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먼저인가 사과가 먼저인가

이기호, 「사과는 잘해요」
글 입력 2017.06.22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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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술자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소설은 흥미롭다. 이런 화자는 독자로 하여금 의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따라가도록 한다. 그리고 이야기를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소설 속 서술자인 '나'가 제정신인지 독자인 내가 제정신인지 헷갈리는 순간이 온다. 이기호의 <사과는 잘해요>의 서술자는 시설의 기둥들 중 하나인 정신병자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상식에선 죄를 짓고 사과를 하는게 순서인 것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죄가 먼저인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의 '나'와 그의 친구 기봉에게는 그 순서가 정해져있지 않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사과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죄를 짓는 일이 더 빈번하다.
   죄를 하나 더 지으시라고요. 새로운 걸로. ...그래야 사과도 할 수 있으니깐요.1) 소설에 등장하는 시설에 있는 사람들, 정육점 아저씨, 뿔테 안경 남자는 사과를 죄보다 앞에 두는 다소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의 희생자들이다. 즉, 사과를 위해 억지로 죄를 만드는 것에 대한 희생자들이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나 또한 희생자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왠지 '나'나 시봉에게 세상을 대신해서 사과를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나의 죄는 마지막에 시연을 업고 '나'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라고 정했다. '나'의 심정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독자로서의 죄를 만들어 사과 전문가인 시설의 기둥들인 그들에게 사과를 의뢰하러 갈 것 같다.
   그런 건 없었어요. 모든 건 다 사과 때문이에요.2) 혼란스러웠다. 죄가 먼저인가 사과가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내가 제정신인가 서술자 '나'가 제정신인가. 이런 혼란이 가중될 때 신문과 뉴스에는 사과를 할 줄 모르는 이들이 보도되고 있다. 환하게 웃으며 집으로 귀가하는 고개 숙일 줄 모르는 한 여성의 모습도 텔레비전에 나온다.
   가장 폭력적인 일은 구타나 욕설이 아니라 죄를 강요하는 일이다. 또는 사과를 강요하는 일이다. 누군가가 강요하기 이전에 죄나 사과는 스스로의 진실된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 소설 속에서도 진실된 사과나 죄는 눈을 부비며 한참을 찾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시봉이 '나'에게  건낸 언젠가 자기에게 사과할 일이 있으면 너가 대신하라는 말. 겨우 찾아낸 이 진심도 비겁한 '나'의 행동에 의해 외면되었다.
   죄는 많고도 많으니까요. 사과도 계속되는 거지요.3) 여기서 이 글의 제목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과'는' 잘해요. '는'이라는 보조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다른 건 다 못해도, 죄를 꺠닫지 못해도 사과만 잘한다는 뉘앙스를 이 책의 제목에서 느낀다. 비겁하게 면죄부를 사는 일이나 죄를 인지하지 못한채 벌금으로 때우려는 못된 심보와 같은 느낌의 제목이다. 사과'는' 잘해요.
   아마도 누군가는 계속 사과만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과조차 하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는 끝없이 죄를 뉘우칠 것이다. 죄를 짓고 사과를 한다고 또는 사과를 하고 죄를 짓는다고 그 둘이 상쇄되거나 그 모든 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이 분명하다. 수많은 죄와 수많은 사과가 소용돌이치는 지금 그 소용돌이 안에 있는 모든 이는 어지럼증을 느낀다. 우리도 시설의 기둥들이 먹는 알약을 먹고 있지 않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 같다.

11) 이기호, 「사과는 잘해요」,현대문학,149쪽
22) 위의 책, 175쪽
33) 위의 책, 95쪽

[윤맑은이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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