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7일 간의 여정, '제 7일' [문학]

글 입력 2017.05.2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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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그 뒤에는 어떻게 될까? 어렸을 적에, 어쩌면 지금도 한 번씩 상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집안은 불교를 믿는 집안이라 그런지 어렸을 때 할머니로부터 윤회사상에 대해 일찍 배웠었다. 지은 업에 따라 또 다시 태어난다는 그런 내용을 듣고 다음 생에는 뭐로 태어나지, 라는 순수한 상상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다시 태어나면 전에 갖고 있었던 기억은 모두 잃는다는 건데 소중했던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쉽게 떼어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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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화 소설 ‘제 7일’ 에 나오는 양페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나보다. 빈의관으로부터 화장을 하러 오라는 전화를 받은 양페이는 빈의관에서 번호표를 받고 딱딱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지만, 이내 자신에게 매우 소중했던 인연들을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표면적인 이유는 자신의 묘지가 없어서, 자신의 장례를 치러줄 사람이 없어서였지만 내면적으로는 아마 아무 말 없이 사라졌던 자신의 아버지, 사랑했지만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이혼한 아내 그리고 진짜 엄마 같았던 리웨전 아주머니를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거라 짐작한다.

 삶과 죽음의 모호한 그 곳에는 안개가 짙다. 어느 하나 분명한 것이 없으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기억은 점차 흐려지나 기억의 끝을 잡고 끊임없이 살았을 적을 생각한다. 양페이는 벤치에 앉아있다 자신의 전 아내였던 리칭을 다시 만난다. 비리 및 횡령의 죄로 몰려 자살한 리칭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양페이었음을 고백한다. 똑똑하고 일도 잘하는 그러나 부자 집에 시집가기는 싫었던 리칭은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다른 남자들과 달랐던 양페이를 사랑하게 된다. 둘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냈지만 결국 리칭의 큰 야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떠날 때 양페이에게 “난 여전히 당신을 사랑해” 라고 얘기하지만 양페이는 “난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라고 답한다. 리칭을 잡지 못한 양페이가 미련하게 보였으나 잡지 못했던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순 있었다. 부와 명예만이 중요시 되는 세상에서 사랑과 연민, 정은 모두 인정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죽은 뒤에도 함께 다시 할 줄 알았던 리칭은 곧 자신의 친구들이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줄 것이라 늦지 않게 가야한다며 길을 떠난다. 이는 아무도 자신의 장례를 챙겨주지 못하는 양페이의 상황과 대비되며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좁혀지지 않은 계층 간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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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페이는 리칭을 보내고 난 뒤 자신의 태어났을 적부터의 역사를 보게 된다. 기차에서 황당하게 태어나 기찻길에 떨어진 아이, 양페이 그리고 21살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양페이를 키운 역에서 일한 양페이의 아버지. 아버지는 양페이를 끔찍이 사랑했고 양페이 또한 자신의 진짜 부모를 찾은 뒤에도 아버지를 진짜 아버지라 생각한다. 이 부자의 관계는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음에도 너무나 끈끈했다. 그러나 너무 끈끈한 탓일까. 아버지는 암에 걸린 이후에도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홀로 길을 떠나고 이러한 마음을 알지 못한 양페이는 백방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늦었지만 그러나 서로의 진심을 알기엔 절대로 늦지 않은 죽음 뒤의 삶에서 이 둘은 결국 만나게 된다. 아버지는 뼈만 남은 앙상한 얼굴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양페이가 너무 일찍 왔다고 한탄하지만 양페이는 아버지를 다시 찾을 수 있어 안심이 된다.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었을 때 드는 아픈 심정 그리고 아버지가 실종되어 마음이 탔던 그 심정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양페이는 아버지를 찾는 도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돈 있는 사람들은 곧바로 화장되지만 묘지가 없는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는데 양페이는 이 곳에서 처음에 아버지를 찾고자 했다. 이들은 자신이 언제 그 곳에 온지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각자 하나씩 안타까운 사연을 갖고 있다. 묘지가 없어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았지만 이들은 나이도, 외모도, 성별도 알아볼 수 없는 형체로 차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구를 찾고 있어요? 한 사람인가요, 여러 사람인가요?”
“한 사람이요. 제 아버지인데
아마 여기 계실 거예요.” 내가 대답했다.
“아버지?”
“성함이 양진뱌오예요.”
“여기서 이름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예순이 넘으셨고.......”
“여기서는 나이를 알아볼 수 없답니다.”
(중략)
“키가 170쯤 되고 무척 말랐는데.......”
“여기 사람들은 전부 무척 말랐지요.”

