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혈우', 화려함 뒤에 남는 아쉬움

처절한 액션과 큰 무대,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글 입력 2017.02.21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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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혈우', 화려함 뒤에 남는 아쉬움
처절한 액션과 큰 무대, 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난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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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혈우'는 직역하면 '피의 비'다. 극은 고려 1257년, 무신정권 말기를 배경으로 하여 치열한 권력 다툼과 그들이 꿈꾸는 세계를 보여준다.

SYNOPSIS

고려의 대격변의 위기였던 몽고의 숱한 침탈을 막아낸 것은 왕권이 아닌 무인들이었고, 그 결과 무신정권이 설립된다. '힘이 곧 권력'이라는 이념 아래 최씨 가문이 무신정권을 주름잡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희망하는 새 시대 '무신제국'의 건립을 기약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려 최고의 권력자였던 무신정권의 수장 최항이 병세로 투병 중 앞으로 일주일도 못 버틸 것이라는 의원의 말을 듣자 자신의 뒷자리를 서자인 최의보다도 충신이었던 김준에게 잇게 하려고 한다. 또한, 무신제국의 건립에 반대하며 현 무신정권을 왕권에 양도하겠다는 뜻까지 밝힌다. 결국 그의 아들인 최의는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의 무신제국의 꿈이 무너지게 될까 염려하여 아버지의 유언이 세상에 선포되기 전 아버지를 죽인다. 결국 이 사실은 은폐되고 최항은 병사로 알려지며, 최의가 차기 무신정권의 수장이 된다. 그리고 최의는 고려에 붉은 비를 내려 무신제국을 건립하겠다는 뜻을 밝히는데..





연극 '혈우'는 해당 공연이 힘을 주어 홍보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었다. 액션은 화려하면서도 처절하여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배우들 또한 액션배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기를 펼쳐주었다. 대공연장을 아낌없이 이용하여 큰 무대를 꽉 채웠고 배우들의 연기도 손색없었다. 마이크를 따로 사용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공연장 뒤편에 앉았음에도 대사 전달이 원활했고 두 주요 인물의 대립도 잘 그려졌다. 하지만 이런 배우들의 열연을 뒷받침하지 못한 것은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이었다. 어찌 보면 미련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주인공의 성격과 이로 인해 늘어지는 극 진행, 130분에 달하는 공연 시간, 장애물처럼 사용되는 러브라인, 소모적이고 답답한 여성 캐릭터의 사용, 젠더감수성이 결여된 대사까지. 지금부터 강점과 단점을 차근차근 짚어보고자 한다.





 먼저 '혈우'는 무협활극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화려하면서도 처절한 액션을 보여주었다. 보여주기식의 액션 보다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로 감정선이 살아있는 액션을 볼 수 있었다. 주연배우 및 조연, 단역 배우들은 액션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 배우들이지만 몹시 뛰어난 액션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유경 역의 나경민 배우가 매우 눈에 띄었다. 마지막 주연 두 명의 액션도 뛰어났지만 영화 같은 연출을 하려다 보니 서로 칼을 겨누다가 붙어서 멈추고 눈빛을 주고 받는 장면은 좀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대사가 오고 갔다면 더욱 박진감 넘쳤으리라 생각한다. 액션 장면들 중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모든 배우들이 무대 전체에서 칼싸움을 벌이는 장면이었다. 정말 처절했으며 격정적이었고, 모두가 빠르게 칼을 휘두르며 움직였다면 몹시 산만했을텐데 부분 조명을 사용, 조명이 쏘이는 파트만 빠르게 액션을 선보이는 부분에서 영리한 무대 연출 방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대공연장에서 펼쳐진 공연답게 무대 장치도 다양하고 화려했다. 장면 곳곳에서 무대 연출에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느껴졌는데, 예를 들어 액션을 할 때는 뒤에 기둥처럼 보이는 각진 판넬을 내려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연못 모양의 무대를 양 쪽에 패이게 설치함으로서 가운데가 더 솟은 듯 보이게 연출했다. 이를 통해 현재 최의가 가진 힘과 더 큰 권력에 대한 열망이 더 잘 느껴졌다. 또한 김준과 안심의 로맨틱한 장면에서는 꽃나무가 내려오고, 전투 장면에서 산에 올라가는 듯한 무대까지. 대공연장을 최대한 이용하여 효과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고민을 한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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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극의 진행을 늘어지게 만들었고, 이는 큰 단점이었다. 많은 편집을 거치는 영화도 120분이 길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편집 없이 진행되는 극이 120분 넘게 진행된다는 것은 관객으로서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액션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극이기 때문에 해당 장면에서는 박진감이 있기도 했지만, 이 극의 내용은 사실상 '안하무인, 권력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악역 최의'와 '안심이를 너무나 사랑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고려 제일의 무사 김준'의 대립밖에 없었다.

