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마음은 화장실, 삼천포, 팬클럽. 그대 노 저어 오오. 박민규 작가의 <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글 입력 2016.06.04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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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날이 있다. 점점 어디로 모르고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날, 뭐 하나 기본적인 것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글러먹은 내가 싫은 날, 여태까지 시간은 어디로 흘러갔는지 모든 것은 소용없던 것은 아닌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의심을 주체할 수 없는 날, 욕심은 많은데 의욕은 나지 않는 날, 머리로는 이 모든 과정을 이해하기에 지나가리라 하는데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좀처럼 붙잡을 수 없는 날. 작은 것에도 울컥 속이 상해버리고 마음 한 켠이 뻐근하게 찔러오는 날, 찡찡대기 싫어 혼자 멍하니 하늘을 보고 거울을 보며 의미없는 다짐을 해보는 날, 그럼에도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나 연락을 기다리게 되는 날. 살만한 것 같지만 잘 살고 있다고는 쉽게 말이 떨어지지 않는 날. 담배연기나 술 한 모금 같은 한숨이 기침처럼 들끓는 날. 아, 그리고 글도 더럽게 뻔하고 고리타분하게 써지는 날. 이 말마저도 언젠가 써본 것 같은 좌절감이 드는 날.
 
  지금 이 글을 쓰다가도 갑자기 한 단락씩 써놓은 글이 한 순간 지워져서 제자리로 돌아오곤 하는데, 화를 못내겠는게 지금 나도 제자리 걸음이다. 일은 시간이 갈 수록 늘리라 생각하지만 적응할 만하면 새로워지고 실수를 연발하는 게 제자리 걸음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아주 큰 사고는 치지 않은 정도랄까, 그마저도 마이너스는 되지 말자하며 긴장의 끈은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몸이 바쁘고 마음은 헤매고 있으니 누구를 만나는 것이 미안해서 잘 만나지 않곤 한다. 거짓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은데 너무 날 것의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또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인간관계야 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가끔은 이렇게 알고보면 휘청거리는 나를 붙잡아줄 존재가 있었으면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 어차피 나의 휘청거림은 내가 붙잡아야 하는 것이지만. 
 
  이제 두세달, 사람들의 모진 관심과 압박에 잠시 한 숨 돌렸나 했더니 옛 말 틀린 것이 하나 없다.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첫 단추를 잘 끼워야지 하고 대학을 입학하고 다시 또 사회의 첫단추를 잘 끼워야지 하고 취업을 하고, 잠시 한 숨 돌리려 하니 나에게 묻는 말이 그래 앞으로는 어쩔 셈이냐는 것이다. 요즘엔 평생 직장이 없다 하니 지금부터 퇴직을 염두에 두고 제2의 취업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취업을 했는데 벌써 재취업을 고민해야 한다니, 이런. 길가다 세번째 남자에게 청혼해도 당장 할까 말까 한 결혼준비라는 불특정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허리띠를 졸라 저축을 서둘러 해야 하며, 직장을 잡았으니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 중에 배우자를 골라야 한다며, 안부처럼 잘 되어가는 사람은 있는게 아니냐며 흔한 카톡 프로필 사진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해주는 사람들의 충고에 감사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말문을 잃곤 한다. 

  계속 뭘 아무 것도 안하겠다는 건 아닌데, 여태까지도 늘 열심히 해왔는데, 필요한 관심은 따로 있는데, 이런 식으로 관심주실 거면 여튼간 잠시만 쉴 틈을 주시는 건 어떨까요 하는 말이 목에 휘어감겨 와도 적당한 웃음으로 무마하곤 한다. 적당한 추문엔 적당히 넘어가고. 그게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한 연장선인지 그냥 재미난 주위사람 소식통을 업데이트하기 위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믿거나 말거나 어차피 들쑤셔봐야 좋을 것이 없는 것이다. 한 마디 말로 끝날 것이 5분짜리 연설이 될 수도 있다. 여튼간 말문을 잃게 만든다는 건 이렇게나 말이 많고 글을 길게 쓰는 사람에겐 꽤나 대단한 일이다.

