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생각의 그림 • 그림의 생각 [아트스페이스 풀]

글 입력 2016.03.3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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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그림 • 그림의 생각
-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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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그림 • 그림의 생각
-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 -


일자 : 2016년 3월 17일(목) ~ 4월 24일(일) 

시간 : 10:00 ~ 18:00 (월요일 휴관) 

장소 : 아트스페이스 풀

티켓가격 : 무료

주최 : 아트스페이스 풀




문의 : 02.396.4805





<상세정보>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에서 저 멀리 이상한 풍경을 보고 있자니,
앗, 삶이 떠내려가네, 하지만 달빛이 우리를 구원하시겠지
 
황세준(화가)

 
제목:
이 전시의 제목은 아시다시피 “생각의 그림, 그림의 생각”이다.

생각의 그림, 이라. 이 말에서 작가의 자부와 착잡이 느껴진다. 그 자부는 물론, 생각을 하고 산다는 데 있지는 않다. 생각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은 없을 테니. 그의 자부는 나는 이 세계의 문제에 언제나 성실하게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는 데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은 이 기괴한 세상, 특히 통칭 ‘대한민국’이라고 불리는 국가에서 벌어졌고, 벌어지고 있는 목불인견의 사태에 대한 질문이자,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고 온 몸으로 캔버스 위에 비벼댄 답변이다. 그가 꿈꾸는 세계에 대한 전망이고. 김정헌의 그림은 공, 적이다. 공公적이고 공共적이다. 그러니까 그의 그림은 공공의 의제가 어떻게 개인-한 작가에 의해 개별적 육체를 얻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그림은 대체로 이 과제-실험에 성공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어떤 아쉬움이 남을 수 있다. 사회적 제 문제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개인적 도취에, 예술적, 예술가적 황홀에 몰두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그림, 이라는 명명에서 느껴지는 착잡함이다.
 
그림의 생각, 은 수많은 갈래일 거다. 보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은 생각들이 그림이 제시한 이미지를 따라 이 세계의 정면과 이면을 들여다보고, 다시 자신과 자신의 삶과 자신의 문제에 도착한다. 그림을 본다는 것, 혹은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사실 ‘다른 사람’ 되기이다. 어떤 이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매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그 모든 다른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림의 생각이 우리를 이끌어 주는 건 그런 역동적 체험이고 그런 역동성 속의 자기 해방이다. 그걸 위해 그림은(도) 깊이 생각을 하는 것이다.
 
딸린 제목:
전시의 부제는 “불편한, 불온한, 불후의, 불륜의, ...그냥 명작전”이다. 생각해 보면,
 
불편한-김정헌의 그림은, 그렇다, 불편하다. 아주 초기의 몇 작품이 그나마 좀 덜 불편하지만 그 후의 작업은 내내 불편하다. 예를 들어 모네가 햇빛 가득한 둔덕에 양산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을 그린 그림을 볼 때 (인상파 회화에 중독된 보편적인)우리는 얼마나 편안한가. 그의 그림에는 그런 안락安樂은 없다. 그는 억압적인 권력에 분노하고 자본의 탐욕을 질타하며 고장난 제도를 비판한다. 우리는 그걸 ‘비판적 리얼리즘’이라 불렀었다. 그는 그 비판적 리얼리즘의 선발주자 중 하나다. 그러니 그의 그림이 불편할 밖에. 거기에는 그러나 세계에 대해 고민하고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꿈꿔 볼, 그런 황홀은 있다.
 
불온한-불온한, 하면 생각나는 김수영 시인은 이렇게 썼다.
 
