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시인의사회'&'굿 윌 헌팅'

다하지 않은 청춘
글 입력 2017.06.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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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지 않은 청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통해-

<목차>

1) 서론
2) 본론
- 열다섯 이후의 내 삶과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주인공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그리고 ‘굿 윌 헌팅’의 숀 VS 램보
3) 결론

<서론>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마음 한 구석에 평생 자리 잡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한 평생 살다가 죽을 때, 한 명의 진정한 스승과 열 명의 진정한 친구, 그리고 백 권의 좋은 책을 기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성공한 삶을 산 것이다.’ 라고 고 장영희 교수는 말한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그리고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고등학교 4년, 이렇게 13년간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선생님들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많은 선생님들 중 과연 나는 몇 명의 선생님을 내 기억 속에 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미래에 교사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스승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선생은 있지만 스승은 없다.’라는 말이 언제부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인간의 근본적 가치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 같다. 유아기 때부터 성인이 될 때 까지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지금까지 받아온 이 교육이 어떤 의미가 되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에 두 편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굿 윌 헌팅’을 감상하며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이 두 예술 작품 속에서 찾아보고 ‘교육’에 대해 나의 견해를 서술하고자 한다.

<본론>
- 열다섯 이후의 내 삶과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주인공들

 ‘죽은 시인의 사회’ 영화를 보면서 학창 시절의 내 모습과 웰튼 학교에 재학하는 영화 속 주인공들 사이에서 많은 교집합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모습은 2009년부터 현재까지의 내 모습과 오버랩 된다. 캐나다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 또래 친구들보다 1년 늦게, 15살이라는 나이로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 때는 스스로의 가치관이라는 것도 없이 그저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고, 영화 속 주인공 닐이 그랬듯이 부모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삶을 살아갔다.
 그렇게 중학교에서의 3년이 흘렀고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게 되었다. 고등학교 역시 부모님께서 원하시는 특수 목적 고등학교인 외국어 고등학교를 지원했고 합격했다. 사실 그 때의 내 모습은, 키팅 선생님을 만나기 전 웰튼 학교 학생들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고등학교 1학년 1학기, 미술 수업을 들으면서 미술 선생님을 만난 후로는 여태껏 내가 헛된 삶을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외고에서 예체능 수업은 학생들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선생님들 역시 수업 시수만 채우려고 들어오셔서 자습을 주고 나가신다. 하지만 미술 시간은 달랐다. 선생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무언가 시도해보려고 하셨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언, 수, 외, 탐만 공부하던 내가 미술이라는 과목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고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부라는 것을 몇 년 동안 해오면서도 단 한 번도 희열을 느끼지 못했지만 미술과 관련된 공부를 할 때만큼은 조금 과장된 표현일 수 도 있겠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함을 느꼈다. 바로 이 때 즐거운 공부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업 시간 중간에 자습 시간이 있을 때 마다 모의고사를 푸는 대신, 미술실을 찾아가 미술 선생님과 작품을 그리고, 만드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성적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부모님께서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처음으로 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겼고 미술을 원하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님께 불만이 쌓여갔다. 내가 즐겁고 사랑하는 것은 미술인데 왜 내가 흥미 없는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 시간이 흐를수록 우정보다는 성적만이 중시되는 학교라는 그 체제 안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며 내가 버터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겪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친한 친구 닐의 죽음을 진정성을 배제한 채 표면적으로만 애도하는 웰튼 학교의 부조리함을 느끼고 찰리가 자퇴했듯이 나 역시 내가 속해 있는 체제에 거부감을 느끼고 10월, 고등학교를 자퇴했다. 자퇴하기 까지 수 없이 많은 고민을 했었다. 닐이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희생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아버지의 아들’로서 사는 것을 처음에 당연시 여겼듯이, 나 또한 부모님께 하나뿐인 딸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로라도 실망시켜 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닐이 키팅의 수업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를 깨달았듯이 나 또한 미술 선생님과의 수업을 통해 내 미래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고 현실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스스로를 더 돌아볼 수 있고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술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면서 닐에게 키팅이 그랬듯이 기존의 방식이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스스로를 생각하며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찾도록 도와주셨다.
  사실 자퇴를 하면 그 비인간적인 체제를 벗어나 내가 꿈꾸는 세상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 가혹했다. 자퇴생이라는 주변의 시선을 견딜 정도로 난 정신력이 단단한 사람이 아니었고, 내 꿈을 믿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엔 미술 입시를 하고 있는 다른 친구들보다 너무 늦게 준비한 탓에 허탈함만이 나를 채웠다. 내가 선택한 길이지만 정해진 틀 밖으로 나온 내 자신이 원망스러워졌고, 결국 난 내가 버리고 도망쳐 나온 그 시스템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러한 내 모습은 영화 속 카메론과 비슷하다고 여겨졌다. 카메론은 영화 후반부, 닐의 죽음 이후 교장 선생님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며 친구들에게 “이 학교에는 명예의 규칙이라는 게 있어, 알아? 선생님이 물어보면, 사실대로 말해야 해, 안 그럼 퇴학당해. 그들(교장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우릴 벌하는 게 아냐. 우린 희생자야. 닐, 그리고 우리 모두.”라고 말한다. 하지만 같은 ‘죽은 시인의 사회’ 멤버였던 카메론의 이러한 발언을 통해 그를 배신자로 취급하기 보다는 그를 이렇게 행동하게 만든 사회 구조의 모순을 탓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그리고 ‘굿 윌 헌팅’의 숀 VS 램보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로 이어지는 도시.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은 한 가지 

네가 거기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편의 시가 된다는 것.

