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산문일까 시일까, 개천은 용의 홈타운 [시]

산문과 시, 그 사이의 경계
글 입력 2017.04.30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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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천은 용의 홈타운>은 최정례 시인이 2014년에 여섯 번째로 출간한 시집이다. 제 8회 오장환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으로, 최 시인만의 새롭고 모험적인 산문시를 볼 수 있다. 그녀는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나들기로 유명한데, 다양한 삶의 실재와 의문들을 활달한 상상력과 치밀하게 짜여진 이야기 구조 속에서 새롭게 담아낸다.

 이 시집을 읽으며 내가 주로 생각했던 것은 시와 산문의 경계이다. 그녀의 시를 평가한 다수의 비평가들 역시 마찬가지로 언급하곤 했던 것이다. 과연 산문이 시가 될 수 있을까? 산문은 어떻게 시의 탈을 쓸까? 시는 산문의 외피를 입고 어떻게 시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경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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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관점으로 산문시에 접근했을 때는 그저 행갈이 없이 문장을 이어붙인 단락에 충실한 시일 것이며, 반대로 산문의 관점으로 접근한다면 산문의 틀 안에서 시적 요소들을 뽐낸 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산문시의 속성에 대해 문학평론가 조재룡은 이렇게 정리했다.
 
“산문(prose)은 ‘prosa’를 어원으로 한다. 똑바로 앞을 보고 나간다는 말이다. … 산문시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와 동의어로 여겨진 운문(vers)는 ‘versus’를 어원으로 삼는다. 지속적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이다. 그럼, 산문시는? 직진하는 산문에서 어딘가로 되돌아오는 시의 속성을 담보해낸 경우, 더욱이 그 되돌아옴이 운문의 규칙성이 아니라, 산문의 전진을 멈추게 하거나 직행하는 그 속도와 곧고 바른 산문의 품에서 독특한 회전의 고리를 만들어낸다면 산문과 시를 이분시키는 망령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개천은 용의 홈타운』을 읽으면서 그 경계를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 시를 읽다 들었던 생각은, 이게 산문인지 시인지 잘 구별이 안 간다는 것이었다. 언어 구사나 모호한 표현력, 추상적 관념들은 다른 시들과 별반 다름이 없어 보였는데, 유독 그녀의 시에서는 길이가 산문만큼 길어서 시의 형식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던 것도 있었고, 시보다는 오히려 산문의 형식과 느낌에 가깝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시를 처음부터 쭉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것이 있었다. 글이 직진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어떤 장치가 작품의 서두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적혀있는 시인의 말에서, 왜 산문시라는 장르를 사용하여 그녀의 마음을 풀어내는지 알 수 있었다.


… 와중에 꾸려가고 있는 생각들도 자꾸 변형되면서 이게 시냐, 산문 아니야? 묻는다. 쓴다는게 뭔가? 흩어져 있다가 꿈틀거리고 결합하기도 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것, 나가지 못하게 하고 꼼짝없이 나를 붙들어놓는 것, … 이것들이 대체 뭔가.
 -시인의 말 中


 최정례 시인은 시작에서 끝으로, 끝에서 다시 시작, 그것으로의 반복을 통해 그녀의 산문시만이 가진 매력을 보였다. 이렇게 그녀는 되돌아오는 장치를 고안하여 흩어지는 산만함을 한 곳에 결속시키려는 산문시를 선보였고, 그 결속을 위해서는 어떠한 알레고리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도 캐치해낼 수 있었다.

