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대 현혹되지 마라 : 텍스트의 배반② [문학]

글 입력 2017.03.27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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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셨나요? 여러분이 예상하던 내용이었나요?

이 소설의 가장 특이한 점은,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한 어떤 친절한 설명도 없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모든 행동이 수사적인 표현이나 정서적인 어휘도 없이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서술되어, 독자의 궁금증을 해소하기는커녕 머리를 “왜?”라는 질문으로 가득 차게 만들죠.

이 장에서는 <법 앞에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한 명의 독자로서, 저의 독서 과정을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각자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함께 생각해 주세요.

이제 어느 부분에서 “왜?”라는 브레이크가 걸렸는지, 따라가 보실까요?



1. 제목 – 왜 <법 앞에서>인가?

 아시다시피 이 소설의 제목은 <법 앞에서> 입니다.

“법”이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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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법”의 개념은 국가 또는 사회가 강제하는 규범이 아닐까요? 
나아가 <법 앞에서>라는 이름에서는, 가장 가까운, “들어갈” 수 있고, “앞”이라는 전치사가 붙을 수 있는 명사인 “법원”이 떠오릅니다. 시골 남자가 법원에 들어가 법의 힘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가 ‘법은 모든 사람에게 접근이 용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명제와 연관 지어 볼 수도 있죠.

 그러나 소설은 정작 “법”의 개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남자가 왜 법의 도움을 얻고자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법”이라는 명사, 시골 남자, 문지기의 관계를 상징적인 것으로 여기고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이라는 말의 어감이 무언가 응당 그래야 하는 것, 당연시 되어왔던 정형화된 규칙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법 앞에서>에서는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문지기는 “나중에”는 법에 입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고 하며, 시골 남자가 죽을 때까지 그 “나중”은 오지 않고, 소설은 당연히 법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시골 남자가 죽을 때까지 법에 들어가지 못한 채로 끝납니다. 

 제목은 소설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죠. 겉모습에 기반한 첫 인상과 내면이 완전히 상반되는 사람을 봤을 때처럼, 저는 이러한 요소들에서 모순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텍스트에 대해 기대했던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는 텍스트의 배반 현상은 제목에서부터 시작됩니다.



2. 이질적인 텍스트 - 왜 이런 내용을 넣었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을 거쳤다면, 분명 ‘이 내용은 왜 나오는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한 부분이 한 개쯤 있지 않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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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가지만 꼽자면, 저에겐 모피코트를 입은 문지기를 묘사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소설 전체에서 인물이나 사물에 대한 어떤 자세한 설명이나 묘사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비해, ‘타타르인의 수염’과 같은 표현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죠. 문지기의 모피 옷에 붙은 벼룩이라는 단어도 같은 맥락에서 의아했습니다. 그만큼 시골 남자가 간절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체 텍스트의 딱딱하고 불친절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섬세하면서도 뜬금 없는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부분이라도 분명 맥락에 어울리지 않거나, 자신이 생각했던 해석 틀에 맞추기 어려웠던 내용이 있지 않았나요? 계속해서 눈길을 끌고, 생각하게 만드는 찝찝한 부분들 말입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부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런 불편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자신이 해석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선 내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텍스트를 자신이 생각했던 해석 틀에 완벽하게 맞추고 싶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방해하죠. 텍스트에 대한 나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어떤 특정한 해석으로 확정 짓지 못하도록 현혹시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법 앞에서>처럼, 몇 십 년 동안 활발하게 논의될 만큼 모호한 작품에서는 거의 모든 텍스트가 그 역할에 대한 잠재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죠.



3. 불확실함 – 왜 설명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 쓰인 문장은 대부분 간결하며, 감정에 대한 묘사 또한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골 남자와 문지기 모두 독자들이 그들에 대해 궁금해 할 법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무관심합니다. 문지기가 시골 남자에게 하는 질문들은 “지체 높은 사람들이 하듯 무관심한 것들”이고 그들의 대화는 항상 시골 남자의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끝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궁금한 질문들이 있는데, 이 소설의 인물들은 그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에게 들었던 많은 질문들 중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문지기는 왜 ‘지금은’ 안 되지만 ‘나중에는’ 입장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일까? 마지막 대답은 무슨 뜻일까? 시골 남자가 자신만을 위한 문에 평생 들어갈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문지기가 시골 남자가 왜 “지금은” 입장할 수 없는지 설명만 해 주었다면, 혹은 “나중에”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그는 납득하고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입장을 불허하고, 시골 남자도 왜 안 되냐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가 임종 직전에 생각해 낸 유일한 질문에 대한 문지기의 대답마저 여태의 상황과는 모순적으로 느껴지죠.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문에 평생 들어갈 수 없었다니. 이렇게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채로 소설은 끝납니다.

