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재연, 삼연, 사연…N연을 보는 이유 [공연예술]

글 입력 2016.05.22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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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연, 삼연, 사연…
N연을 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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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셀 수 없이 수많은 공연들이 무대에 오릅니다. '오늘'만 해도 수많은 곳에서 많은 공연들이 막을 열고, 또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공연들 중, 조금쯤은 특별한 공연들이 있습니다. 바로 재연, 삼연, 사연으로 이어지는 N연들입니다. 수많은 공연들이 오르고 내리는 치열한 경쟁의 장에서 살아남은. 두 번, 세 번째로 올려지는 '같은 공연'들. 저는 좋았던 공연의 경우는 어지간하면 재연, 삼연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입니다. 제 시간도 금전적인 여유도 한정되어있기에 재·삼연을 보면 그만큼 다른 공연들을 못보게 된다는 리스크가 있지만 저는 이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꼭 챙겨보는 편인데요. 주변에서는 그런 저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N연을 보러간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대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본걸 왜 또 봐?"

 정말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게 묻던 엄마, 동생, 친구들…. 하지만 저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도 주눅 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일단 N연은 결코 ‘본 걸’ ‘또’ 보는 행위가 아닌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개인적인 취미 활동 영역은 ‘남’의 시선에서 판단 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기도 했지만…이건 절대로 '잘못' 된 것도, '이상'한 것도, ‘낭비’도 아니며 차라리 생산적인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그 이유를 설명했었는데요. 그만큼 N연을 보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재연, 삼연, 사연··즉, ·N연을 보는 이유입니다.



그리움, 그리고 추억.


 일단 첫 번째로 N연을 보는 이유는, '그리움', ‘추억’ 때문입니다. 진부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텐데요. 저는 '공연'에 있어서는 '그리움'과 ‘추억’은 참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확실한 기록물이 남아있는 영화, 드라마와 달리 '공연 예술'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연을 보고 남는 것은 티켓 한 장과, 공연을 볼 때의 그 '기억' 밖에 없습니다. 심지어 그 '기억'이란 것도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져가죠. 결국 공연을 보고나서 관객이 '손에 쥘 수 있게' 남는 무언가는, 단순히 '그 공연을 봤다'는 증거에 불과한 티켓 한 장 뿐입니다. 공연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정말로 좋았던 공연조차도 잊혀가는 그 안타까움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지나간 공연은 잊혀져가며 그립고 또 그립기만 할 따름입니다.

그리움
 그런데 N연은 이러한 ‘그리움’을 충족시켜줍니다. 그리웠던 공연을 다시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까요? 연출이나 캐스트가 바뀌었더라도 어쨌든 같은 스토리 라인-넘버를 따르는 공연이기에 과거 공연에 대한 그리움을 어느 정도는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추억
 또 N연은 그 ‘공연’ 그 자체뿐만 아니라 과거 그 공연을 봤을 당시의 추억을 되살려줍니다. N연이 과거 공연에 대한 기억의 열쇠가, 또 과거 공연 기억이 추억의 열쇠가 되어서 잊고 있던 장면들, 그때의 감상들, 혹은 그때 그 시절까지도 떠오르게 한다고 할까요. 저만해도 올해 뮤지컬 ‘살리에르’ 재연을 보면서, 재연은 2~3월 즉 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연이 올라왔던 7~8월 그 당시 장마철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으니 말입니다. N연을 봄으로써 그리웠던 ‘공연’뿐 아니라 그 ‘시절’ 속으로 빠져 그에 젖어있을 수 있게 되는 거죠. 결국 N연을 통해 ‘공연’뿐 아니라 ‘추억’까지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과거, 그리고 이해.