 특히 최의가 왜 무신제국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고 싶었는지, 권력에 대한 일차적인 탐닉 이외에도 좀 더 납득가능한 배경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극 중에서는 악을 위한 악이 계속 반복되어 캐릭터 자체의 매력이 매우 떨어졌다. 그리고 최의 캐릭터가 도를 지나쳤다고 느꼈을 때쯤 길향과의 대화에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변했냐"는 식의 대사로 트라우마를 읊어주는 진행이 너무 불을 보듯 뻔했다. '아, 그러니까 이해해달라?' 이런 반감마저 들었다. 어미의 낮은 신분으로 인한 열등감이 있는 캐릭터임을 이해하지만 좀 더 나은, 흥미로운 방식으로 최의의 배경 서사를 서술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김준 캐릭터 또한 극 내내 매력이 점점 감소한다. 김준은 전대 교정별감 최항의 총애를 받던 고려 제일의 무사였다. 심지어 다음 후계자로 전대 권력자의 아들을 제치고 선발될 정도로 인재다. 그러나 그가 극 120분 중에서 전반 100분에 보여준 모습은 자존심도 없고, 우유부단하며, 사랑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 불과했다. 안심과의 절절한 사랑을 표현하고자 한 작가와 연출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 사랑은 지루했고 고루했다. 교훈을 주려는 의도가 뻔한 대사들이었으며, 결국 결정적인 대치 장면에서 극 진행을 질질 끌게 하는 제일 큰 원인이 되었다.

 또한, 극 전체적으로 여성 캐릭터나 여성에 대한 존중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전혀-라는 표현은 길향 캐릭터로 인해 완화되었다.) 안심의 캐릭터는 마지막에 자신을 죽이라고 한 부분 이외에는 소극적이고 낭군의 사랑이 인생의 목표인 정말 별 것 없는 여성 캐릭터였다. 반면 길향은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노비이지만 신분 상승과 사랑에 대한 목표도 있고, 맡은 임무에 성실하였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 안심에 대한 동료애와 최의에 대한 사랑으로 갈등하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 마지막에는 최의를 위해 안심을 인질로 삼아 협박하는 주체성도 보였다. 길향으로 인해 안심은 보다 한심한 캐릭터로 느껴졌다.

 이렇게 안심의 성격을 '사랑밖에 난 몰라'로 방치하는 것보다는, 평소에도 계급, 신분으로 인해 고민하고 고뇌하며 언젠가 이 세상을 바꿔보리라는 의지가 좀 더 가득한 인물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래서 안심이 탐라국 이야기를 할 때 이외에도 그러한 소망들을 내비쳤다면 김준이 마지막에 모든 부정부패를 척결하자는, 현 세태를 비판하는 듯한, 전형적인 시류의 대사를 했더라도 좀 더 극에 진정성이 부여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 부분이 없이는 시류를 타서 현 세태를 비판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물론 블랙리스트로 인해서 가장 많은 타격을 받은 부분이 연극계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난무하는 세태 풍자, 비판으로 인해 어쩌면 이것도 유행처럼 번지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느껴진 대사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마지막 대치에서, 길향은 자신이 최의의 아이를 가졌음을 알린다. 그리고 안심을 인질로 삼아 김준을 협박하는데, 김준은 안심과 길향을 동시에 죽인다. 그리고 최의는 울부짖는다. 어떤 대사와 함께?

"내 아이를..! 내 아이를 가진 여인을..!"

(여인의 죽음을 여인 자체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여인을 '나의 핏줄인 나의 아이를 운반하는 무언가'라는 도구로 인식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최의는 아이를 언급했을 수는 있지만 여인의 죽음에 더욱 분노했어야 한다.)

 또한, 고려 호족들과 무신들이 기녀를 비웃으며 조롱한 부분은 해당 수위의 대사가 불필요한 부분이었다. 현대적인 생각으로는 아예 언급조차 불쾌하지만 고려 시대에서의 남성끼리의 농담이고 최의의 출신 성분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지는 부분이므로 어쩔 수 없음을 고려하더라도, 굳이 여성의 성기와 입을 언급하며 '꿰멘다'는 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반 이상이 될 여성 관객들에게 불편함을 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평소에 하던 농이다"라는 식의 변명이라니. 이는 작년 무수하게 반복된 대학 내 카톡방 성폭력 가해자들의 답변과 다를 바가 없어서 정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비슷한 사건을 직접 경험한 필자로서는 이 이후로 극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분명히 큰 무대 공간을 이용하여 화려한 액션을 선보였고,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격변과 함께 신분제와 평등에 대해 전달하려고 한, 겉으로 보기에는 참 괜찮은 극이다. 하지만 대사를 하나하나 살펴보거나 캐릭터를 하나하나 분석해본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극의 러닝타임을 좀 줄이는 대신 캐릭터 한 명 한 명에 입체감을 부여한다면 훨씬 좋은 극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그 때 관객들은 액션의 화려함에 놀라고 극이 주는 감동에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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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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