 이런 불확실성과 혼란 속에서, 독자인 제가 그나마 납득할 수 있었던 정보는 간간히 보이는 시골 남자의 생각들이었습니다. 물론 시골 남자도 완전히 납득이 되는 인물은 아니지만, 끝까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랐던 문지기와 달리 “시골 남자는 이러한 어려움을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 불행한 우연을 저주하며 처음 몇 년 동안은 분별없이 크게 소리를 지르다가 나중에 늙어서는 속으로 툴툴거린다” 등의 서술을 통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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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도 그와 비슷한 경험이나 생각을 했을 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불확실함 속에서 주어진 실낱 같은 나와의 유사성은 어둠을 헤쳐 나가는 등불 같은 역할을 합니다. 등불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시골남자의 입장에 서서 “나만을 위한 문이라며, 왜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거지?” 라는 질문까지 던지게 됩니다. 불확실함 속 공감이라는 감정이 더해져 그 혼란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사실 <법 앞에서>에 대한 흥미로운 토론거리들은 훨씬 더 많지만, 지루해지기 전에 정리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이 짧고 불친절한 소설에 끌리셨다면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는 각자 생각해 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제 나름대로의 해석은, 독서 이후 머릿속에 떠올랐던 가장 큰 질문과 밀접하게 연관됩니다.

어떠한 해석 틀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는 작품. 카프카는 <법 앞에서>를 왜 이렇게 모호하게 썼을까요? 마치 텍스트의 배반을 의도한 것처럼.

자신의 작품이 어떤 고정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하고, 방지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법은 모든 사람에게 접근이 용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골 남자는, 모든 텍스트를 자신의 생각대로 일관성 있게 해석하려고 하는 독자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끝까지 법에 입장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결말은 독자가 결국 작품의 모든 텍스트를 완전히 해석하지 못함을 암시하는 것이죠. 

저에게 문지기에 대한 묘사가 신경 쓰였던 이유는 제가 처음에 생각한 어떠한 해석 틀에도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완벽한 해석을 방해했기 때문이죠. 작품 속의 시골 남자 역시 문지기의 모피코트, 타타르인의 수염을 보고 겁을 먹으며, 문지기의 옷에 붙은 벼룩에게까지 말을 걸 정도로 문지기를 신경 쓰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시골 남자의 목표는 문지기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하는 것이죠. 작품의 어디에도 문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지기가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문은 항상 열려있다고 묘사되죠. 

즉 언뜻 보면 문지기를 통과해야 법으로 입장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길을 잃게 만드는 원인은 ‘입장’이라는 목표로 가는 길에 위치한 문지기인 것입니다. 내용 자체보다 해석에 집착하는 독자, 문보다 문지기에 집착하게 된 시골 남자. “응당 그래야 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문지기라는 요소에 현혹된다는 점에서도 독자와 시골남자는 유사합니다.

모든 사람은 법에 접근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불확실함과 맞서는 시골 남자, 불확실함 속에서 함께 입장에 대한 기대를 품는 독자.

여러분도 책을 읽으면서 시골 남자가 된 것 같았나요? 

이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짧은 텍스트를 읽는 과정에서, “이해한다”는 현상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그 현상을 자신의 프레임에 따라 자르는 과정입니다. 결국 어떤 것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은 자신의 프레임, 즉 이해 범위밖에 있는 것을 잘라냈다는 뜻도 되겠죠. 위 2번에서 언급했던 이질적인 텍스트들은 제 프레임 밖에 있었기 때문에 왜 나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저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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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라는 것은 때로는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혀 주기도 하지만, 이처럼 본질적인 면에서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양면성을 지닙니다. 독서에서 해석이라는 행위도 같은 맥락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텍스트를 자신의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지만, 반대로 프레임 밖에 있는 텍스트 자체는 무의식적으로 배제해버릴 수 있는 위험성이 있죠.

<법 앞에서>라는 텍스트는, 독자가 자신에 대해 기대하는 바를 배반하고 프레임에서 빠져 나간다는 점에서 독서 행위의 의미를 돌아보게 합니다. 각자가 내놓는 해석들은 분명 모두 가치 있는 것들이지만, 특정한 해석이나 의미의 타당성에 집착하게 되면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텍스트는 쉽게 프레임 속으로 들어가지 않음으로써, 프레임 밖에서 무시되는 요소들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제가 지금 하는 말마저도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자신을 완전한 굴레 속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입니다. 

이제는 독서할 때 신경을 좀 더 곤두세워봐도 좋겠죠. 어디에 나를 현혹시키는 요소들이 있는지 살펴보면서 말입니다. 사실은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교훈, 이것조차 <법 앞에서> "앞에 선" 제가 여러분을 현혹시키기 위해 만든 개념이라는 것, 재미있지 않으신가요?


[임예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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