 두 번째로 N연을 보는 이유는 공연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서입니다. 더러 완벽하게 그대로 가져오는 공연도 있지만, 대부분의 N연은 배우·연출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 심한 경우 넘버를 추가하거나 빼는 등의 큰 변화를 갖습니다. 즉 각 N연은 ‘같은 공연’이지만 ‘다른 공연’인 것입니다. 그래서 뮤지컬 팬들 사이에선 같은 공연이라도 ~차, 혹은 ~연 공연이 제일 좋았다며 같은 공연도 N연에 따라 나누기도 하는데요. 사실 이렇게 매 연마다 변하기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합니다. 좋아하던 연출이 바뀌었다던가, 좋아하던 넘버가 빠지는 등의 변화가 그러합니다. 이러한 아쉬움이 심한 경우, 과거 공연에서 기대했던 바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그와 다른 양식으로 가는 현재의 공연에는 전혀 집중을 전혀 못하고 비교만 하게 되기도 합니다.

'현재'를 통한 이해
 하지만 N연은 이러한 아쉬움을 뛰어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연출에 의해, 혹은 다른 배우에 의해 다르게 표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공연은 그 공연이기 때문입니다. 파리넬리로 예를 들면, 재연 파리넬리가 초연과 많이 달라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재연 파리넬리도 ‘파리넬리’라는 공연이기에 기본적인 골자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달라진 부분’을 보고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 배우·연출은 이렇게 표현했구나, 이렇게도 표현 할 수 있구나, 하면서 모든 감상이 몇 연인지를 뛰어넘어 ‘그 공연’ 자체로 귀결되게 됩니다. 즉, 과거의 어떤 배우나 연출의 표현력에 갇혀있던 그 공연에 대한 이해도가 현재를 통해 보다 확장되어 ‘공연’ 자체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통한 보다 깊은이해
 또한 앞서 언급했듯 N연을 보면 자연스레 과거 공연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렇기에 N연의 꽤 많은 장면에서 현재의 공연과 과거의 공연을 겹쳐보게 되는데요. 이러한 겹쳐보기는 ‘비교’로 귀결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두 배의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현재의 연출·표현과 과거의 것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 예시로 뮤지컬 파리넬리를 들 수 있습니다. 뮤지컬 ‘파리넬리’의 초연에서는 강한 역광에서 어린 파리넬리와 어른 파리넬리가 서로 마주치듯 지나가는 연출로 ‘파리넬리’의 성장을 알리는데요. 재연에서는 어른 파리넬리가 등장하는 것만으로 성장을 알립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그 둘이 마주치듯 지나가는 장면을 함께 떠올릴 수 있기에 그 장면에서 받는 감동이 더 컸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기에 가능한 '이해'
 게다가 N연은 공연 스토리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역할 또한 하는데요. N연을 거듭함에 따라 종종 축소되거나, 혹은 확대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처음 공연을 보면 축소 된 장면에 대해서 더 깊은 이해를 하기 힘들지만, 거듭해서 N연을 본 경우에는 비록 어떤 차수에서는 어떠한 장면이 축소되더라도 과거 공연에서 더 풀어서 설명해준 장면을 알고 있기에 그 공연 전체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즉, N연을 거듭해서 보다보면 각 연마다 ‘축소’된 부분에 대해서 더욱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N연을 보는 것은 그 ‘공연’ 자체를 머릿속에 지도화 해두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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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2014 살리에르, 우 2016 살리에르. 확연히 성장한 뮤지컬.



공연, 관객, 그리고 성장.


마지막으로 N연을 보는 이유는 ‘성장’입니다. 라이센스판의 경우 덜하지만, 창작뮤지컬의 경우 초연은 어딘지 어리숙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프리뷰’기간을 갖고, 그 사이 피드백을 받아서 약간 수정하기도 하죠. 수없이 공연되고 검증된 라이센스판과 달리 창작뮤지컬은 정말 ‘처음’ 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초연은 라이센스판에 비해 미숙함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연을 거듭하며 조금씩 수정되어가다 보면 이러한 미숙함 또한 점점 사라져가게 되는데요. 이러한 미숙함이 사라져가는 과정은 관객에게 일종의 ‘희열’을 느끼게 합니다. 