  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되자는 말을 달고 살았다. 어차피 바꿀 수 없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적어도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에 있어서 부끄럽게 살지는 말자고. 지칠 때마다 오기로,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티는 순간이 너무나 많았다. 그깟 자존심이 뭐냐지만 그게 그랬다. 열심히 했더니 너무 열심히 하는게 문제라며 핀잔을 듣는 순간도 있었고, 대충하면 역시 그건 그것대로. 적당한 균형점을 찾는 게 평생 목표가 될 것처럼 어렵기만 하다. 여전히. 
  
  작년에 졸업과 취업을 하면서인지 여태까지 평생 버텨오던 오기라는 친구의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다. 영혼까지 끌어모은 오기였던가. 하기 싫은 것은 없지만, 늘 나의 이 어중간한 상태에 지친 걸지도 모른다. 대단한 사람으로 사는 것도 어렵고,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평범'한 삶이라는 것도 어렵고. 그냥 이런 생각을 하고 산다. 곧 다시 나에게 흥미를 주는 것이 있으면 다시 눈을 반짝이며 없던 의욕이 몰아 생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괜히 다시 뭘 해보려 발버둥치다 진흙뻘 속에 진득하게 빠져들까봐 가만히 있어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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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순간에 이 책을 읽었다. 박민규 작가의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뭐 이런 귀여운 제목이 있을까 했다. 졸업 겸 취업 선물로 받았는데 한두장 읽어보다가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다가 뜬금없이 꺼내들었다. 출근길에 읽고 주말에 잠깐 읽으니 금방 마지막 장이어서 아쉬웠을 만큼, 좋았다. 좋다는 말도 상대적이지만 지금 내게 딱 필요해서 좋았다. 말많은 문체도 좋고, 시니컬한 말투도 좋고, 비꼬는 듯한 유머도 좋고. 일부 표절이라는 의혹에 솔직하게 인정하는게 시원해서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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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사람들은 이 책의 메세지가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야구팬의 보살이라는 한화팬이 있다면 삼미슈퍼스타즈의 팬들은 성불하신 부처님이랄까. 삼미슈퍼스타즈는 '치지 않는 공, 달리지 않는 달리기'로 남다른 야구를 보여주었으니까. 프로가 되기 위해서 반쯤 미친 정도의 노력과 실력, 경쟁이 필요하다면 그런 프로의 세계에서 평범하게 했을 뿐이라 꼴찌가 되었다는 그 삼미슈퍼스타즈. 야구를 잘 모르는 나는 궤변같지만 뼈가 있는 이 주장에 괜히 탑승하고 싶어졌다. 사실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해도 좋은 것 아니겠나. 인생은 삼천포에 있으니 삼천포에 빠져 쉬어가는 게 좋고, 9회말 2아웃 인 상황이 어쩌면 나쁜게 아닐 수도 있다는 메세지가 나도 좋다. 