「시 「잠꼬대」*를 쓰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썼는데, 현경한테 보이니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한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인데, 세상의 오해여부는 고사하고, <<現代文學>>지에서 받아줄는지가 의문이다. 거기다가 거기다가 趙芝薰도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가?
*이 작품의 최초의 제목은 「00000」. 詩集으로 내놓을 때는 이 제목으로 하고 싶다.」日記抄-(II) 1960. 10. 6
「시 「잠꼬대」를 《自由文學》에서 달란다. 「잠꼬대」라고 제목을 고친 것만 해도 타협인데, 본문의
〈×××××〉를 〈×××××〉로(한글로-편집자주) 하자고 한다.
집에 와서 생각하니 고치기 싫다. 더 이상 타협하기 싫다.
허지만 정 안되면 할 수 없지. 〈 〉부분만 언문으로 바꾸기로 하지.
후일 시집에다 온전하게 내놓기로 기약하고.
한국의 언론자유? God damn이다!」 日記抄-(II) 1960. 10. 18
 
이 <00000>은 시인 사후 40년이 지난 200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궁금하신 분은 찾아보시라.)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테러방지법이라는 괴怪법이자 궤詭법이 제정되는 걸 목도했다. 김정헌의 그림은 피지배계층의 시점에서 세계에 항의한다. 위 시인의 불온함에 감염된 그림. 당연히 불온하다.
 
불후의-사전적으로 ‘불후’는 썩지 아니함, 이다. 실제로 루부르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는 썩지 않을 것 같다. 공간적 방부처리를 해 놨으니. 하여간 명작, 그러면 벌벌들 떤다. 그림이 ‘한 알의 밀알’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슬쩍 흔들어 놓고 그의 정신 속에 새로운 싹을 틔워야 한다. 그리고 사라진다. 그것이 명작-물건으로 군림하는 순간 감응의 대상이 경배의 대상이 된다, 물신화. 마음속에 들어왔다가 사라지기. 그것이 불후의 그림이다.
 
불륜의-불륜을 천륜을 어긴, 의 뜻으로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에로스다. 그림은, 그림이라는 것 자체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것이다. 관계없는 그림은 없다. (물론 관계없다고 우기는 그림-비슷한 것들이 있기는 있다.) 김정헌의 그림도 예외일 수는 없다. 사람이 가진 기운 중 가장 무시무시한 에너지를 가진 이것 앞에서는 불륜도 천륜이다.
 
…-그 외에도 아닐 부不, 자 붙은 무수한 말들이 있다. 불패의, 부재의, 부정의, 불안의, 부동의 등등. 우리는 누구나 긍정의 생, 을 누리고 싶다. 그러므로, 그렇기 때문에 부정의 정신이 필요한 거다. 무지한 중생인 우리는 아니야, 를 통해 실체를 알아가는 것이고, 우리를 홀려 제 욕망을 채우려는 모든 것에 아니야, 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냥-사랑이 ‘그냥’ 하게 되는 것처럼 작업은 그냥, 하는 것이다. 수단, 이나 도구 아닌 공부 역시 그냥 하는 것처럼, 그냥 ‘사는 것’처럼. 그렇다고 막 살아도 된다는 건 아니겠지만. 그냥은 ‘그냥’  되는 게 아니다. 그건 그냥 심오하다.
 
명작-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사라져 주는 것. 그림을 본다는 건 그 시간이 1초든 10분이든 한 시간이든 그것과 한 몸이 된다는 거다. 그리고 또 다른 내가 되어서 그 자리를 떠나는 것. 그러니까 명작은 ‘그림’이 사라져도 내 몸 안에 있다. 상처를 모셔놓지 않듯이 환희는 모셔지는 것이 아니다.
 
