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view] 국내 최초 캐주얼 카페 전시회[헬로 아티스트 展] _ 간단한 작가 소개 & 전시 꿀팁★

글 입력 2016.08.21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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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캐주얼 카페 전시 
"마음챙김" & 인상주의 화가 8인의 삶


헬로 세로형 포스터-01.jpg
 

장소 ㅣ 한강반포지구 내 솔빛섬
날짜 ㅣ 2016년 7월 22일 ~ 
시간 ㅣ 오전 10:30 ~ 오후 10:30 
(입장마감 오후 10:00, 연중무휴)
티켓 ㅣ 하나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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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 좋은 한강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있다면 어떨까?
눈으로는 좋은 그림을 감상하고 
입으로는 달콤하고 시원한 음료도 마시고
손에는 함께있으면 즐거운 사람의 손을 잡고
코끝을 간지럽히는 한강의 바람까지 느낄 수 있는
오감만족 전시가 찾아왔다.
바로 '헬로 아티스트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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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를 필두로 인상주의 아버지인 클로드 모네, 
에두아르 마네, 에드가 드가,폴 세잔, 폴 고갱, 조르주 쇠라 등 
20세기 현대 미술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상주의 화가들의 삶과 작품을 조명하며 
인상주의를 총망라하는 이번 전시는
단연 종합선물세트같은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는 "마음챙김(Mindfulness)"를 
콘셉트로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할 만 하다.
"마음챙김(Mindfulness)"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 
어떠한 문제가 생겨도 당황하지 않고 해결하는 능력을 키우는 방법을 제시하는 맘이다. 
인상파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걸은 것처럼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본인의 마음, 
더 나아가 타인의 마음 그리고 미래까지 챙길 수 있도록 전시를 구성했다고 한다.


---------- 간단한 작가 소개 ----------


고흐~세잔.jpg
 
왼쪽부터 고흐, 마네, 르누아르, 세잔 

<빈센트 반 고흐 >

죽고 난 후에야 빛을 본 빈센트 반 고흐는 굴곡진 삶을 살아온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다. 
그는 27세의 늦은 나이에 전업 화가의 길로 뛰어든 후 10여 년의 짧은 기간 동안 
1,000점에 가까운 작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불운의 아이콘이다. 
진지하고 내성적이면서도 욱하는 성격 때문에 주변에 친구가 없었고, 
친동생 테오가 유일하게 그를 지지하고 후원해주는 조력자였다.
고흐는 마음속에 불덩이 같은 사랑을 품고 살았지만, 
본인이 사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던 탓에 그것을 나눠주는 것에 서툴렀다. 
잠시 함께 살았던 화가 고갱은 물론, 그를 거쳐 간 여성들 대부분이 
그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그러나 고흐는 언젠간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갖고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했다.
그러나 세상은 가혹했다. 고흐는 지독한 가난과 고독, 외로움을 극복해야만 했다.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미련 없이 자신의 몸에 총을 겨누며 세상을 떠났다.


<에두아르 마네>

마네는 평생을 인상파의 보이지 않는 리더로 살아왔다. 
그가 인상주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이유는 국가미술대전인 ‘살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보수적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그는 반드시 제도권 미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감이 있었다. 
그래서 살롱 체제에 대항하며 생겨난 인상주의 전시회에는 항상 불참해 왔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굽히지 않는 반골 기질이 있었던 마네는 
7년동안 스승 토마 쿠튀르 아래에서 배웠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지는 않았다.
 과거에만 매달리며 아카데미즘을 답습하는 스승의 화풍이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펜대를 쥐고 있던 평론가들은 마네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럴수록 마네에겐 일종의 오기가 생겼고, 
자신을 따르는 실력 있는 후배들이 생기면서 자신감도 붙었다.
결국 마네는 승리했다. 인상파 전시에는 참여한 적 없지만 ‘인상주의 선구자’라고 불렸고, 
말년에는 살롱에 자동으로 출품할 수 있는 훈장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았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주로 부르주아들의 행복한 한 때를 화폭에 담아낸 르누아르는 ‘사랑과 낭만의 화가’로 알려졌다. 
노동자 계급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일을 했던 그는 강한 생활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인상주의 결성 초기 때 모네, 피사로와 함께 인상파를 주도했고, 
1881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화풍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와 아카데미즘 사이 어딘가에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갔다.
그러다 상류층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그야말로 대박을 터트린다. 
상류층 사이에서 그림 잘 그려주기로 소문이 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 거다. 
인상파 초기 때 모델을 구할 돈이 없어 야외 작업을 했던 그에겐 
일종의 인생역전의 기회가 왔고, 르누아르는 당당하게 그 기회를 잡았다.
풍요로운 생활을 말년에 남프랑스 카뉴에 정착할 때까지 지속됐다. 
평생의 동반자이자 훌륭한 모델이었던 알린 샤리고의 내조 덕분에 
걱정 없이 작업에 몰두했고, 평생 수 천 점의 그림과 조각을 남긴 성공한 화가로 남을 수 있었다.


<폴 세잔>

‘사과의 화가’이자 20세기 현대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세잔은 
평생에 걸쳐 인간과 사물의 형태를 집요하게 탐구한 화가다. 
과거 기법에만 집착하는 아카데미즘을 거부한 세잔은 자연스럽게 인상파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초반의 거칠고 섬세하지 못한 붓 터치 때문에 평론가들의 악평에 시달려야만 했다.
보기보다 소심했던 세잔은 아예 귀를 닫기로 하고 
1880년대부터 고향 남프랑스로 내려와 그림에만 집중했다. 
정물을 그리기 위해 놓아둔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리거나, 
2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동네 산에 불과했던 ‘생트 빅투아르’를 관찰했다는 일화를 통해서 
그의 그림은 충분한 내면 수양의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하다.


