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밀의 자유론을 읽고 [문학]

우리는 어떻게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그 개별성의 존중이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글 입력 2016.06.20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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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는 ‘자유’라는 가치에 충실하다. 모든 명제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서 합리화되며, 세계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굴러간다. 우리는 적어도 명분상으로는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세상에서 ‘자유’는 더 이상 중요한 화두가 되지 못한다. 이미 자유는, 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진리’가 되었다. 자유는 확정되었고, 깊은 잠에 빠졌다.
밀의 <자유론>은 자유가 ‘살아있는 사상’이었던 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밀은 책에서 개인이 가진 자유를 규명함으로써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한계를 지정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 개인은 절대적 자유를 누려야 하며 자유의 기본 영역으로 내면적 의식, 기호 추구, 결사를 언급한다.

 
개인의 자유
그는 생각과 토론의 자유에서부터 담론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는 아무리 소수라고 하더라도 모든 인간은 다른 생각을 하고 이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 생각이 진리일 수 있다. 밀은 진리를 가장 중요시한다. 진리야 말로 진정한 ‘효용’이며, 진리를 취하기 위해 인간은 이성적 방향으로 진보해야만 한다. 따라서 소수를 침묵하게 하는 것은 그만큼 진리의 손실일 수 있다. 둘째, 새로운 생각 전체가 진리는 아니더라도 진리의 일부를 담고 있을 수도 있다. 이 경우 통념이 가진 진리와 새로운 생각의 진리를 함께 취해 서로를 보완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셋째, 기존의 생각이 맞고 새로운 생각이 틀리더라도 두 의견 간의 활발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 기존의 생각이 맞는 근거를 습득하고 지성을 단련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토론과 논쟁은 맞는 의견에 대한 근거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체득하게끔 하는 중요한 요소다. 사람들은 토론이 없는 이론에서 상투적인 것 이외의 것들을 잊어버리게 되며, 결국 인간 삶과 신념(또는 이론)을 연결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쇠퇴한 이론은 인간의 행동을 규율하지 못한다.
생각과 토론의 자유를 강조한 후 밀은 행동의 문제로 넘어간다. 밀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그에 따르는 모든 위험과 불확실성을 본인 스스로 책임지는 한, 각자 생각대로 행동하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개별성을 보전할 수 있다. 개별성은 우리 인류의 발전 가능성을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러나 현대(밀의 시대 : 19세기)에 와서는 계급의 붕괴와 교육 기회의 확대,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리고 여론의 영향력 증가로 획일화 되고 있으므로 개별성의 보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권한을 가진다. 일차적으로는 법의 규제가 필요하며, 법이 관여하지 못하는 부분에서는 여론의 힘을 빌려 정당하게 처벌할 수도 있다고 밀은 주장한다. 그러나 개인적 덕목을 배양하는 데 있어서는 (일정 교육시간 이후에는) 확신과 설득만이 가능한데, 이는 자기 자신이야 말로 자신에게 가장 큰 관심과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성숙한 인간에게 무언가를 강제하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며 온정주의적 접근 또한 거부한다.
 
