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래, 그게 사랑이었어.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12.08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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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아주 우연히 허지웅 작가의 칼럼을 보았다. "그게 사랑이었어."라는 제목의 칼럼은 허지웅 작가가 되돌아본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담백하면서도 절절한 이야기를 보다 불쑥, 한 손에 영어 단어장을 놓지 않던 네가 떠올랐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너"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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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나는 아주 가끔 널 생각했다. 비가 오는 가을 날 강남을 지날 때, 바람에 양 볼이 붉게 타오르던 초겨울의 오후에, 강의실에 앉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보던 어느 해에, 나는 널 떠올렸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없었음에도 그냥 네가 떠올랐다.

 부정하지는 않겠다. 너를 많이도 좋아했다. 딱히 잘난 것도 없다며 너를 깎아내려도 어느새 나는 너의 곁에 시선을 박아두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넌 날 향해 웃어주지도 않았다. 나쁜 놈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네 주변을 떠날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좋아하냐 묻는 친구들의 물음에 괜스레 장난을 치고 웃으며 얼버무렸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하물며 내가 너를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을리 없었다. 나는 그냥 네가 좋았고 그것이 한없이 길던 내 짝사랑의 이유였다. 

 어느 날인가 네가 물었다. 자신을 좋아하냐고. 응, 좋아해. 그냥 그렇게 답했다. 네가 또 물었다. 왜 좋아하냐고. 망설이다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날씨가 좋아서. 엉뚱한 답변이었다. 너는 한참을 멀뚱히 나를 보다 교실을 나갔다. 네가 사라진 교실엔 나뿐이었다. 어쩌면 그날 울었던 것도 같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다.

 졸업할 즈음, 네가 나를 찾아왔다. 사실 찾아온 게 아니라 우연히 마주친 건지도 몰랐다. 너는 날씨가 좋던 그날처럼 나를 보다 말했다. 아직도 날씨가 좋으냐고. 문득 창 밖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늦은 장마인데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답했다. 요즘은, 아닌 것 같다, 고.
 
 영화나 소설처럼 멋진 끝은 아니었다. 그냥 그게 다였다. 너는 알겠다고 말하곤 너의 반으로 돌아갔다. 우르릉 쾅. 번개가 쳤다. 교실에서 애들 몇이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소리를 지른줄 알고 얼마나 놀랐던지. 화장실에 들어가 손을 씻는 내내 거울을 볼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쩌면 조금은 후회했던 것도 같다. 

 지긋지긋하던 19살은 그렇게 끝났다. 밍숭맹숭했다. 대학에 가고 머리를 기르고 화장을 하면서 나는 너를 잊었다. 잊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그냥 잊었다. 그게 너였다. 그냥 지워지는 그런 존재. 

 나는 아주 가끔 널 생각했다. 비가 오는 가을 날 강남을 지날 때, 바람에 양 볼이 붉게 타오르던 초겨울의 오후에, 강의실에 앉아 모르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걸 보던 어느 해에, 나는 널 떠올렸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이 없었음에도 그냥 네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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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이터널 선샤인 中)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보면서, 어쩌면 네가 나의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을 지워도 자꾸만 되돌아오는 그 형상들. 외면해도 내 어깨와 입술에, 끝내는 가슴으로 안착하는 형상의 이유들. 그 무겁고도 불안한 존재가 너라는 것을 인정하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그래, 이제야 나는 그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사랑"은 아니었다고 부정하려 했지만, 마침내 나는 인정해야 했다. 언젠가 너를 만나 그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너에게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래, 그게 사랑이었어." 라고.


[김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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