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mina] 김치녀와 더치페이

글 입력 2017.02.0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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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을 전혀 하지 않는 나에게 불과 몇 달 전까지도 김치녀 페이지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퍽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의 사진과 실명을 토대로 하는 SNS에서 무려 15만이 넘는 좋아요 수를 기록했던 김치녀 페이지. 이것은 온라인상의 여성혐오가 단순히 일부에 의해 생산되는 문제가 아님을 반증한다. 김치녀 페이지는 삭제되었지만 우리는 거의 모든 포털사이트의 댓글과 커뮤니티에서 김치녀로 낙인찍는 행위를 여전히 마주하고 있다. 이를테면 명품백 좋아하는 김치녀, 돈만 밝히는 김치녀, 약한 척 하며 본인 몫만 챙기는 이기적인 김치녀, 외국인에 환장하는 김치녀와 같은 방식이다. 이처럼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김치녀 담론을 통해 여성혐오의 문제점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김치녀와 더치페이


김치녀는 된장녀, 김여사, 맘충과는 달리 한층 더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한터라 앞의 세 단어 또한 사치가 심하고 이기적이며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여성으로서 김치녀의 카테고리 안에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김치녀의 기준이 존재하는데, 주로 평등을 지향하면서 데이트 비용이나 결혼 비용(집값)은 더치페이 하지 않는 여성, 남성의 조건(주로 경제력)만 따지는 여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남성들은 이러한 김치녀의 특성에 크게 분노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자신들이 더 많은 데이트 비용과 결혼 비용을 부담하게 된 것은 모두 김치녀의 그릇된 사고방식 때문이라고. 정말 그런 것일까?

먼저 남성이 부담하는 경제적 부담과 여성이 남성을 경제력으로 평가하는 맥락은 가부장제를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가부장제와 자본주의는 성별 노동 분업을 통해 남성을 생산자∙유급노동자의 계급으로, 여성을 비생산자∙무임금 가사노동자의 계급으로 나누었다.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남성은 노동계급에 주어진 소명을 마음껏 누리도록 권장된 반면, 여성은 사회의 자궁−24시간 일하는,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은밀하게 다시 정의된 것이다. 여성 본성에 대해 새로운 관념이 만들어짐에 따라 여성들은 가정 안에서 활동해야 할 운명을 부여받게 되었고, 가족의 생계에 대한 실질적 기여를 깡그리 무시당하는 한편 임금 노동에서도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러한 노동가치설은 남성의 노동을 금의 촉매로 둔갑시켰으며 집안일의 지위를 낮추어 경제적으로 의존적이고 비생산적인−전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던−여성에게 전담시켰다. 이에 따라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자 충실한 지원자가 되었으며, 자원 봉사할 보금자리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처럼 남성을 생계부양자, 여성을 가사노동자로 분리하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체제로서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남성은 집, 데이트 비용, 경제권, 여성은 혼수, 집안일과 같은 선입견은 가부장제의 폐해인 것이지 여성의 잘못이라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가부장제를 탄생시킨 것도 남성이며 지배자로서 가장 큰 수혜를 누렸던 이 또한 남성이지 않은가. 이쯤에서 궁금해지는 것은 실제로도 여성들의 경제적 의존도가 높은지에 관한 것이다.

통계청이 26일 발표한 ‘2015년 신혼부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1일 기준 혼인신고 5년 이내인 초혼 신혼부부 117만9000쌍 중 맞벌이는 50만6000쌍(42.9%)이었다. 이 중 무주택 신혼부부는 67만6000쌍(57.4%)으로, 주택을 소유한 부부 50만3000쌍(42.6%)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택 유소유 가구 중 45.9%가 맞벌이며 무소유 가구의 40.6%가 맞벌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이것은 즉 여성 또한 가정경제에 기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전세나 월세, 대출로 생활하는 무주택 가구의 경우, 경제활동을 통해 주택비용 부담에 일조하는 여성의 수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과거와 달리 모든 남성이 집을 소유한 것은 아니며 비용 또한 온전히 남성의 몫으로 보긴 어렵다. 데이트 비용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더 이상 데이트 통장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을 만큼 보편화 되어 있지 않은가. 대부분 서로의 경제적 상황에 맞게 비용을 분담하거나 커플통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돈 한 푼 내지 않고 남성에게 금전적 이득만 취하는 김치녀란 현실에서 마주하기 쉽지 않다는 뜻이다.



더치페이가 진정한 평등?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성들은 비율을 따지며 정확한 비용 분배야말로 진정한 평등이라는 듯이 이야기한다. 정말 이들의 주장대로 연애와 결혼 문화에서 남녀 간의 더치페이만 실현 된다면 젠더를 둘러싼 모든 불평등이 사라지는 것인가? 성평등 사회의 이룩이 이토록 간단한 거였다니. 그야말로 기적의 논리이다. 이 방법대로만 한다면 한국도 부끄러운 성평등지수 114위의 국가에서 단숨에 상위권으로 갈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아, 이 얼마나 초라한 젠더감수성의 부재인가. 여성들은 성폭력과 성희롱, 데이트 폭력, 리벤지 포르노, 외모와 나이 차별 등 여성의 몸을 둘러싼 차별과 폭력에 맞서 제도의 변화를 외치고 있는데, 남성들은 더치페이로 평등을 운운하며 김치녀 패기에 정신이 없으시니 말이다.

