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장희빈 속의 장옥정, 신선했던 연극 '왕과나'

글 입력 2016.08.10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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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고 또 자주 가는 곳이 혜화이다. 그래서 혜화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극 <왕과나>가 상연된 미마지아트센터 눈빛극장은 마로니에 공원과는 조금 떨어진 혜화 로터리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곳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조용했고, 평화로웠다. 같은 혜화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색다른 분위기가 날 수 있다는게 새삼 놀라웠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연극 <왕과나> 역시 익숙한 존재였던 장희빈을 신선하게 그려내어 내게 그러한 색다름을 선물했다. 



 
 쇼파 하나와 의자 8개 정도. 공연 시작 전, 굉장히 간단명료한 무대를 바라보면서 ‘사극인데 왜 쇼파와 의자?’ 하는 생각과 ‘이렇게 간결한 무대에서 어떻게 숙종과 장희빈의 이야기를 그려나갈까?‘하는 호기심으로 마음이 한가득 들어찼다. 그런데 공연이 시작되자 조금은 충격적이게도 쇼파와 의자는 대단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앉기 위한 용도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연극 <왕과나>는 다른 연극들과 달리 15명 정도 되는 배우들이 시작부터 모두 무대 위에 등장해있었다. 몇몇은 쇼파와 의자에, 몇몇은 바닥에 앉은 채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다함께 모여 숙종과 장희빈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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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소개했던 바와 같이 극은 전체적으로 유쾌하게 흘러갔다. 아무리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왕이 남자주인공이기에 역사적인 흐름 속에서 항상 무겁게 다루어지곤 했던 숙종과 장희빈을 이만큼 가볍고 재치 있게 그릴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무엇보다도 극에서 쓰이는 말투와 어휘가 기존 사극들과 달랐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사극 드라마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항상 목소리를 내리깔고 어렵고 익숙하지 않은 말투로 대화를 하기 마련인데 이 연극은 그렇지 않았다. 숙종은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고, 장희빈 역시 그러했으며 다른 배우들도 때로는 욕설을, 때로는 음담패설을 섞어가기도 하면서 그들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하지만 어찌됐든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중요한 사건은 여지없이 등장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두 가지였다. 장옥정이 숙종의 성은을 입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 서인 세력을 숙청하는 부분이 그 중 하나였다. 연극 <왕과나>는 기타, 북, 아코디언, 하모니카 등 다양한 악기들과 배우들의 춤, 그리고 움직임이 한데 어우러지는 가무극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때문에 이를 이용해 스토리를 보다 극적으로 꾸려나가고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장면들이 여럿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숙청 장면이 가장 그러했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북소리, 무대 위에 마치 물건처럼 정렬되어있는 배우들의 기계적인 움직임, 그 사이사이를 배회하며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는 숙종과 장희빈의 모습이 대조되면서 전체적인 상황을 한 순간에 압축적으로 보여줌과 동시에 가무극의 특징을 살려 스토리를 매끄럽게 이끌어나간다는 느낌을 주었다.
  

j.jpg▲ -연습사진
 

 또한 극의 끝자락에서 속곳만을 입은 채 빛줄기 한 자락뿐인 허공을 향해 달려가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닿고 싶어 하는 옥정이 움직임은, 대사 한 마디 없었지만 정말 많은 것들을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역사 속 인물이라는 이유로, 왕의 여자였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제3자에 의해 그녀의 행적은 해석되고 평가되어왔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장희빈도 그저 나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인간이자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속으로 훅 들어오는 듯했다. 화려한 한복도 희빈이라는 지위도 벗어던진 채, 오롯이 장옥정이라는 사람이 되어 지난 화려한 날을, 혹은 숙종의 변해버린 사랑을 그리워하거나 갈구하는 그녀의 모습은 한 여인으로써 애처롭기 그지없는 장옥정을 보여주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뒤 무대에 남겨진 옥정의 한복은 한 때 숙종의 사랑을 담보로 궁중을 휘어잡았던 옥정의 지난날들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그 허무함이 사무치게 느껴졌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연극 <왕과나>는 만족스러웠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극이 역사적인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부연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해설자가 등장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았지만, 문제는 해설자가 여러 명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해설자만 여러 명인 것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극에서 등장하는 15명 정도의 배우들이 처음부터 무대 위에 오르는데 이들은 해설, 심지어는 배역까지도 번갈아서 맡아가며 극을 이끌어 나갔다. 장희빈 역할만 해도 3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면서 연기를 했고 해설은 훨씬 더 빈번하게 변화했다. 이러한 구성 방식 때문에 어쩌면 지루함을 덜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단점이 더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무극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움직임과 노래, 악기의 연주까지 집중해야했는데 배역까지 자꾸 바뀌다보니 조금 심란하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연극 <왕과나>에 신선함을 불어넣는 요소임은 분명했고 이러한 아쉬움을 덮어버리기에 무대는 충분히 유쾌하고 즐거웠다. 


 과연 장희빈에 대한 새로움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연극 <왕과나>를 보기 전 가장 우려함과 동시에 기대했던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노파심이었나보다. 가볍고 유쾌하게, 과하지 않은 음란함과 가무까지 더불어 신선함을 느끼기 어려운 대상에게서 신선함을 이끌어낸 연극 <왕과나>, 충분히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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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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