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체험하기, 연극 '아버지'와 '어머니' [공연예술]

글 입력 2016.10.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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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연극을 관람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체험’은 아주 좋은 대답이 될 수 있다. 본디 사전적 의미의 체험이란 자기가 몸소 겪은 것 또는 그런 경험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간접 체험이라는 용어를 내놓으면서까지 이 체험의 폭을 확장하려 한다. 본인이 직접 겪는 것만을 체험으로 삼는다면 일생동안 체험의 폭이 너무나 좁아지기 때문이다. 체험이란 인생이란 한 권의 책에 적히는 내용과 같은 것이어서, 다양한 체험이 적힐수록 인생은 다채로워지고 사람은 깊이 있어진다. 그리고 연극은 이 체험의 아주 좋은 기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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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에서 8월, 국립극단은 현재 주목받는 프랑스 극작가 플로리앙 젤레르(Florian Zeller)의 두 연극 ‘아버지 Le Père’와 ‘어머니 La Mère’를 한 무대에 올렸다. 연극이 상연되기 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윤철 국립극단 예술감독은 “이 두 작품은 감상의 연극이 아닌 체험의 연극이다.”라고 전했다. 그는 이 두 연극을 통해 관객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는 고통, 외로움, 존재적 위기'를 함께 체험하길 바랐다.



80대인 앙드레는 전직 탭댄서로 딸 안느와 사위 앙투완느과 같이 살고 있다. 아니, 그는 엔지니어였고 딸 안느는 지금 애인 피에르와 런던에 살고 있다. 그는 항상 파자마를 입고 있으며 늘 자신의 손목시계가 온전히 있는지 확인하고, 그 시계를 도둑맞을까봐 조바심을 낸다. 갑자기 모르는 남자가 와서 자신이 안느의 남자친구라면서 조롱하듯이 자신의 뺨을 때린다. 이번에는 모르는 여자가 와서 자기가 딸 안느라고 한다. 이상하다. 사람들이 계속 바뀌고, 같은 상황을 다르게 이야기 하고, 자신도 모르게 집구조가 바뀌어있다…

↑'아버지' 시놉시스


장성한 아들, 딸을 떠나보낸 중년의 여인 안느는 예전에 어린 자녀들을 돌보던 때를 회상하며 그리워한다. 그는 남편이 몰래 바람을 피고 있다고 확신하고, 퇴근이 늦은 남편에게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계속 묻는다. 아들 니콜라가 애인 엘로디와 다툼을 벌인 뒤 갑자기 찾아오고, 평소 자신의 아들을 애인에게 뺏겼다고 생각한 안느는 자신이 산 빨간 드레스를 보여주며 같이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그녀의 일방적인 사랑에 지쳐가는 가족. 안느는 자신이 점점 주변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된다는 것에 절망하는데…

↑'어머니' 시놉시스



7월 말, 필자는 이틀에 걸쳐 이 두 연극을 모두 관람하고 돌아왔다. 관람 첫 날, ‘아버지’를 먼저 관람하고 돌아온 본인은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속에서는 같은 사건이 거듭 반복된다. 그러나 그 사건들 속에 같은 서사는 없다. 인물, 배경, 사건의 디테일이 계속해서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앙드레 오직 그 뿐이다. 이튿날, ‘어머니’를 관람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지만 모든 인물의 행동은 달라져 있다. 과연 내가 본 현실 중 무엇이 가짜이고 무엇이 진실인가. 어느 곳에서도 진실의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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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안느와 대화하는 앙드레. 그의 거처, 안느 남편의 이름, 직업, 행동 모두가 매 순간 변화한다.


그리고 두 극을 모두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던 어느 길에선가 필자는 깨달았다. 이 혼란은 극을 보는 내내 사건을 바라보던 시선이 본인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임을 말이다. 그렇다. 극의 모든 순간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버지 앙드레의, 그리고 어머니 안느의 것이었지 단 한 순간도 관람객의 것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이것은 ‘체험의 연극’이 맞았다. 이 두 연극의 시선은 오롯이 앙드레와 안느 내부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기에, 극을 보는 내내 관람객은 그들의 입장을 고스란히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충격을 받았다. 극을 보는 내내 관람객은 어딘가 ‘정상적인 것’이 있을 거라 믿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구분하고 싶어 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본 것은 사실 치매 걸린 앙드레의 시선이었기에, ‘아버지’가 상연되는 내내 극이 보여주는 현실은 단 한 번도 객관적 실제인 적이 없었다. ‘어머니’ 안느 또만 마찬가지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품을 떠난 것들에 대한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관객 역시 극을 보는 내내 그녀와 함께 사라진 그녀의 젊은 날과 그녀의 아들에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가 앙드레와 안느의 시선에서 그려진 한, 무대를 보는 내내 관람객은 곧 그들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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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에서 홀로 남편을 기다리는 안느.


이것을 체험이 아니고서야 어떤 단어로 설명하랴. 지성으로는 결코 이해되지 않는 이들의 왜곡된 현실을 체험하고 난 뒤 필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체험해보기 전에는 어느 무엇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연극은 아주 효과적인 체험의 한 방법이다. 왜? 무대를 보는 내내 배우들과 같이 호흡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단순한 스크린에 나타나는 배우들에게 몰입하는 영화의 몰입과는 또 다르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바로 눈앞의 배우들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현실이 되기 때문에, 이 체험은 간접체험이되 그들에게 빙의하여 이루어지는 직접체험과 같은 요소를 내포하는 것이다.

'아버지Le Père'와 '어머니La Mère' 이 두 연극을 쓴 젤레르는 말했다. ‘연극이란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무대가 매력적인 것은 그곳이 대답이 아니라 질문의 장소, 확실성이 아닌 불확실성의 심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무대가 과연 불확실한 질문의 장소가 맞다면, 관객들이 극을 관람하는 도중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임은 명료하다. 그리고 그 답을 찾는 체험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고, 다른 이의 시선을 체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극을 본다.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자신의 세계를 넓히기 위해서. 앞으로도 이런 체험의 기능을 수행하는 연극이 많이 나오기를 바란다.





이미지 출처 : 국립극단


[서유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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