 이렇게 글을 읽다보면 어찌어찌해서 내용의 끝부분까지 갔다가, 결국 앞서 읽었던 지점으로 어쩔 수 없이 되돌아갈 수밖에 없게 만든다. 되돌아 가야하는 지점이 그렇다고 여운만을 남기며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원점으로 다시 돌아가 읽는 회귀의 운동이 독서의 전반을 제어한다. 시를 처음부터 쭉 읽다보면 공통적으로 느껴지던 것이 있었다. 글이 직진하지 못하게끔 방해하는 어떤 장치가 작품의 서두에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녀 고유의 어법으로 자리 잡으면서, 독자는 이와 같은 순간을 반복적으로 맛보고 나면 ‘산문시’에 대한 그녀의 독특한 발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뛰어난 기법이었다. 무의식중에 앞과 연결시키려 애쓰는 나의 모습을 통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시 속에 일상을 담다 보니 시가 산문화 된다’라는 문제점에 대해 최정례 시인은 “내 산문시와 그냥 산문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덧붙여, 결론을 대놓고 말하지 않고 주변을 건드린다고 한다. 일종의 돌려 말하기다. 그러기 위해 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단어들을 갖다 붙이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그녀의 작품들 중에 『레바논 감정』 이라는 시집이 있다. ‘레바논’이라는 중동의 나라 이름에 ‘감정’이라는 단어를 이어 붙여 낯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냈다고 한다.



나의 감상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 

 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

  신촌에 있는 장례식장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햇빛 너무 강렬해 싫다. 버스 한 대 놓치고, 그 다음 버스 안 온다, 안 오네, 안 오네…… 세상이 날 홀대해도 용서하고 공평무사한 맘으로 대하자, 내가 왜 이런 생각을? 문득 제 말에 울컥, 자기연민? 세상이 언제 너를 홀대했니? 그냥 네 길을 가,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도 무사하지도 않아, 뭔가를 바라지 마, 개떡에 개떡을 얹어주더라도 개떡은 원래 개떡끼리 끈적여야 하니까 넘겨버려, 그래? 그것 때문이었어? 다행히 썬글라스가 울컥을 가려준다 히히.
 
  참새, 쥐, 모기, 벼룩 이런 것들은 4대 해악이라고 다 없애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단다. 그래서 참새를 몽땅 잡아들이기로 했다지? 수 억 마리의 참새를 잡아 좋아하고 잔치했더니, 다음해 온 세상의 해충이 창궐하여 다시 그들의 세상이 되었다고 하지 않니,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어, 영원히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린다 해도 넌 벌컥 화를 낼 자격은 없어. 그래도 개천은 용의 홈타운, 그건 그래도 괜찮은 꿈 아니었니?

- <개천은 용의 홈타운>, p.38


 최정례 시인은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소재들을 시 한 편에 담으면서 독자로 하여금 경험해본 적 없는 공감을 이끌어내게 했다. 지리멸렬해 고통스러운 삶과 일상은 그녀가 즐겨 사용하는 시 소재였다. 언제라도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함정 같은 일상, 그 속에서 시인은 탈출을 꿈꾸거나 자주 신세 한탄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면 왜 시인은 유독 ‘일상’을 고집하는 것일까. 그녀는 “일상성이 힘이 세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의 언어는 관념적이기 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래야 강렬하다는 얘기다.
그렇기 때문에 함축적인 언어보단 산문처럼 길게, 천천히, 보다 많은 단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공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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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문과 시의 경계를 논하기 이전에, 때로는 진지한 성찰로 몇몇의 시들은 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말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도 있었다. 시라는 매개 속에서, 글이라는 수단을 통해 작가와 유대감을 느껴보긴 처음이었다.

 나는 시집 한권을 읽으면서 많은 노력을 해보았다. 단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해가며, 그녀의 일상과 나의 일상을 비교해가며, 시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써봤다. 물론 시 하나하나를 해석하거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기에는 힘들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알 수 없는 몰입에 이끌려 나의 공감을 끌어냈던 시들이었다.
 그것이 내가 최정례 시인의 시집을 고른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녀는 “어렵거나 지겹지 않아 젊은이들도 좋아하는 시를 쓰고 싶다”라고 했는데,
산문으로 풀어쓴 감정들이었기 때문에 함축적인 말들보다 더 따뜻하게 다가왔지 싶다.
나는 시인의 후속작이 나올 때 까지 몇 번이고 이 시집을 곱씹고, 간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지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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