용에 공감하면서도 결론은 좀 뜬구름같고 과격하다고 하며 나에게 추천해주었다. 인상깊었던 이유는 그와 했던 대화 때문이었다. 우리는 뜻밖에도 민주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싫고 엘리트주의가 좋다는 솔직한 의견으로 의도치 않게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야 말았다. 물론 그것은 정치학적으로 유의미하며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민주주의도, 선거도 생각보다 바보같은 결정을 내리는 부작용이 많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엘리트주의 역시 각광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엘리트를 정하느냐고 물었고 그는 합리적인 기준이라고만 답했다. 어떤게 합리적인 기준일까? 이성으로 내린 판단이 매번 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없을 뿐더러, 인간 자체가 생각보다 합리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합리적인 기준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해달라고 했을 때 대화에선 정적이 흐르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스스로가 주장하는 엘리트주의에 분명 속하는 사람이었을까, 의문만 남았다.

  그와의 대화를 하면서 나는 책에 묘사한 바보 하버드생 말고 바보같았던 대학시절의 수업시간의 또다른 정적이 떠올랐다. 그 날은 엘리트주의에 대한 강의를 듣다가 엘리트주의를 반박해보라는 교수님의 말에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면 이대로 모두가 민주주의 대신 엘리트주의가 더 좋다고 생각하는거냐고 여러번 재촉을 하고서야 한 두명씩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엘리트주의의 논리가 그럴 듯한 구석도 있었지만 아마도 그 많은 이름모를 사람들 속에서 손을 들고 그럴싸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기도 했다. 말하는 것이 유독 두려운 때가 아니었나 싶다. 뭔가 모르면 바보같고,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도 수준이 탄로날까 두렵기도 했다. 때론 교수님들께서 질문의 내용을 듣고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나 반응이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한번 손들고 질문하나 하는게 그렇게 어려웠었다.

  그랬던 내가 그와의 대화에선, 지금 직장에선 자유롭게 더 질문도 걸어보고 내 의견을 얘기하고 있다. 전공 때문인지 많은 낯선 사람들은 어색한 사이임에도 나에게 정치인의 대변인이라도 되는 양 정치가 왜 쓸모없거나 나쁜게 아닌지 자주 질문을 던졌다. 편견처럼 직장에서도 (맥락 상 부정적인) 정치를 하지 않을거냐는 농담도 많이 들었다. 완벽한 대변인은 아니지만 그럴 땐 눈 앞에 바로 작은 화살촉이 겨눠진 상태라서 정말 내심 숨겨왔던 말을 답변했다. 평상시에는 이런저런 얘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데 유독 수업시간에만 꿀먹은 벙어리였다. 졸지 않으면 다행이었을까. 그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싶을 정도로.

  알고 있다. 그게 교육에 익숙해진 오랜 관성 중 하나라는 걸. 오랜 한국 교육에 열심히 적응해서인지 공부를 할 때 시험에 나올 것 같지 않은 궁금증이란 유의미하더라도 제쳐두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그런데 대학에 와선 갑자기 시험에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 수많은 비판적, 창의적 사고를 하라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이거야 말로 비효율의 끝판왕 아닌가. 대학교육 때 이럴거면 고등학교 때 일부러 열심히 질문과 호기심을 제낀 보람이 없었다. 얼마전까지도 질문하는 것은 어려웠으나 바로바로 맡겨진 일을 하려다 보니 조금 익숙해진 정도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모르니까 애당초 배우는 거고, 모르니까 질문하는 거고, 질문하면서 또 배우는 건데,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걸 조금 더 마음이 익숙해지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질문 하는게 익숙하지 않은 건 우리나라 학생의 특징적인 고민일지도 모른다. 직업을 선택하거나 어떤 삶을 살지는 어떤가. 책에 묘사된 미국의 명문대생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만 잘가면 인생이 잘 풀릴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제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취업선상에 오면 새삼 조금 깨닫는다. 대학이라는 게, 흔히 생각하는 명문대라는 게 아닌 대학들과 또다른 장벽을 만들어버린다는 걸.  직업과 삶의 문제는 애당초 명문대생이고 자시고, 그냥 모든 젊은이라면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이다. 책에서는 자신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좋아하는 것, 그런 열정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나서야 뒤늦게 찾게 된다고 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고민은 중년에 마주하면 정말 벙찌고야 만다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종종 맛집을 찾고, 드라마를 보고, 여행을 다니고, 커리어를 쌓고 보면 쌓아두고, 미뤄둔 숙제가 찾아오고야 마는 것이라고.