 키팅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휘트먼이 쓴 위의 시를 수업 시간에 인용한다. 부모님 그리고 학교의 기대에 맞춰 틀에 짜인 삶을 강요당하는 학생들에게 시를 규칙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키팅은 그들에게 시를 통해 삶에 대해 이야기해주고 싶어 하는 교사다. 첫 수업부터 “카르페디엠. 너의 인생을 특별하게 만들어라. 우리는 반드시 죽기 때문에 인생을 독특하게 살아야 한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oh captain, my captain!’으로 부르게 한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닐의 죽음에 대해 닐의 부모와 학교는 키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학생들에게도 압력을 넣어 키팅을 닐의 자살 사건의 공모자로 지명하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키팅이 학교를 떠나게 되고 짐을 챙기기 위해 잠시 교실에 들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에 학생들이 하나 둘 책상에 올라가 키팅 선생님을 향해 ‘캡틴! 오 마이 캡틴!’을 외치면서, 그에게 자신의 진정한 마음을 보여준다. 교장선생님의 호통과 위협에도 상당수의 학생들이 자신의 존경하는 선생님을 위해 책상 위로 올라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특히 홉킨스는 키팅의 수업시간에 항상 의지 없음을 표했지만 마지막에는 그 역시 책상 위로 올라가는 태도를 취하면서 키팅으로 인해 변화된 모습을 보이며 긴 여운을 남긴다.
  웰튼 학교는 학생들을 억압하는 배경인 동시에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 학교에 키팅이 새로운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첫 수업부터 키팅은 수업에 필요 없는 책의 서문을 찢어버리라고 말하면서 아이들을 당혹시킨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기며 특별한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수업을 시작으로 그 후에도 계속해서 학생들 개개인 내면의 개성과 숨겨진 부분을 발굴하고 일깨워 나갔다. 그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시키기 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되찾게 도움을 줬던 것이다. 이러한 키팅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교육’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여태껏 우리가 받아 왔던 교육은 정해져 있는 체제 안에서 커리큘럼에 맞춰 학생들 개개인의 개성이 짓밟힌 채, 스스로를 그 프레임 속에 끼워맞추고 끌려다니고 쫓게 만든 것에 불과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즉, 표면적으로는 학생 개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런 것들을 강요한다고 하지만 정작 학생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다. 이것이 바로 요즘 우리 교육의 현실이고 영화 속 웰튼 학교의 현실이다.
 카메론은 키팅의 수업을 처음 받고 친구들과 나오는 길에 “이것도 시험에 나오려나?”라는 질문을 한다. 카메론의 이 대사는 슬프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육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교는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지식을 배워나가며 인격을 성숙시키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우는 곳이 되어야 하는데 왜 시험에 무엇이 나오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중점이 되어버렸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는 세계 명문 학교인 MIT 공대의 수학 교수인 램보와, 그의 친구이자 경쟁 관계에 놓인 심리학 교수 숀 맥과이어가 등장한다. 둘은 교수라는 같은 직책에 있음에도 극과 극의 가치관으로 학생들을 대한다. 램보 교수는 삶의 밑바닥에서 살고 있었지만 노벨상을 탄 교수들조차 풀기 힘든 수학 문제를 간단하게 푸는 천재 윌을 발견하고 그의 재능을 세상에 드러내려고 발 벗고 나선다. 하지만 윌은 여러 건의 전과 기록을 가진 문제아였고 이에 램보는 숀에게 정신과 치료를 부탁한다. 
 처음에 숀은 건방진 태도로 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윌에게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인간적인 한계를 보이지만, 그가 자신의 유년 시절과 동일한 상처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그의 상처를 치유시키기 위해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윌이 고아이고 양부에게 학대를 받은 어린 시절로 인해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왔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진실 되게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숀 자신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숀은 윌에게 그의 잘못된 점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서 그의 잘못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고 현재 상황, 즉 그가 고아이고 아직 어리며, 현실을 기피하려고 하는 모습 등을 분명히 인식하게 해준다.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것들, 자신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어두운 그늘, 즉 치부로 다가갈 수 있도록 말한다. “너 자신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해야 돼.” 숀은 그가 말하도록 강제로 끌지 않는다. “네가 선택해.”라고 치료 지속 여부에 대한 선택권도 주고 윌이 그 다음 날 그의 사무실에 들어와서 묵언 시위를 할 때에도 그는 재촉하지 않았다. 입을 열었지만 쓸데없는 말을 할 뿐일 때도 그는 다만 묵묵히 긍정해주면서, 동시에 잘못된 점은 꼬집어 주면서 윌의 마음이 열리기만을 기다려준다. 반면에 램보 교수는 이 모습을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그는 숀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 있는 학생이 사회에 나가 빨리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참교육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재능을 발굴해낸 자신의 명예를 세상에 빛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윌이 램보가 추천해준 회사 면접에 친구를 보내 면접을 그르치고, 램보 교수 자신이 명예에 손상을 입고 나서 윌에게 했던 행동이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윌에게 그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감사를 바라고 그가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음을 주의시키며 다시는 그러지 못할 것을 당부한다. 윌은 점점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에만 관심이 있는 램보를 부담스럽게 여기고, 자신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숀과 함께 있기를 바란다. 숀은 그 동안 윌이 말하기 전까지 일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며, 소소한 일상에 관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 해준다. 그러면서 점점 더 친밀함과 믿음과 신뢰를 쌓아나간다. 그는 전과 목록이 빽빽이 적힌 서류를 봤음에도 섣불리 윌을 판단하지 않고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찾아서 그를 치유해줌으로 사람에 대한 신뢰감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윌은 영화 후반부에 숀이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오열하면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이 말은 윌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고 있던 미움과 증오, 그리고 사회에 대해 쌓여있던 불신을 한 순간에 녹여 버리는 말이었으며,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윌은 숀을 인간 대 인간으로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게 된다.

