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투쟁의 계절 [문화전반]

여름이 오고 있다
글 입력 2017.06.03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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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라디오에서 윤종신의 '팥빙수'를 몇 번이나 들은 것 같다. 생각해보니 어느새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서 따뜻한 음료보다 차가운 음료가 더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어두는 시간이 늘어나고 화창하다고만 느껴지던 한낮의 외출이 조금 괴로워졌다. 여름이다. 여름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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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계절들과 마찬가지로 여름 역시 '여름'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 몇 개가 있다. 하얗게 부서지는 시원한 파도라든가, 모래사장에서 수영복을 입은 늘씬한 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상쾌하게 웃고 있는 것과 같은. 이 글을 쓰기 위해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summer'을 검색했을 때도 주로 그런 이미지들이 많이 나왔다. 여름이라 하면 청량하고 싱그러운 느낌을 많이 떠올리는 것 같다. 하지만 여름 내내 에어컨 바람 속에 앉아 바깥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는 속편한 사람이 아닌 이상 여름을 청량하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8월 초, 낮 1시의 땡볕 거리를 걸어본 기억을 떠올려 보자. 너무 강렬한 햇빛에 눈이 부시고 땀방울은 등 뒤에서 흘러내린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힌다. 사람들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걸어다니며 매미는 귀청이 떨어지게 울어댄다. 비라도 한 번 온다 싶으면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기 마련이고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도 흔하다. 이런 여름날의 어느 순간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무언가 정체 불명의 존재와 싸우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멋대로 여름을 '투쟁의 계절'이라고 이름붙여 봤다. 여름이야말로 보는 것과 겪는 것의 괴리가 가장 큰 계절이다. 실제의 여름은 감상하는 계절보다는 직접 겪어내는 계절에 가깝고 더 나아가서는 투쟁하는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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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누구와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가.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짝짓기를 해야 하는 곤충들은 죽어라 짝을 찾기 위해 울어대고 풀들은 흙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리를 비집고 자라난다. 가을에 열매를 맺기 위해 나무와 각종 작물들은 기를 쓰고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받아들인다. 이들의 투쟁에는 삶이 걸려있기 때문에 치열하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사람들은 더위와 냄새, 해충, 또는 자신만의 적과 싸우며 여름을 난다. 다른 생명체들과 맥락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싸움도 다 먹고'살기'위한 것이니 삶이 걸려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여름에는 모든 것들이 맹렬하게 포효하는 사자처럼 자신의 존재를 사방에 알리려 한다. 그 움직임은 끈질기고 악착같다. 여름이 생명력이 넘치는 계절이라는 말은 곧 모든 생명체들이 자신의 삶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시기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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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두가 각자의 투쟁으로 바쁜 여름은 그래서 오히려 고독한 계절일지도 모른다. 비약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던 촛불집회에 겨울이라는 계절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추위 역시 더위 못지 않게 사람을 힘들게 하지만 뭉치면 뭉칠수록 추위는 가시기 때문이다. 더위는 오히려 반대이다. 불쾌지수가 높아짐에 따라 짜증도 늘어난다. 그래서 여름에는 여기 저기서 서로 도울 수 없는 각자의 외로운 싸움이 벌어진다. 여름을 흔히 청춘에 비유하곤 하는데 겉보기에는 활력이 넘치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모두가 힘들고 고독한 자신만의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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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한 중간에 서서 모든 생명들이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걸 보면 때로 세상이 너무 치열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밤이 되어도 식지 않는 더위에 몸을 뒤척이다 보면 가을까지 가는 길목은 아득하고 더위는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여름은 더워야 한다. 치열해야 한다. 온 몸으로 이 계절을 겪어낸 사람만이, 또 자신의 삶에 정면으로 부딪쳐 투쟁하는 사람만이 제대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이든 삶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다음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이 한 번쯤은 반드시 필요하다. 

  올 여름도 길고 더울거라는 예보가 있다. 벌써부터 최고 온도가 27도, 28도를 찍는 날씨를 보면 다가오는 계절이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흐르고 가을이 올 것이다. 여름을 에어컨 바람 속에서 바라보기만 한 사람이 과연 가을의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까? 가을은 온몸으로 여름을 겪어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부디 이번 여름을 잘 나고 성숙한 모습으로 풍요로운 가을을 맞을 수 있기를, 여름의 초입에서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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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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