  죽을 것 같고 죽는게 나은 것 같아도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사실 밑바닥은 나날이 갱신되기 마련이다. 더불어 기쁨의 피크도 갱신되고. 어차피 시간의 속도는 누구에게나 같고, 누구에게 빠른 듯하다고 해서 나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은 아니니 내 마음의 시계만 불특정하게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느려질 뿐인 것임을 다시 알려주어서 고맙기도 했다. 소속이라는 보편적인 완장에 도박처럼 빠지지 말고 그래 좀 쉬엄쉬엄 하면 어떠랴. 역사에 한 획을 긋지 못하면 어떠랴, 주변 사람들에 비해 좀 허접하고 꿀리고 찌질한 듯 하면 어떠랴. 나는 여전히 마음 속으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엔 이 만하면 잘 살았다라고 말하고 갈 것이란 밑도 끝도 없는 확신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나는 요즘 밑도 끝도 없는 내 편이 필요했던 것이었나보다. 너라면 뭘 해도 잘할거야라는 말보다 같이 망해도 보고 한량처럼 살아보자고 킬킬거릴 내 편이.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친구 조성훈이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내가 이 책이 좋았던 건 다른 것 때문이었다. 책 속의 '나', 그가 지고지순하게 만년꼴찌인 삼미슈퍼스타즈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가 엄청난 노력으로 일류대가 들어가 회사생활하며 이런저런 고생하다가 다시 행복해져서가 아니라, 그가 사람을 대한 그 마음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아주 사랑한 그녀를 대한 마음. 첫 만남부터 길거리에서 소변을 보다가 그 상태로 뻗고, 2번의 구토를 한 적나라함과 3명의 애인과 7명의 섹스 파트너를 지닌 사실을 알려준 그녀. 그녀가 사실 적나라하지 않았고 몇 명이 애인이 있었고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는 상관이 없다. 



그 무렵 나는, 그녀가 나를 찾아오는 이유가 '상처'를 견디지 못해서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그것이 어떤 이유의 어떤 상처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 상처가 쓰릴 때마다 나를 찾아오는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내가 할 일은-그녀가 문을 걸어 잠그고 마음 놓고 울거나 마음 놓고 소변을 보거나 언제든지 2번의 구토를 할 수 있는 깨끗한 화장실이 되어주는 것. 비록 변기의 디자인과 인테리어가 촌스럽다 해도 결코 칸막이로 2개의 화장실을 나눈다거나, 여러 사람이 공용으로 쓰는 것이 아닌, 넓고, 아무도 없고, 언제나 깨끗한 그녀의 화장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더니' pp.175-176



  만약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된다면(아마 그렇겠지만),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 같은 인생 명언같은 글귀나 쉬지 않을수록 쉬는법이 없을수록 쉴 줄 모를수록 훌륭히, 잘 컸다는 얘기를 듣는 완벽하고, 멋진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에 대한 생각이 아니라, 저 말 때문일 것 같다.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만 더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느낌, 지쳐버린 느낌, 쉬어가야 한다는 느낌, 토닥이는 느낌, 변화가 필요하다는 느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원해서든 원하지 않아서든 우리는 아마 쉬어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정이나 상처가 있다고 언제나 깨끗한 나만의 화장실같은 존재가 되어주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순간 그녀가 무척 부러웠고, 이런 생각을 하는 그가 닮고 싶어졌다. 내가 내 나름의 이유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무도 날  제대로 이해해주지 않는다며 한숨을 담아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며 나도 그에게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민망해도 저만큼 넓거나하지는 못해도 상처를 쓸어내리는 화장실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게 한, 그런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러면 인간관계 자체가 아무리 거지같네 관태기(관계의 권태기)니 해도 한결 낫지 않은가 하면서.

  아무것도 바뀐 건 없는 것 같은데, 내 마음이 달라진 걸 보면, 결국 다 마음의 탓인가보다. 혼자 슬프고 가라앉고 화났다 다시 세상은 살만하다 다시 살아봐야지 하는 걸 보면. 머리로는 다 이미 이해하는 감사한 조언과 관심, 혹은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릴 가벼운 사건들, 이러저러한 두려움, 볼멘소리와 더불어 지쳤다는 느낌이 들 때. 일단 한동안 내 마음의 깨끗하고 넓은 화장실이자, 잠시 일부러라도 퐁당 빠져서 내 인생을 찾고 싶은 삼천포이자, 각종 종교지도자들처럼 하해와 같이 넓은 마음을 지닌 지원군이자 팬클럽이 될 것 같은 <삼미슈퍼스타즈의 팬클럽>. 감사하다, 참.


- 이 글은 문화의 '소통'을 강조하는 ART insight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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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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