 
모호한 경계
그러나 밀은 책 전반에서 권력과 자유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밀은 책의 앞부분에서 관습에 의해 행동하는 것에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4장에서는 다시금 "사람들이 숱하게 실험해보고 나서 나쁜 것으로 결론내린 것, 다시 말해 여러 차례 실험을 통해 어느 누구의 개별성에도 유익하지 않고 또 적합하지도 않다고 밝혀진 것에 대해서는 금지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관습’과 ‘적합하지 않다고 밝혀진 것’의 경계는 무엇인가?
또한 그는 “자유롭고 평등한 토론을 통해 진보를 이룩하는 시대”에나 자유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미개인들을 개명시킬 목적에서 그 목적을 실제 달성하는 데 적합한 수단을 쓴다면, 이런 사회에서는 독재가 정당한 통치 기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미개사회란 무엇이며,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사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명확한 경계 없이는 오히려 독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될 뿐이다.
결국 이러한 모호한 경계들은 밀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과도한 낙관론을 암시하는 듯하다. 밀은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의 세계에 갇혀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이 이성의 활용을 위해 자체적으로 그 경계를 지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개별성의 가치를 주장하면서도 인간이 이성을 이용하여 보편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모든 불확실한 문제에 대해 각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전적으로 존중하되,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이 용납하지 못하는 행동”은 존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강자와 약자의 억압관계
모호한 경계의 문제는 권력 개념과 결부되면 특히 심각해진다. 정의와 법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원리는 상황에 맞게, 취향에 맞게 소위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취향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취향일 수밖에 없다. 정의가 더 많은 ‘융통성’을 발휘할수록, 약자는 억압받고 강자는 힘을 얻는다.
밀은 다수의 횡포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다수의 횡포가 가능한 예외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놓는다. 전술했던 ‘미개인’들에 대해서, 그리고 ‘불유쾌한 취향’에 대해서는 독재와 혐오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러한 ‘예외들’의 규정이 모호하여, 결국 여론에 따라 누가 예외에 해당할 수 있는지가 정해지기 쉽다는 것이다. 이로써 약자들은 다수의 횡포를 받아 마땅한 이들이 된다. 밀이 이야기한 자유는 오로지 강자의 자유로써 자리매김한다. 밀의 의도가 어찌하였든, <자유론>은 약자에 대한 억압과 횡포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 쉬운 책이다.
모든 학자는 자신의 사상 내지 발언이 세상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대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소수자 담론이 익숙한 사람으로서 밀의 저작이 불편한 이유다.

 
여론의 전제
밀의 사상은 여러모로 현대 사회의 모습과 맞닿아 있지만, 그 중 특히 ‘여론의 전제’에 대한 언급은 생각해볼만 하다. 밀은 민주국가에서 발생하는 자유에 대한 압제를 세 가지로 유형화한다. 국민이 선출한 집권자가 국민의 의사에 반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국가의 의사결정이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그리고 여론과 사회분위기에 의한 압제의 경우가 그것이다. 이 중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마지막 경우, 즉 여론과 사회분위기에 의한 압제의 경우다. 오늘날의 매스미디어 발달은 여론의 압제를 훨씬 더 견고하고 심각한 문제로 만들어 놓았다. 매스 미디어는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동일한 내용의 동일한 매체에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이로써 사람들의 전체적 경향성과 선택들을 좌우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침묵의 나선 효과가 일어나면서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는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다수와 다르다는 것에 위축되어 침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여론은 미디어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도된다.
밀은 “우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 대해 품고 있는 유쾌하지 않은 우리의 기분을, 그 사람의 개별성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낼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디어의 발달로 그 기분이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생기면서 그 불유쾌함이 익명성이라는 가면을 쓰고 집적되어 유형의 무엇으로 당사자의 목을 조르게 됐다. ‘우리 자신의 개별성을 발휘하는 것’이 다른 이들의 개별성을 억압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현대에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이렇듯 증폭된 혐오를 감수해야 하는 일이며, 그 위험 속에 개별성의 표출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획일화에 ‘방향성’이 부여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진다. 아도르노와 호크하이머는 저작 <계몽의 변증법>에서 미디어 필요한 자본이 자본가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미디어에 반영되는 가치들은 부르주아들의 가치이며, 이로써 일반 대중은 ‘경제적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프롤레타리아는 정신적 생산수단조차도 소유하지 못해 부르주아의 정신세계에에 종속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미디어를 통해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미디어 매체는 자본 증식을 목표로 제작된다. 다시 말해 상업적이라는 이야기다. 따라서 자본가는 손실의 위험을 줄이기 위하여 이미 성공한 매체를 선택하여 재가공해 배포한다. 따라서 미디어 생산물들은 다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포장지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내용일 뿐이다. 결국 대중들의 ‘선택권’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아도르노는 지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밀의 경고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사람들을 아직 완벽하게 하나로 묶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개별성의 중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는 최적의 시기이다. (중략) 우리 삶이 획일적인 하나의 형태로 거의 굳어진 뒤에야 그것을 뒤집으려 하면, 그때는 불경이니 비도덕적이니, 심지어 자연에 반하는 괴물과도 같다는 등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잠시만 다양성과 벽을 쌓고 살아도 순식간에 그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밀이 한 경고는 21세기의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이미 다양성의 중요성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우리는 어떻게 개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떻게 그 개별성의 존중이 약자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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