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연극 그리워 그리워, 그리움만 있었다

글 입력 2016.05.1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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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워, 그리워. 머릿 속으로 오물오물 곱씹어보았다. 설렘과 기대보다는 약간의 걱정과 초조함이 앞섰다. 그리움. 묘하게 낯선 단어였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 그리고 사람들의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 하지만 영화나 연극을 볼 때마다 그런 의문이 든다. 내가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교류와 관계의 표현을 과연 모두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오히려 이해와 몰이해가 공존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머리로는 안다. 다만 마주하게 될 무대를 앞두곤 재차 조바심을 내버리는 것이다. 욕심을 낸다.

   돌이켜보니 그리움이라는 것은 특히 그랬다. 그 깊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 걱정한다는 것은 단 한 톨의 감정이라도 흘리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움에서 오는 묵직함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만큼 소중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람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을 통해 낳을 수 있는 것들엔 무엇이 있을런지. 사람을 절망에 몰아넣기도, 기쁨에 빠져들게도 하는 그리움. 이 마음은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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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인공인 남자가 새 집으로 이사하며 막이 오른다. 남자는 새 집에서 아내와 딸과의 추억을 곱씹는다. 아내가 사용했던 첼로, 예쁜 미소가 담긴 딸의 사진. 매일같이 아내와 딸의 흔적을 마주하고 추억하고 대화하며, 그는 현재에 사는 만큼 과거에서도 산다. 남자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흐르며 그 속에서 삶과 죽음, 관계, 가족의 의미가 복합적으로 얽혀 올라온다. 하지만 그 일상 속에 갑자기 작은 풍파가 닥친다. 손녀의 결혼식에 잔뜩 들떠있던 그에게 결혼식에 참여하지 말라는 통보가 온 것. 사위의 일방적인 통보에 화가 난 그는 결국 결혼식에 가고, 거기서 잠시 잊고 지내던 한 여인을 마주친다. 스치듯 보았을 뿐이지만 그 만남은 남자의 기억 속에 묻혀있던 외도의 일을 상기시키게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사위가 보낸 아내의 유품이 남자에게 도착하고, 그제야 가족 모두의 감정과 기억, 진실이 퍼즐처럼 맞춰지기 시작한다.

   남자는 모를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내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외도를. 일기장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남편의 비밀을 알았을 때의 분노, 좌절, 절망, 그리고 이어지는 체념, 슬픔, 괴로움……. 동시에 현실의 남편은 아내가 숨겨온 자신의 비밀을 확인하며 충격에 휩싸인다. 자신과 함께한 시간동안 어떤 생각과 어떤 감정을 하고 있었을지 짐작하며 괴로워한다. 딸의 죽음에 남자의 책임이 있었다는 또다른 비밀이 밝혀지면서, 일기장의 마지막은 아내가 이런 남편의 모습까지 동정하고 용서하며 끝이 난다. 시간 속에 묻혀있던 모든 진실을 확인한 남자. 남자는 평생 그리움을 안고 가겠다고, 오직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겠다고 읊조린다. 그렇게 막이 내린다.

   연극이 마치고 가만히 벙 쪄 있었던 것 같다. 이것으로 정말 연극이 끝난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좀 더 뒤에 내용이 이어질거라 생각했는데 무대 위에 남자의 감정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기분이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후반부에 이르러 스토리가 비교적 급하게 진행되었던 것 같다.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어 좋았지만 이에 관하여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지는 못한 것 같아 아쉬웠고, 진행 과정과 주제를 전달하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느껴졌다.



   연극은 지속적으로 가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해나간다. 일상의 여러 모습 속에서 가족의 의미를 찾는다. 남자는 집에서 지내는 동안 수많은 기억의 단서를 마주한다. 지금 그의 곁에는 아내도, 딸도 없지만 그 흔적은 마치 문신처럼 공기 중을 떠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한 개인의 삶 곳곳에 그 흔적을 묻혀둔다. 그 존재가 너무도 당연해서 오히려 소중함을 깨닫기 참 어렵다. 남자는 계속 추억하고, 동시에 후회한다. 연극은 남자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반추해보면서 또한 그 관계를 이어가는 요소를 생각해보게 한다. 그것은 바로 대화이다.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대화. 남자는 시종일관 아내와 딸에게 대화를 던지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다. 모르는 것, 궁금한 게 있더라도 그 답을 들을 수 없다. 아무리 당연한 관계라 한들 그 사이를 이어가기 위해선 대화가 필요하다.