이상한 풍경:
분단은 이상한 풍경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밖의 풍경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안의 풍경도 문자 그대로 ‘불가역적’으로, 엉망을 만들어 놓았다. ‘그럼 너 김정일(정은) 개새끼 해봐’라는 넷 상의 비틀린 농담이 우리 마음의 비참을 증거한다. 종교 재판 수준에서 벌어지는 (마음 속) 이념의 충돌이 어떤 계기를 통해 물리력으로 표출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정말 자다가도 등골이 오싹해지곤 한다. 이 강박과 공포도 역시 이상한 풍경이다. 김정헌은 그 이상한 풍경을 (거의)악몽의 이미지로 그려 놓는다. 마치 오줌 지린 요같이, 또는 김치 국물이 쏟아진 할머니의 보자기같이 얼룩진 바탕 화면에 거대한 두 개의 철탑이 마주보고 있다. 마치 무슨 반지의 제왕에나 나올 것 같은 이 철탑들은 실재하는 풍경이다. DMZ 안에 있는 이것들은 한쪽에는 거대한 태극기가 휘날리고 그 반대쪽 탑에는 당연히 인공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솟구쳐 오르는 회오리 바람인 듯한 먹구름과 황폐한 평야의 군사시설물들.
분단이라는 (민족적, 민중적, 아니 그냥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살이의) 이 비극이 너무 오래 고착되다보니 역설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심상한 풍경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놀고, 일하고, 싸우고, 하고, 하는 모든 것을 이 분단 상황 속에서 영위한다. ‘하지만 우리는 분단국가 어쩌고’ 하면 ‘지는’ 거다. 모른 체 하는 것. 없는 체 하는 것. 그리하여 화면 위의 도드라지는 의성어들처럼 꿀꺽꿀꺽, 크, 흥흥, 이히히 하면서 산다. 이 악몽은 눈을 떠도 보이는 악몽이고, 이곳이나 저곳에 사는 모두의 몸에, 마음에 물든 더러운 얼룩이다.
 
달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파괴하라:
너무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우리의 그 전쟁과 분단은 일제 식민의 결과였다. 주권 없는 삶, 이라면 추상적이고 점잖은 표현이겠으나, 또, 뭐, 지금은 그 알량한 주권이 있냐? 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작가가 식민의 한 모습으로 잡아낸 군함도의 실상, 그게 바로 주권 없는 삶의 (참)모습이다. 아래는 웹 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백과사전에 나온 군함도-하시마 섬에 관한 얘기다.
 
「하시마 탄광은 지하 1km가 넘는 해저 탄광이다. 탄광 안은 좁고 온도가 45도를 넘었고 유독가스가 수시로 분출되기도 했다. 작업 도중 해수가 갱내로 쏟아져 들어오기도 했다. 육지 탄광에 비해 채굴조건이 매우 나빴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석탄 증산요구에 따라 배고픔 속에서 하루 12시간 동안 채탄 작업에 시달렸다. 이같은 혹독한 자연환경과 노동조건 탓에 “감옥섬”으로 불렸다.(중략)
1935년 3월26일 하시마 탄광의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광부가 사망한 큰 사고가 발생했다.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중 조선인 노동자는 절반이 넘는 9명이었다.
일제가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총동원체제를 가동하면서 하시마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의 수도 해마다 늘어 패전 직전인 1944년 800여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비인간적 환경에서 고통을 겪었으며, 외부와도 철저히 격리된 채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122명이 숨졌다. 사망 원인은 악조건 속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며 장시간 노동을 해 영양부족 때문에 생겼을 것으로 보이는 질병, 도망치다 바다에 빠진 것으로 추정되는 익사, 그리고 질식·탄광사고 등이었다.(후략)」
 
역사의 갈피마다 묻어 있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끔찍한 착취는 ‘어쩔 수 없는 역사’로 치부되어 잊혀진다. 기억한들 어쩌겠냐, 다. 더 쎈 참상들이 늘비한 인류사에 우리는 무력하다. 경악과 무력의 핑퐁게임 같은 거. 작가는 그래서 욱일승천의 구름이 깔린 먼지 빛 하늘과 검은 땅 속에 묻힌 채 묻혀버린 징용된 자들을 화면에 그려놓고, 그 화면 위에 (같이) 존재하는 가상의 다른 평면에 노란 원들을 배치한다. 평면과 원근이 뒤섞이는 공간. 그는 ‘우리’가 개선하지 못하는 우리의 시간을 달에게, 달의 공간에 의탁한다. 추상적이고 비실제적 공간의 중력으로 이 실제의, 약육강식의 원근을 부수어 달라는 듯이.
 