성장 그 자체에 따른 희열
 이러한 ‘희열’을 느끼는 표면적인 이유는 공연이 발전했기 때문입니다. N연을 봤단 건 기본적으로 그 공연에 대한 애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새 큰 사촌동생을 보면서 미묘한 감회에 휩싸이듯이, 애정을 가지던 공연이 발전한 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초반의 모습을 알고 있기에, 공연의 발전한 모습이 더욱 도드라져보여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만들어간' 성장에 따른 희열
 하지만 이것은 단지 표면적인 이유일 뿐, 그 ‘희열’의 기반에는 공연을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감각이 있습니다. ‘발전’ 및 ‘성장’은 여러 방향으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수많은 피드백을 수용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관객들의 후기나 피드백이 공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관객이 그 ‘성장’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N연차를 보며 공연이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지켜봤음은 물론, 그 자신의 후기나 피드백이 적용되어 바뀌어 나감으로써 공연이 ‘성장’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관객은 제작진과 함께 공연을 만들어 나갔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장한 공연을 보면 마치 자신의 작품을 보듯 미묘한 뿌듯함까지도 함께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자신이 만들어간 공연에 무한한 애정을 품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을까요? 그렇기에 N연차를 보는 관객은 그러한 일종한 ‘콩깍지’로 그 공연에서 더욱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이 감동은 다시금 그 공연을 사랑하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구요. 이 순환 속에서, 관객들은 결국 그 다음 N연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공연과 나, 그리고 '함께 성장'
 보통 N연을 1년에서 2년정도 약간의 시간을 가지고 올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초연, 재연, 삼연까지 보게 된다면 적어도 3~5년 정도의 세월을 그 공연과 함께해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초연 가까이의, 미숙한 공연이 올아왔을 때와 N연차가 올라왔을 때의 관객은 달라진 공연의 모습만큼이나 많이 달라져있을 것입니다. 공연 관람의 주요 계층이 2~30대 여성들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아무래도 그 ‘달라짐’은 ‘성장’이라 말할 수도 있겠죠. 즉, 관객과 공연이 ‘함께’ 성장해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N연차를 보는 관객은 함께 성장해 온 공연에 대해서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됩니다. 

게다가 관객과 공연이 '함께 성장'해왔기에 관객은 N연차를 보며 스스로를 돌아볼 기회를 얻을 수도 있는데요. 기본적으로 같은 공연이라도 나이대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그 공연에 대한 감상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우스갯소리로 ' 둘리에서 고길동이 불쌍해지면 어른이 된거다'라고 하는데요. 이것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관객’이 그 공연에 대해서 느끼는 바도 분명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겠죠. 함께 성장해왔다는 '동질감'은 이 '달라짐'이 스스로에게 연결되게 만드는데요. 이 공연 많이 컸구나,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서까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관객은 '달라짐 감상'을 통해 '달라진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데요. 저 또한 N연차를 보며 과거에는 마냥 밉기만 했던 악역이 이해가 가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제가 여러 경험을 통해서 인물에 대한 공감의 전보다폭이 많이 넓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요. 즉, N연차를 보는 관객은 과거 자신이 느꼈던 감상과 현재의 감상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다시 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공연'이, 결국 '스스로'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론적으로 N연은, N연을 보는 것은
과거 사랑했던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시키고 향수를 불러일키며.
소중했던 추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줌과 동시에.
여러차원에서 공연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궁극적으로 공연과 '함께' 성장해 온 스스로에 대해서 다시금 반추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구요? 글쎄요. 누군가에게는 '과장'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 과정을 겪고있는 제겐 이건 절대로 과장이 아닙니다. 저는  N연차를 보며 과거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됐고, 공연을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게 됐으며. 공연과 '함께' 성장해갸며 많이 성장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으니 말이죠. 

만약, 이것이 아직도 '과장'이라고 느껴지시는 분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공연 하나를 잡아서, N연을 함께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권희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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