사전에 나온 성평등의 의미를 그대로 표현하자면 성평등이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재화와 기회, 보상 등을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게 향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성평등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제반 기회와 삶의 가능성이 평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사전에서의 성평등이란 모든 사람들이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하고 성별에 근거하여 차별 대우를 받으면 안 된다는 관점이다. 이는 민주적인 활동과 같은 노동에 같은 급여를 보장하는 것과 함께, 법과 사회적 상황에서 평등을 창조하고자 하는 UN 세계 인권 선언의 목표 중 하나이다.

이러한 평등주의에 입각해 나 또한, 남성들에게 남녀의 임금격차와 고용 불평등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다. 경제적 평등이 진정한 평등이라고 생각하는 남성들이라면, 남성이 부담하는 경제적 부담과 같이 남녀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지 못하는 경제적 불평등 또한 비합리적인 상황으로 받아들일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무려 36.7%의 차이로 OCED 국가 중 남녀 임금격차가 1위일 뿐만 아니라 세계경제포럼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제 참여 및 기회 부문은 123위를 기록,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의 따르면 OECD 국가 중 유리천장지수 최하위를 기록한 나라이다. 그런데 김치녀가 입에 붙은 남성들은 이 부분에서 또 다시 알 수 없는 논리를 펼치신다. ‘여성과 남성의 임금격차는 여성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니 당연하다.’ ‘여성은 야근도 안하고 생수통도 갈지 않을 만큼 힘든 일은 도맡아 하지 않으니 돈을 덜 받아도 할 말 없다.’ ‘그러게 왜 돈 안 되는 직업을 선택 했나(STEM 분야의 낮은 여성 근로율)’

이 같은 근거를 예로 들며 남성들은 참으로 놀라운 이중 잣대를 보여준다. 모든 분야(고임금과 저임금 분야)를 막론하고 여성이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이 능력 부족 탓이라면 이것은 전형적인 가부장제의 생물학적 우월성, 즉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지극히 남성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가치관에 불과하다. [※그 외 남성들이 주장하는 근거를 반박하며 임금차이를 분석한 기사를 따로 첨부할테니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들은 참조를 확인해주시길 바란다.] 이처럼 자신들이 짊어지는 경제적 부담은 불평등이고 여성들이 받는 경제적 차별은 당연한 것으로 합리화 시키는 남성과의 더치페이가 과연 진정한 평등으로 향할 수 있을까?



평등이란 무엇인가?


남성들의 이중 잣대는 맞벌이를 둘러싼 상황에서도 또 다시 발현된다. 그토록 더치페이를 부르짖는다면 맞벌이 부부의 가사 분담도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하지만 맞벌이 부부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나 외벌이 남성의 가사 노동 시간은 별반 차이가 없다. 심지어 여성이 외벌이인 가정조차 남성보다 여성의 가사 노동 시간이 더욱 길다. 돈 못 벌면 닥치고 집안일이나 열심히 하라는 그들의 논리가 정작 본인들에겐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또한 이 발언의 문제는 경제적 지배권으로 여성을 종처럼 부리거나 멸시함을 정당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현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국 남성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더 이상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여성이 적당한−남성을 뛰어넘지 않는−선에서 도와주고, 동시에 가사와 육아도 맡아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과거 부모세대처럼 경제권을 움켜쥐고 여성을 소유해 왕처럼 군림하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허물어져가는 남성성을 부여잡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따라서 김치녀 담론은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한 치 앞도 벗어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이득만 취하려는 남성들이 만들어낸 또 다른 여성 억압일 뿐이다.

때문에 개념녀와 김치녀로 여성을 이분화 한 뒤 더치페이 하는 여성을 평등주의자로 칭송하는 것은 그저 허울 좋은 속임수에 불과하고 다분히 시혜적인 태도이다. 여성이 주체의 언어(남성)로 타자화, 사물화 되어 평가 당하고 그러한 사회가 메갈의 미러링 이 전까지 묵인되었던 것. 이와 같은 혐오는 차별과 배제의 산물이자 권력이나 다름없다. 이미 그 자체로 여성과 남성은 평등하지 않은 사회이다. 이처럼 여성을 동등한 ‘인간’으로 인식하지 않고 착취하거나 소유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들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성평등을 방해하는 가치관이다.

이런 가치관을 지닌 남성과의 더치페이는 성평등이라 말할 수 없으며 성평등과 관련이 없다. 현실이 나타내주고 있지 않은가. 앞서 말했듯이, 맞벌이 부부로 살아간들 여전히 여성에겐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이중 노동에 불과하다. 데이트 비용 또한 그것을 평등과 연관 짓는다면 해마다 늘어가는 데이트 폭력과 리벤지 포르노에 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만약 후자를 개인에 의한 일로 치부하면서 전자는 공적 영역으로 본다면 그 또한 이중 잣대다. 평등이란 단어가 여성이 받는 구조적 차별에 대해 침묵 또는 정당화 하기 위해 쓰여진다면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차별이다. 제도와 인식의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평등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이해를 바탕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어보인다.





참고 기사: 세계경제포럼 

임금격차에 관한 허핑턴포스트의 기사 


[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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