  다행스러운 것인지 나는 그 과정을 거의 평생 겪었고, 여전히 어려우며, 지금도 고민하고 있다. 기대, 꿈을 위해 드는 돈 등 수많은 장애물에 빙글빙글 돌아도 결국은 나는 다시 늘 제자리에 돌아오곤 한다. 나의 인생은 늘 쉬운 적은 없었다. 남들에게 쉬운 것은 늘 내게 어려웠고, 남들이 기피하고 싫어하는 것은 오히려 내가 잘 맞았다. 타협하더라도 재미있는 것, 좋아하는 것을 완전히 버렸다면 아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취업잘되는 과로 진학하라는 학원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을, 원하는 과를 지원하라던 고등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다행이라 여긴다. 그러나 앞으로의 모든 결정에도 나는 다행이었다고 뒤돌아 볼 수 있을까. 걱정스럽고 불안하다. 계속 마음의 소리, 못 먹어도 고라고 가기에 점점 머뭇거리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

  공부가 배신한 게 아니다. 국가와 사회가, 세상과 내가, 나를 배신했다. 대학 가면 살 빠져, 연애할 수 있어, 너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어 같은 거짓말의 연장선이며 더 큰 배신이다. 나는 공부가 배신하지 않는 존재라고 대변해 보련다. 나에겐 공부는 꽤 까칠하지만 괜찮은 친구였다. 비록 남들이 포장해놓은 것처럼 성공과 명예 같은 크고 반짝이는 것들을 주지 못할지언정, 그것은 내가 공부에게 기대하고 가까워진 이유는 아니었다. 대학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차피 대학을 잘 간다고 인생이 편해지는 건 아니라는 것. 다만 첫 시작점을 잘 끊어놓으면 상대적으로 편할 수 있다는 정도. 이전 세대에게 공부가 무소불위의 절대자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더더욱, 아니다. 공부에 대한 이미지는 만들어진 것이며 그 이미지로 많은 이들의 인생은 조종당했다. 나에게 공부는 한번도 호락호락한 적은 없었지만 아마 많지 않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였다. 내가 천천히 꾸준히 다가갈수록 가까워졌고, 물론 맞지 않는 과목과는 알아서 적당히 지내면 되는 일이었다. 친구들도 돈도 있다가도 없었고 때로는 욕을 하다가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탁을 해오며 바뀌었지만, 공부는 그냥 늘 그자리에 있었다. 물론 힘들고 거지같을 때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람은 배신을 해도, 공부는 배신을 할 친구는 아니다. 노력에 꼭 비례하지는 않았어도 먼저 날 떠나간 적은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머무는 사람도 판단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옛날에는 이름을 남기고 역사에 한 획 정도는 그어야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한 해씩 지나가면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았다. 아마도 나는 평생 사람들이 말하는 엘리트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스스로 엘리트라고 말할 일도 없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책을 읽다보니 내가 과거에 얼마나 이상적이었는지, 지금은 얼마나 현실적이게 되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새삼 나는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된 뒤로 무척이나 전전긍긍하고 살아왔다는 것도. 물론 나의 대학생활은 나의 생각보다 찬란하지도 않았고, 열등감과 미진함이 넘쳐났고, 경제적인 문제에서 아주 자유롭지도 못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 문제들은 따라다닐테니, 나는 잊고 있던 공부라는 녀석에게, 다시 한번 찾아가야겠다. 나를 떠나간 적 없었는데 내가 떠나버린 참 미안한 친구에게. 책의 의도는 이런 거였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공부의 배신이 아니라 믿음을 다시 발견해버렸다.

  물론 동의하는 점도 있다. 이제부턴 차라리 공부를 잘해도 인생이 잘 펴지는 게 아니라고, 다만 사회구조상 아직은 그런 경향이 많은 편이라고 솔직하게 얘기해줬음 좋겠다. 공부를 신봉해서 넘치게 기대했다가 실망하지 말라고. 그냥 아무생각도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해서 여러 사람 늦은 고민에 빠뜨리지 않도록. 경제적 지위가 제2의 신분같은 사회에서,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같이 좋은 공부를 할 수 있게 최대한의 지원을 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우리도, 하버드생 바보들도 진짜 '바보'였던 적은 없다. 바보처럼 사는 상황에  익숙해진 것 뿐이다.

 책을 추천해준 이가 여전히 인상깊다. 나는 이 책에서 결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좀 더 디테일했으면 좋겠지만 충분하다고 본다. 과하거나 두루뭉술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떨까. 익숙한듯이 공부를 찾아가면 아마도 슬쩍 등짝을 후려맞지 않을까. 똑똑하지도 못한 자식이 고민만 많다고.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고. 왔냐, 오랜만이네, 하고 여전하게 맞아주려나.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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