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도널드 마굴리스 원작, 연극 < 단편소설집(Collected Stories) >

글 입력 2016.08.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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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집_포스터_메인.jpg
 




아트인사이트(www.artinsight.co.kr)의 초대로 광복절을 포함한 짧은 연휴에 연극 <단편소설집>을 보고 왔다. 굉장히 묘한 작품이었다. 도널드 마굴리스(Donald Margulies)의 원작 Collected Stories를 번역하여 국내에서 초연한 무대였는데, 번역 어투가 그대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방해가 되었다기 보다는 거기서 원문이 어떻게 쓰였을지를 생각하며 듣다 보니 더더욱 생각할 것들이 많았다. 1, 2부 각각 75분씩 진행되는 방대한 분량의 연극인데 루스 스타이너 역의 전국향 배우와 리사 모리슨 역의 김소진 배우 모두 엄청난 몰입과 열연으로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전달해주었다.






 <시놉시스>

창작과 교수 루스 스타이너는 존경 받는 단편소설 작가다. 루스를 숭배하던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은 6년 동안 루스의 지도를 받으며 인정받는 작가로 성장한다. 단편소설집 출간 후 호평을 받은 리사는 ‘루스와 시인 델모어 슈왈츠의 사적인 관계’를 담은 장편소설을 발표한다. 자신의 인생이 제자의 소설 소재로 쓰이자 루스는 분노한다. 예술가가 했어야 하는 선택을 했다고 주장하는 리사를 용서할 수 없는 루스. 친밀한 사제지간이었던 루스와 리사, 그러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만 간다.






이 작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여성 2인극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모녀 관계가 아닌, 스승과 제자가 주인공이라는 점이 매우 독특하다. 동성이자 문학이라는 같은 분야를 사랑하고 공부하며 그 분야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져가는 두 사람. 스승과 제자인 동시에 동료이고 또 경쟁자인 그들의 관계는 모녀관계가 아니기에 더더욱, 인간관계의 오묘한 순간들을 포착해내기에 적합했다. 완벽한 타인, 그러나 깊을 수밖에 없는 유대로 인해 어떻게 아와 타의 관계가 부딪치고 섞이고 이해하며 받아들이게 되는지 적절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신이 동경하는 단편 작가이자 교수인 루스 스타이너를 만난 대학원생 리사 모리슨. 리사와 루스의 만남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다. 리사의 글을 보고 그녀가 차분한 사람일 것이라 기대했던 루스는 첫만남에서 들떠서 횡설수설하는 리사의 모습이 조금은 짜증스러워 보였다. 자신을 동경하는 학생인 것을 알고는 조금 풀리는 듯했지만 두 사람이 애당초 성향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극의 초반부에서부터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말만 하면 꼬이고 횡설수설하는 리사에게, "말하지 말고, 써" 라고 말하는 루스.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새로운 시작으로 이끈 말인 동시에 극의 후반부에 이르러 관계의 파탄을 가져온 근원이 되기도 했다.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얼마나 묘한가. 처음에는 스승이 제자를 이끌어주고 방향을 제시하게 되지만, 어느 순간에 접어들면 제자 역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종종 청출어람의 면모를 보이기도 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스승은 제자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질투심을 느낄 것이다. 한창 젊은 나이에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 제자가 반짝이는 모습은, 이미 그 시절이 지나버린 스승의 입장에서는 시기와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 <단편소설집>은 실상 사회에서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 수면 아래의 감정을 아주 첨예하게 드러내어 다루었다.

리사의 글을 매력적이라 생각하는 루스. 그런데 리사가 등단하게 된 소식을 알렸을 때 루스는 마냥 기뻐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리사가 자신과 이야기했던 곳이 아닌 다른 잡지에 투고하여 등단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왜 등단 소식을 미리 알리지 않았는지에 대해, 루스는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루스가 자신의 최신작을 리사에게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사로부터 피드백이 오지 않은 서운함에 더하여 폭발하듯 불거졌다.

게다가 리사가 자신의 최신작에 대해 조금은 실망스러웠다는 이야기를 하자 루스는 굉장히 방어적인 태도로 자신의 작품을 옹호한다. 긴 설명 끝에 끝끝내 리사로부터 '이제야 이해되었다', '선생님 말씀이 옳다'는 말들을 듣고서야 루스는 안심한 기색을 보인다. 자신보다 젊고, 이제 점점 유명해지고 창창하게 빛날 제자의 모습에서 루스는 이미 조금씩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작품이 예술의 도덕적 딜레마를 화두로 꺼낸 것은 아주 대담했다. 1부의 2막은 우디 앨런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우디 앨런이 순이와 깊은 관계였다는 게 밝혀지는 그 세기의 스캔들이 터진 것을 보며 루스와 리사는 상이한 반응을 보인다. 루스는 예술가에게 그 누구도 도덕적인 본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다며 우디 앨런을 옹호했고, 이와는 달리 리사는 예술가로서 모럴이 비정상적이라고 보이는 우디 앨런에게 분노한다. 쉽게 말하자면 도덕적 잣대에 대해 서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가 달랐던 것이다. 루스는 제자인 리사에게 예술적인 감성과 그 driving force가 작용하면 도덕과 통념 같은 것은 상관없어진다고 말하며 자신의 과거 연인이었던 시인 델모어 슈워츠와의 연애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사랑했지만 결국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옛 추억을 말이다.

