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물들의 유토피아 : 주(Zoo)-토피아 [시각예술]

그 안에 숨어있는 소수자 담론
글 입력 2016.04.23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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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의 유토피아 : 주(Zoo)-토피아
그 안에 숨어있는 소수자 담론



 요새 난 여우 한 마리를 ‘덕질’중이다. 복슬복슬한 꼬리와 나른한 눈매, 섹시한 목소리가 생각날 때면 자꾸만 누가 가슴에 달린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처럼 마음이 덜컥덜컥 한다. 하다하다 인간도 아닌 것에 홀릴 줄은 몰랐다며 한숨을 뱉다가도 팬아트만 보면 좋아서 초음파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만은 아닌가 보다. SNS만 켜면 그놈의 여우가 여기 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나고, 그 밑에는 하트 섞인 댓글들이 줄줄이 달린다. 저처럼 귀여운 토끼 한 마리도 데리고서 가슴 떨리게 꽁냥질을 해댄다. 바로 주토피아의 닉과 주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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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심쿵사 


그러나 이들의 복슬복슬한 달달함 속에는 억압과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숨어 있다. 주토피아는 수십 종의 동물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는 사회다. 모두가 평등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신화 위에 건설된 동물들의 유토피아, 즉 주(zoo)-토피아다. 실제로 주토피아의 면면에는 각 동물들을 배려한 모습이 눈에 띈다. 기차에는 각 동물 크기별로 다양한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고 음료를 파는 작은 노점상들에는 키가 큰 손님들을 위한 음료 전용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토끼들은 ‘당근농장을 하는 게 분수에 맞다’는 잔소리를 들어가며 크고, 여우들은 ‘어떻게 여우 말을 믿냐’는 눈총을 받는 사회이기도 하다. 이러한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다른 이들의 두 배, 세 배의 노력을 해 결국 경찰관이 된 주디는 주차 딱지만 떼다가 경찰관 배지를 내놓아야 할 위기에 처한다. 난공불락의 사건을 해결해 언론을 탄 후에야 주디는 진정한 경찰으로 존중받는다.


PREDATOR - PREY : 다수의 소수자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단순한 ‘시련을 딛고 성공한 주인공’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토피아는 그 보다는 훨씬 더 심층적으로 억압에 대한 담론을 담아내는 영화다. 주토피아는 predator(포식자)과 prey(피식자)의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사회다. 주토피아의 시장 라이언하트는 predator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사자다. 그는 전시용 평등을 위해 양인 벨웨더를 비서로 임명하지만 중요한 일을 맡기기는커녕 매일 핍박하고 무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소수자라고 칭할 수 있는 prey가 사실 주토피아 구성원의 9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소수자들은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비소수자인들의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만이 주체로서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같은 소수의 소수자들은 자신들이 겪는 차별과 부당함을 미디어와 캠페인을 통해 비소수자들에게 알리려고 노력한다. 그리하여 일반대중에게 이들이 겪는 어려움이 부당하다는 것이 공감되었을 때, 이들은 비로소 억압 철폐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반면 주토피아의 prey와 같은 다수의 소수자들은 이러한 설득 과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들끼리의 연대만으로 권리를 쟁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수의 소수자들에게는 집단 내의 연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문제는 이러한 연대가 타자화와 적대화를 통해 강력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비소수자들, 즉 기득권 세력을 ‘적’이라 명명하고 이들과 대립하면서 소수자 집단의 정체성이 명확해지는 것이다.

주토피아는 타자화를 통한 연대가 어떠한 사회를 가져오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벨 웨더는 prey들이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연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등장인물이다. 그는 영화 내내 “작은 동물끼리 도와야 한다”며 주디에게 호의를 베풀고, 끝내는 predator들을 야수화함으로써 prey들을 하나로 단결하고자 한다. predator들이 정신을 잃고 prey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권력관계는 전복된다. predator가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prey들은 똘똘 뭉쳐 시위를 시작하고, predator들은 요직에서 쫓겨나기 시작한다. 단순히 predator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들은 ‘예비 범죄자’로 취급되고, 좌천당하며 힐난하는 눈초리를 받는다. 주토피아는 이렇듯 소수자 연대의 동력이 타자화가 되었을 때 그 연대가 어떻게 새로운 폭력을 양산하는지 보여준다. 타자화를 통한 연대는 억압의 방향을 바꿀지언정 억압을 없애지는 못한다.

약자와 강자는 고정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다. 권력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부유하는 개념이며, 언제든지 그 대상은 바뀔 수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더 좋은 사회’란 더 많은 사람들이 강자인 사회가 아니라, 자신을 ‘약자’라고 느끼는 사람이 없는 사회다. 수저론이 금수저들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며, 페미니즘이 남혐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강자가 될 수 있다. 소수자 담론은 따라서 소수를 위한 담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담론이 되어야 한다.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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