(pg. 192-193)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이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너무나 억울하고 처절하다. 그리고 실제 중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이라 더 충격이었다. 돈이 없어서 아이만 낳고 도망친 부모들로 인해 27 명의 영아들이 강물에 버려진 사건 (병원측은 버려진 영아들을 ‘의료 폐기’로 칭해 비판을 받았다.), 가짜 아이폰을 남자친구로부터 선물 받아 자살한 여자 사건, 사람들이 건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을 강제 철거한 사건, 백화점 화재 사건이 일어났으나 부상자와 사망자 수를 속인 사건, 억울하게 누명 씌어 처형당한 사건, 신장 장기 매매로 죽은 사건 등등 돈이 있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들이 너무나 많았다.

 양페이는 수많은 죽음들을 보고 사회의 양극화된 이슈들을 듣고 목격한다. ‘엄마’처럼 대해주었던 아줌마조차 27명의 영아들의 시신을 거두었지만 결국 뺑소니 사고로 죽음에 이르고, 27명의 영아들의 시신과 함께 영안실에 있다 싱크홀이 생기면서 시신도 실종된다. 싱크홀의 원인은 산업화의 급전개로 일어난 것이었고 병원은 그들의 시신을 찾아주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시신을 화장하여 가족들에게 건네준다. 이로 인해 리웨전 아줌마는 갈 곳 없이 그 곳에서 27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아간다. 선의를 행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결말로 끝난 리웨전 아줌마.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 라는 말이 무색하게 아줌마는 끝내 안식을 찾지 못하고 만다.

 이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양페이가 죽은 사건이었다. 양페이는 한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주방에서 폭발음이 터지며 화재가 발생했다. 3년간 적자를 냈었던 식당이었기에 식당 주인은 문을 가로 막고 손님들한테 돈을 내야지만 나갈 수 있다고 윽박지른다. 생명의 일각을 다루는 이 중요한 시간에 손님들을 막고 돈을 받아내려는 그 주인의 생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 뒤에 만나서 미안하다고 양페이에게 말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가 그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아니면 자본주의로 인해 생긴 불신이, 불공평함이 그를 벼랑의 끝으로 몰은 것일까? 원인이 무엇이 되었든 결과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제 7일, 마지막 날에는 양페이가 아버지를 만나 두 손 꽉 잡고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에게 자신이 있었던 곳, 가난도 없고 부유함도 없는,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고, 원수도 없고 원망도 없는 평등한 곳을 안내한다. ‘죽었지만 매장되지 못한 자들의 땅,’ 씁쓸하지만 차라리 이런 유토피아적 세상이라면 끝까지 살아도 나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땅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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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에도 많았다. 어렸을 적 봤던 EBS 짧은 드라마에 어떤 한 여학생이 뺑소니사고로 죽은 것도 모르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던 에피소드도 있었고 드라마 49일, 웹툰 ‘신과 함께’, '죽음에 관하여'도 있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위태위태하게 걷고 있는 이들을 보자니 죽음 뒤에는 왠지 영원한 불멸의 삶이 있을 것만 같다. 작품 속 양페이는 화장을 해서 안식을 취하거나 아니면 영원히 사는 길 밖에 없다라고 말하는데 화장은 돈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했을 때 영원히 살면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의 아픔을 그려낸 것 같다.

 며칠 전 위화가 한국에 찾아왔었다. 작가님이 “活着就是为了活本身而活", 즉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는 그 자체를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즉 죽지 못해 살아간다는 뜻도 갖고 있다. 이러한 작가님의 생각은 작가님 작품에 전반적으로 깔려 있다. '인생'이라고 번역되었으나 사실 중국어로는 살아가는 것 '活着' 라고 쓰인 작품에는 격동적인 중국 역사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주인공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변 사람들은 다 죽는다)의 이야기가 있고 '허삼관 매혈기'에서도 생명의 연줄인 피를 팔지만 그래도 살아가는 허삼관 가족의 이야기, 그리고 '제 7일'에서는 죽었으나 끊임없이 살아야 하는 양페이의 모습이 그려졌다.

 비록 '제 7일'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평가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죽음과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는 되었으며 현재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죽은 뒤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해야 양극화를 멈출 수 있고 불공평한 일들이 생기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지, 죽지 못해 살아가는 우리들이 그래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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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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