<결론>

 ‘죽은 시인의 사회’ 그리고 ‘굿 윌 헌팅’, 이 두 편의 영화를 감상 한 후, ‘선생(先生)’이라는 단어는 뜻 그대로 학생들 보다 인생을 먼저 살아 온 사람으로서 삶을 통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즉, 학생들의 마음을 온전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며 그것이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내가 후에 교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그들의 눈높이에서 내 삶을 통한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학생들은 교사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살면서 그것을 자신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는지, 학생들을 믿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학생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도와주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다.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숀 교수는 “의사에게 믿음이 있어야만 환자가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학생들이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가고 인간적인 관계 안에서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내 삶을 통해 그들이 보고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교사상이다.
 과연 진정한 자아라는 건 무엇이며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키팅의 가르침으로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은 학생도 있었던 반면에 학교 질서에 저항해 퇴학당하기도 하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엔 죽음이라는 벽에 부딪히는 안타까운 상황도 보인다. 하지만 세상에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용기와 어느 정도의 위험 부담이 필요하며, 잃을 것을 두려워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국엔 아무 것도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개인에게는 어느 정도의 기대감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기대감이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또는 그 밖의 어디로부터 오든지 살아가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 기대감에 대해 부응할 수 있느냐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며, 사회에서 만들어 놓은 틀, 즉 부와 명성이 결정되기도 한다. 이러한 장애물들에 맞서 진정으로 자신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가치 있는 일이다. 내 경우에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의 기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학교의 기대, 스스로 해내길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에 맞췄다. 그러다보니 해야 할 것은 알아도 정작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잘 몰랐다. 하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것을 이 영화를 통해 느꼈다. 기대와 의무보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뿐인 나의 삶, 하루하루를 잡아내며 특별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완성시키는 일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무언가를 잘 해내고 얻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이제는 그것이 내게 즐거울 수 있으면 충분하다. 어떤 일이든 내게 긍정적인 경험이 되어 줄 것이고, 내가 삶을 자신감 있게 살 수 있는 근거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을 정직하고 용기 있게 대한다면 모든 것이 나를 성장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어른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이미 겪으면서 좋고 나쁜 것을 알기 때문에 자녀 세대의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않게끔 도와주면서 충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그것은 내가 스스로 경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른, 그 자신에게 과거에 좋았다고 해서 나에게도 똑같이 좋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에게 크나큰 패배감을 느끼게 했다고 해서 내가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다. 완벽하게 이 둘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일반화 시킨다는 것은 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침은, ‘내가 해보니깐 이렇더라.’처럼 행동을 명령하고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가 자신만의 경험을 통해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벼운 조언을 해줄 수는 있지만 결국에 판단하고 책임지는 것은 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넘겨야 하는 부분임을 강조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사고하고 성장해 가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얻으려면 그것에 참여하는 자신의 ‘책임감’도 수반되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었다. 앞으로 역시 곡선을 그리면서 나아갈지 아니면 직선을 그으며 나갈지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움은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살아있고, 존재한다. 내 인생의 화려한 연극은 계속된다. 그리고 나는 한 편의 시를 만들어 갈 것이다. 휘트먼의 시처럼 답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있을 테니까.


[이수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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