고갱 등.jpg
 
왼쪽부터 드가,모네,고갱,쇠라 


<에드가 드가>

에드가 드가는 당대의 문화를 즐기던 시민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포착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는 실내 작업을 주로 하면서 인상파와는 일정의 거리를 두었지만, 
보수적인 살롱 체제에 반대하는 의견에는 동의하며 꾸준히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다.
사실 드가는 1856년부터 10여 년간 꾸준히 이탈리아를 드나들면서 
르네상스 명화를 보며 고전 연구에 힘을 기울인 화가다. 
그러나 주제면에서는 명화에서 감동을 받지 못했다. 
그는 종교화나 역사화, 틀에 박힌 누드화에만 매달리는 아카데미즘에 답답함을 느꼈고, 
당대의 문화를 담아냈다.
드가가 집중했던 주제는 발레리나와 여성의 누드였다. 
당시 발레리나 중에는 일당을 받으며 근근이 생활하는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드가는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며 뜨거운 박수를 받는 발레리나보다는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발레를 해야만 하는 노곤한 소녀들의 모습을 그렸다.
아울러 아름답지만 인위적으로 포즈를 취하는 여성이 아닌 
목욕을 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옷을 벗은 여성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근대적 누드를 창조했다.


<클로드 모네>

인상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모네는 혼자 사막에 떨어져도 살 수 있을 만큼 생활력이 강한 화가다. 
십대 중반부터 캐리커처 풍자화를 그려 돈을 벌기 시작했고, 
화가로 데뷔한 후에도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지인들에게 손수 편지를 써서 돈을 꾸었다.
그는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볼 때까지 하고야 마는 의지를 갖고 인상주의 전시를 이끌었다. 
때문에 친구나 선배 화가들 사이에서는 신망이 두터웠다. 당시 진보적인 사상으로 
그림을 그리던 일군의 화가들은 그의 그림 <인상, 해돋이> 덕분에 인상파라는 이름을 얻으며 
비로소 새로운 사조로 인정받았다.
주로 야외에서 작업하기를 즐겼고, 빛의 변화를 예리하게 캐치해야했던 탓에 
말년에는 눈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지만, 그는 “현장에 답이 있다”고 믿는 현장 중심의 화가였다. 
무엇보다 모네는 자신이 그린 작품을 제대로 포장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오랜 세월에 거쳐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지만, 
이를 ‘연작’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성공한 건 모네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자신을 알아봐 줄 때까지 묵묵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을 시작한 지 30년 만에 프랑스는 물론 
미국에서도 명성을 쌓으며 세계 최고의 화가 대열에 올랐다.


<폴 고갱>

‘원시의 화가’로 불리는 고갱은 선원과 주식중개인을 하다 
35세에 전업 화가가 된 독특한 인물이다.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위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부분도 있었지만 
본인 자신이 화가로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거라는 무모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는 재능이 많았다. 주식 일을 하면서 틈틈이 배운 실력으로 인상파 전시에도 참여했고, 
늘 호평을 받은 건 아니지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인정을 못 받자 자존심이 상한 고갱은 
지방과 해외를 전전하며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의 화가 인생에서 정점을 찍은 건 타히티 시절이다.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의 발현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평론가도 있었지만, 
20세기 초 서구인들이 가지고 있던 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신비감을 그는 
현장에서 발로 뛰며 직접 그려냈다.
고갱은 원근을 무시한 구도와 평필적 색채, 상상과 현실을 한 데 담는 
종합주의적 구성을 창조하며 타히티 원주민들의 건강한 에너지를 화폭에 담아냈다. 
말년에는 돈이 떨어져서 가난하고 힘든 시절을 보냈지만, 
타히티에서 그린 그의 작품은 훗날 미술 경매에서 역대 최고가를 세우며 큰 주목을 받았다.


<조르주 쇠라>

남들이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는 걸 결국 해내는 사람을 우리는 마술사라고 부른다. 
쇠라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딱 들어맞는 삶을 산 마술사 같은 화가다.
보수적인 집안에서 유복하게 자랐고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며 고전을 익혔지만,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방식의 혁신을 추구했고, 그러기 위해 새로운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그는 색채학이나 광학 이론을 탐구하며 
1881년에는 들라크루아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 관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유독 대형 캔버스를 선호한 쇠라는 
작은 점들을 일일이 찍어서 형태를 완성하는 신공을 발휘했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파리의 아방가르드 화단은 
그가 차기 인상주의를 이끌 신인상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는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이 무시했던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하며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등의 
대작을 그려 평단의 호평을 이끌었다.
그는 32세의 이른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의 독특한 회화법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미술 교과에서 점묘화를 다루고 있다.



----------- ★ 전시꿀팁 ★ -----------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관람객은 고속터미널에서
 솔빛섬까지 가는 무료셔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또한 전시 티켓 소지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헬로 자물쇠" 공간을 옥상에 마련해 
아름다운 한강 정취를 감상하며 
사랑 고백이나 우정,가족 단합을 할 수 있는 추억을 선사한다고 한다.

옥상에서는 하루 10여차례 '무지개 분수쇼'도 펼쳐지고, 
바베큐 파티, 프로포즈 이벤트 등 특별한 의미를 담은 "헬로 데이(hello Day)"를 
월 1회 개최할 예정이라고 하니 미리 신청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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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플이 엄~청나게 많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한강의 정취, 휴식, 작품, 마음챙김 포기할 수는 없다ㅎ
여름에 어울리는 전시, 헬로 아티스트전 놓치지 않을꺼에요~ !!!!


[박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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