   마지막에 이르러 모든 진실과 감정이 한 접점을 향해 모인다. 그 접점 위에 선 남자는 그리움의 정의를 말한다. 그리움이란 슬픔이고, 아쉬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라는 말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리움이 무엇인지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이 그리움이라는 단어 안에 충분한 감정이 녹아들어있는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다. 스토리의 전반부는 아내와 딸에 대한 추억을 서술하는 데에 대부분을 사용한다. 상황에 대한 나열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고, 이 추억은 후반부의 진실과 얽히면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라 다소 외면하고 싶은 기억들로 변질된다. 이 과정에 있어 남자의 혼란스러운 감정과 마음이 잘 갈무리되지 않은 채 이상적인 마무리를 지어버린다. 단순히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묶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해석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조금 불충분했다. 이와 더불어 외도의 심층적인 이유, 가족에 대한 그의 생각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감정의 묘사는 충분했지만 논리 없는 서술에 그친 것 같았다. 과거의 일들-외도 등-과 현재 남자의 감정-순수한 그리움-이 지나치게 분절되어 오히려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실, 다르게 보면 그게 현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든다. 인간은 제 편한 대로 기억을 조작하는 존재다.

   그래서 전체적인 주제가 잘 와닿지는 않았다. 포스터에 나와있는 내용이 전부였다. 관객으로 하여금 더 큰 이해와 감동을 향해 이끄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는 그저 무대 위에 머물러 있었다. 아마 모노드라마 형식인 점이, 그리고 이야기의 축이 되는 큰 사건들은 이미 과거에서 종결되어버린 점이 전달력의 한계를 만든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모노드라마의 특성일지도 모르지만, 한 인물이 혼자 깨닫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의 연속은 다소 단편적이었다. 그렇지만 오히려 회고와 독백이 주가 되어 진행될 때, 한 개인에 포커스가 맞춰지므로 좀 더 다양한 생각과 감정이 표현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히려 주인공은 전체 플롯에 맞추어 기억과 감정이 배치된 양, 이따금씩 기계적으로 회고하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또한 작 중 진행의 특성상 남자는 다른 캐릭터와 상호작용을 하기 어려우며 또한 새로운 감정과 사건을 맡기 어렵다.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무대 위 홀로 과거를 되짚을 뿐이다. 그래서 가족간의 이해와 사랑에 도달한다기엔 그저 이미 끝난 이야기를 들춰보는 느낌이 강했다. 이 분절성은 긴 서사의 끝에 해결이 아닌 의문을 남게 했다.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전하고자 하는 의미는 미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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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과 표현 면에서 깊이있게 다루어지지 못해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무대 구성 방식이나 연출 방식은 정말 좋았다. 주인공의 동선을 고려한 깔끔한 무대 배치와 주인공의 집 안을 꾸미는 가구는 설정에 맞도록 섬세하게 선택된 것이 보였다. 특히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무대 위 내용을 음악과 조명, 혹은 빈 무대 그 자체로 표현한 점이 인상깊다. 주인공의 대사와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들을 서사적 공백과 그 위를 채우는 음악, 조명, 나아가 관객의 시선을 통해 재해석할 수 있도록 둔 점이 좋았다. 빈 무대와 빈 장면을 보며 머릿속으로 각자의 나레이션을 울린다. 3차원인 무대 위에 소설적인 전개방식이 적용된 듯 하여 흥미로웠다. 또한 다른 등장인물들은 목소리를 통해 무대 위에 등장했는데, 그 중 아내 역 배우님이 일기장을 읽는 목소리가 마음을 사무치게 했다. 애환의 감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 연기. 하지만 지나치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다.

   그리워, 그리워. 어쩌면 이 연극이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까닭은 삶과,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감정에 대한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절절하게 그립고 싶지만 현실은 때때로 단편적이고 건조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더욱 무대 위에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조금 아쉬움이 남는 연극이었지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궁극적으로, 살면서 자칫 잊기 쉬운 가치들을 다시 마음에 새기게 한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과거를 그리워하기 이전에 현재를 그리워해본다. 그리고 또 그렇게, 앞으로도 사랑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간절하게 바라본다. 그렇게 우리는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신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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