그런데 극의 종막에 가서는 이것이 역으로 대치되어 나타난다. 2부 마지막 막이 오르기 전에, 리사는 루스에게 단편 작가로 등단하여 장편을 단 한 번도 내지 않은 것에 대해 열등감이 들지 않냐는 질문을 던진다. 루스는 이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그러나 조금 방어적인 듯한 태도로 그런 적이 없다며 잘라 말한다. 루스의 그런 태도에서 리사는 충분히 납득하지 못했던 것 같다. 자신만의 장편을 내어서 세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욕심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극의 종막에 이르러, 리사는 루스의 옛 추억, 그 연인과의 비극적인 연애 이야기를 자신의 장편 소설로 출판해버리기 때문이다.


"넌 내 인생을 훔쳤어"

루스는 리사에게 분노했다. 자신의 제자 중에 리사만큼 사랑했던 제자가 없었음을 고하며, 동시에 자신의 능력과 지혜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며 감추어두고 싶었던 편린을 만천하에 들추어내버린 제자에 대한 배신감에 격노했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제 출발점이었어요"

그런 루스에게 리사는 말하지 말고 써라고 얘기해 준 사람이 당신이셨다는 것을 거듭 밝혔다. 리사 자신은 루스의 그 옛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떠한 충동 같은 것이 들면서 루스의 이야기를 자신이 써서 내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자신을 drive했다고 말하는 리사는, 1부에서 루스가 말했던 '운명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driving force'에 충실하게 창작한 것이었다.



첨예한 감정들이 폭발한 끝에 무대는 집에 홀로 남은 루스가 전화벨이 울리는 것을 바라보며 끝맺어졌다. 리사를 고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던 루스. 과연 그 전화는 루스의 변호사가 한 전화였을까. 그도 아니면 리사의 소설을 읽고 그것이 루스의 이야기인줄 알아차린 그녀의 지인들이 한 전화였을까. 그 무엇도 명확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리사와의 갈등이 결국 완벽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관계의 깨어짐 그 자체로 끝나버린 상황에서 루스는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다시금 리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는 점이다. 자동응답기를 쓰지 않는 루스의 모든 전화들을 응대하던 것은 항상 그녀의 조교이자 동료 그리고 벗이기도 했던 리사였기 때문이다.





원문이 이토록 보고싶어지는 번역극은 처음이었다. 리플렛에 보면 '치밀하게 계산된 언어, 잘 쓰여진 연극이 갖는 대사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정말로 그랬다. 이 작품이 실제로 출판된 것은 1998년 그리고 퓰리처상을 수상한 것은 2000년인데 대략 출판연도로부터 약 20년이 못되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쏟아낸 그 수많은 질문들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인간관계의 깨어짐과 그 회복의 문제, 빼앗고 뺏길 수밖에 없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예술의 도덕적 딜레마, 심지어 젠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집>은 아주 중요하고 무거운 화두들을 한꺼번에 다루었다. 무대에서 너무 많은 화두들이 던져졌기 때문에 내가 지금 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꼭 원문을 보아야 속이 풀릴 것 같다.

왜 도널드 마굴리스는 이 작품의 제목을 '단편소설집(Collected Stories)'이라고 지었을까? 사실 이 작품을 연극으로 보면 정말 하나의 단편소설을 내 머릿속에서 그려나가며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원작 자체는 극 작품이 아니던가. 그래서 혼자 왜 제목이 단편소설집일지 고민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한 결론은, 루스와 리사의 관계가 맺어진, 그리고 깨어진 그 모든 추동력이 단편소설에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루스를 보며 리사는 작가를 꿈꿨고, 루스처럼 단편 작가로 등단했다. 단편소설이 매개가 되어 루스와 리사의 관계를 엮은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단편소설은 리사의 역린이 되기도 했다. 단편작가의 경우, 단편으로 반짝 등단했다가 이후 작품다운 작품을 쓰지 못해 문단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작가도 많기 때문에 그것은 리사에게 열등감과 위기의식으로 작용했다. 단편소설 그 자체가 리사의 아킬레스건이 되었고, 여기서 탈피하고자 한 리사가 결국 루스의 이야기로 장편을 출판하면서 루스와 리사의 관계가 깨어져버린 것이다.



전국향 배우와 김소진 배우의 열연 덕분에 정말 소설을 읽는 것처럼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이 무대를 기획한 극단 적은 외국 극작가의 작품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창작극의 해외 소개를 중요한 미션으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이번 무대 역시 해외 극작가 도널드 마굴리스의 작품을 국내에 최초로 소개한 귀한 자리였다. 이후에 또다시 어떤 작품으로 객석에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어줄지 기다려진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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