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죽음'의 기술 [문화전반]

아툴 가완디가 던지는 질문, '어떻게 죽을 것인가'
글 입력 2017.03.01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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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사는 모양새를 보면 '일단 질주하자'는 건가 싶을 때가 있다. 항상 활동하느라 바쁘고 뭔가를 생산해내느라 바쁘다.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일단, 질주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질주의 종착지에 대해 고민하진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삶의 종착지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아침에 일어나 눈 껌뻑이며 앉아있으니 나는 살아있는 것이고, 과거 어느 순간엔가 태어났을 것이고, 미래 어느 순간엔가 죽을 것이다. 삶의 종착지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엔 시간이 없다. 우린 언제나 ‘잘’ 살기 위해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그 방식에 대해 알아내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죽음'은 어색하고 두려운 어떤 것이다. 게다가 이것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아주 조금일 뿐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저자 아툴 가완디는 수많은 '죽음'을 만난 의사다. 윤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던 그는 오늘날 우리가 죽음에 대해 몰라선 안될 사실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은 분명 '살아있는 사람들'에겐 불편하기 그지없는 진실이지만, 그의 책에서는 가깝고 조금은 편안한 것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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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Being Mortal', '어떻게 죽을 것인가' 표지./ 사진=예스24, 네이버 책


 먼저 과거의 죽음을 떠올려보자. 사람들은 가족들 품에서, 자신의 집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 죽음의 원인도 전쟁이나 사고와 같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나 질병이 대다수였고 수명 또한 짧았다. 반면 지금의 인간은 현대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역사상 가장 오래 사는 인간이 되었다. 과거였다면 '가망이 없었을' 환자들에게도 죽음을 유보할 기회가 생겼다. 많은 이들이 천천히 '노화'라는 과정을 거치며, 병원이나 요양원, 의료진들의 곁에서 삶을 마친다. 기술의 발전은 죽음을 오롯이 의학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이제 인간에게 죽음이란 '병실'에서 겪는 경험이며, '의학의 영역'에서 고려할 문제가 된 것이다. 

“의사는 영웅이 됐고, 병원은 질병과 절망의 상징에서 희망과 치료의 장소로 변했다. (...)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삶을, 더 오래 누리고 있다. 그러나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나이 들어 죽어가는 과정은 의학적 경험으로 변질되었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맡겨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현대 의학과 공공 보건이죽음에 대한 경험을 바꿔놓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이 온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죽음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해 제대로 논의하려는 사람이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직 이러한 논의와 고민만이 요양원이나 생명연장 장치들의 실상을 깨닫게 해주며 삶이 갖는 의미를 찾게 해줄 수 있다고 말한다. 

 늙음과 죽음을 외면한 결과가 잘 드러나는 곳은 병원과 요양원이다. 저자의 시선은 이 시설들에 '늙음'과 '죽음'에 대한 고민이 전혀 녹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요양원에선 노인들에게 어떤 삶을 원하는지, 그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지 않는다. 어떤 노인도 요양원을 '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요양원은 이들에게 삶의 주도권을 '전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관점에서 노인이란 “너무 쇠약해지고, 병들고,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망가져 스스로를 돌볼 수 없는” 사람들일 뿐이며, 이것이 지금의 요양원 시스템을 만들었다
 
 또한 저자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들에게서 발견한 것은 이들이 생명연장 외에 다른 '무엇'을 원한다는 사실이었다. 안전하고 보호받는 일상 -사회가 원하는- 보다도 가치있게 생각하는 ‘무엇’이 있었다. 그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선택할 자율성이 보장되었을 때, 삶의 만족도는, 사회가 그토록 걱정하는 그들의 건강은 더욱 좋아졌다. 저자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 대응되진 않는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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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ckpholio.net /  photo by Tim Samoff


 모든 삶엔 마지막 순간이 있다. 죽음의 과정에서는 누구나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생명연장과 관련된 중요한 선택을 해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들을 잊고 산다. 우린 “육체적 독립성을 잃으면 가치 있고 자유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전제를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생명연장장치가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고민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란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모든 인간이 겪는 일 치고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한 개인적 고민은, 사회적인 논의는 너무나 적은 것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란 질문은 오히려 '어떻게 살 것인가'란 질문과 직결되어 있다. 또한 각자의 삶에 존엄성을 부여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아툴 가완디는 '죽음의 기술'을,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질주하는데 바빴던 누군가라면, 삶의 내용을 채우는데 바빴던 누군가라면, 어느 하루쯤은 '죽음의 기술'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한다. '죽음'에 대한 고민은 목적없는 질주를 멈추게 하고, 꽉꽉 채워둔 삶의 내용을 비로소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서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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