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문학이란 무엇인가

글 입력 2016.12.12 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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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참여문학 옹호론자가 아니다. 문학의 사명이 정치적, 현실적 변혁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대해 어느 정도 반감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예술적 자의식이 확장되고 마침내 궁극의 표현이 수면 위로 오르는 과정에서 개인의 의식 끄트머리에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현실정치와 이데올로기가 딸려 나와 덩달아 형상화되는 것이지, 시대와 소통하기 위한 것이 절대적인 1차 목표가 될 수는 없다 본다. 시심(詩心)과 같은 내밀한 내적 충동을 정치적 자아실현 욕구라고 획일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나의 개성과 사상이 내 것이 아닌 온전히 이 시대의 산물이라고 쳐도, 내가 지닌 예술적 감수성이 반드시 현실을 설명하고 변혁하기 위해 쓰일 이유가 없다.

  더구나 여태껏 보아 왔던 현대예술은 시대정신을 대표한다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이지 않은가.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모두가 천재적인 광기를 앓는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정치적으로 선구자도 아니며, 지식인으로서의 면모가 요구되지도, 심지어 반드시 예술가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개인(個人)이 아니라 개별(個別)이라는 의미에 더 가까워졌다. 자연스럽게, 문학 작품들 속에서 나타나는 주체들은 해체된 개별적 목소리들을 임의로 조합한 양상이다. 환상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언어, 정치를 진보시키고 선도하는 역할이 아닌 정치적 징후를 앓는 개인의 내밀한 환상통 즉, ‘몽유병(夢遊病)적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개인: 국가나 사회, 단체 등을 구성하는 낱낱의 사람.
  개별: 여럿 중에서 하나씩 따로 나뉘어 있는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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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내가 참여문학의 옹호론자가 아니고 요즘의 트렌드(?)가 이렇다고 해서, 소통을 심하게 경직시킬 정도로 자의식에 고립된 작품들을 마냥 수긍하며 맘 편하게 보는 것도 아니다. 문학의 정치적 영향력/문학의 예술적 자율성. 참여와 순수의 대립만큼 케케묵은 낡은 논쟁거리가 어디 있겠냐만, 그것이 작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대체 문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라는 대책 없이 무거운 물음에서 기인했다고 봤을 때, 이러한 충돌들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은 든다. 시대는 항상 변하고, 시대가 문학을 소비하는 방식도 언제나 변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고 과감하게 의견을 개진한 자가 있다. 참여문학의 대표주자 ‘장폴 사르트르’다.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주제도 주제지만 결코 읽기 쉬운 책이 아니었다. 소상하게 달린 주석들을 봐도 이해가 바로 되지 않는 어려운 용어들도 많았고 그가 자신의 주장을 표명하는 논리도 어쩐지 앞뒤가 모순되게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결론부터 말해보자면, 나는 사르트르의 이름 앞에 따라 붙는 ‘참여 작가’라는 타이틀에서 ‘참여’의 의미를 진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르트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해 강한 어조로 비판을 제기한 사람이다. 그는 "시대를 초월하는 것은 시대에서 도피할 때가 아니라 그것을 바꾸기 위해 그것을 거머쥘 때"라며, 현실 대신 현실의 '객관성' 파괴에만 골몰하며 의식을 해체하기에만 급급했던 예술인들을 비판했다. 대체 그러한 초현실적이기만한 파괴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아주 신랄하다. 문학의 실천성을 강조하는 측면을 보면 언뜻 그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전형적인 ‘참여작가’로 보일 순 있다. 그러나 사실 그가 자신의 문학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자유’다. ‘자유로운 실존’와 ‘정치 현실’이라는 대립할 여지가 많아 보이는 개념들이 어떻게 ‘문학’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정치적 글쓰기가 어떻게 주체의 자유와 관련성을 갖는가?

  이러한 의견의 전개가 가능한 이유는 사르트르에게서 ‘자유’란 아름답고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는 결과가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투쟁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참여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과 행동에 있어 참된 자유를 갖추어 나가는 과정을 말하며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유를 추구하는 작가라면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실존성을 확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현실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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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사르트르는 문학이 반드시 ‘이데올로기’를 앞세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존주의자로서 그런 종속이야말로 사르트르가 가장 경계한 것이다. (그래서 노벨문학상까지 거부하지 않았나.) 문학의 본질인 ‘자유’와 무관한 것이라면 항거해야 하는 것. 즉, 그는 문학이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고 확대시킬 수 있다면 예술 또한 존속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니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 그러니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긴장이 살얼음판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문학이 오락이나 선전의 도구로 전락해도 되는지, 문학이 노동계급에게 인간이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는 희망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지, 그는 당대인들에게 답답해하며 묻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에게서 ‘참여’는 그러한 이해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의견에 대해 전적으로 맞다, 그르다, 라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없다. 책 자체가 워낙 어렵기도 하고 공감이 되면서도 한편으로 아리송해지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시와 산문을 지나치게 구별적으로 생각하는 지점이 특히 그렇다.) 그러나 참여와 순수가 언제나 상충하고 충돌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맥락에는 동의한다. 순수를 위해서 참여가 존재하기도 하고 참여를 위해 순수가 빛을 발하는 순간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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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공개 되고 문화예술인들의 잇단 반발과 정치적 발언이 이어졌다. 수백만이 모이는 촛불집회에서 시국에 대한 다양한 풍자와 발언이 이어지고 분노와 슬픔을 담은 퍼포먼스가 행해지고 있다. 거대한 역사 담론이 무너지면서 시대적 위기에 대한 공동의 의식이 엷어진 세계 전반의 현대적 특징과 일제강점기, 남북의 분단, 독재 정권이라는 근대 역사의 잔존이 뒤섞여 갈가리 찢어지고 분열되어 있던 한국 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해 뭉쳐지며 움직이고 있다. 아마 모두가 역사적 전개가 막 이루어지려는 이 태동의 순간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순간에 문학은, 예술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더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물음. 아마 많은 사람들이 품고 있을 것이다.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그 물음에 대해서 명쾌한 해답을 내어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일단 너무 어렵고 그와 우리의 시대 격차도 크다.) 다만, 한 명의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 나의 자유를 위해 내가 사는 이 시점에서 어떤 예술을 할 것인가, 어떤 작품을 읽을 것인가, 라는 근원적인 질문으로 회귀하게 함은 분명 의미가 크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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