아몰랑 구름이 떠 있는 수상한 옥상:
(아마도) 한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가 보이는 옥상에 말풍선 같은 구름이 떠 있다. 일견 평화로운 장면이다. 옥상 위에는 대형 환풍기가 돌아가고 에폭시가 칠해진 바닥은 (주차장 같은 그) 녹색으로 빛난다. 슴슴한 풍경이다. 화면에 깨알같이 ‘아몰랑 구름이...’라는 제목을 보기 전까지는.
많은 평자들이 김정헌 작업의 특성으로 꼽는 것 중 하나가 그의 ‘유머’다. 쿡 찌르는 거, 슬쩍 흘려서 화면 자체를 반전시키고, 어-하는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그런 거.
아몰랑, 이라는 말은 애초 ‘운전하는 김여사’처럼 여성을 무슨 고귀한 야만인-사회적 단세포로 ‘퉁’치기 위해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적어도 위치상 나라를 책임지는 체라도 해야 할 사람이 알 수 없는(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방백하듯이 하고는 자주 순방을 나가시는 바람에 그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가, 이제는 사회 전반의 예측불가능성과 그 불안이 몰고 오는 ‘나와 내 가족’ 주의의 냉소를 표현하는 말이 된 것 같다. 있잖은가-아몰랑, 그게 밥 먹여줘, 같은 거.(그래서 혹자는 이걸 먹고사니즘에 경도된 사회적 냉소, 라고도 부르더라.) 만화에 나오는 말풍선 같은 아몰랑구름에는 그런데 아무 말도 쓰여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 ‘아몰랑’이라는 말은 착란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는 것, 표현되거나 발음될 수 없는 병. 이 수상한 풍경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인지부조화’라는 질병에 대한 담담한 진술이다. 위급하면 머리만 감춘다는 꿩도 자신이 머리만 감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 감췄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는 사람인지라 머리만 감추면 머리만 감췄다는 걸 알고는 있다. 다만 인정하지 않을 뿐. 이 인지부조화적 아몰랑의 세계, 에 ‘어서오세요’다. 밋밋한 비극의 세계.
 
앗! 삶이 떠내려 가네:
검은 대지와 밝은 연보라의 하늘이 있다. 흰 구름도 두어 개 있고. 대지 위에는 먹고 난 막걸리 병과 개다리소반 위의 주전자, 잔, 병이 놓여 있다. 이상하게 이 그림은 요절한 박영근 시인을 생각나게 한다. 그림의 장면과 시의 장면의 실제적 거리가 먼데도 그렇다.(왜긴 왜야 술 때문이지, 라는 소리가 들리지만-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사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 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 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이 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 꽃을 터트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 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 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 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도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트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줏잔을 흔들면서 몇 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희망도 슬프다; 달빛이 우리를 구하다:
이번에 나오는 김정헌의 작은 화집에는 언뜻 봐 다섯 개의 창문이 나온다.(뭐 샅샅이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창문은 (시각에 한하자면) 들여다보기와 내다보기의 장치이다. 다섯 개의 창문 중 두 개는 들여다보고 한 개는 내다본다. 그러니 이 창문들은 사실적 창문이다. 밖에서 어느 가족의 저녁을 들여다보고, 안에서 관상용 열대식물 너머 저 먼 어딘가를 내다본다. 그런데 창 자체가 불빛-달빛을 받아 빛나면서 독자적으로 화면의 가운데 등장하는 것이 두 점 있다. 이 두 창문은 안팎 없는, 기호로써의 창문이다. ‘달빛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파괴하라’와 ‘희망도 슬프다’의 창문. 그러니까 이 창문-기호는 작가의 시점이 이쪽에도 있고, 저쪽에도 있다는 기표로 보인다. 전방위적 시점이랄까. 나는 군함도 땅 속에 있고 그걸 (역사적으로) 보고 있는 현재에도 있다, 나는 어린 아이들이 사고를 당한 그 바다에 있고 그걸 무력감에 떨며 바라보고 있는 여기에도 있다는 것. 그렇지 않을까? 임재증명臨在證明의 의지이자 어쩔 수 없는 부재증명의 고백.
희망도 슬프다, 라는 문장-제목은 바로 (그나마 잘 알려진 말라르메의 시 <바다의 미풍>에 나오는 다음 구절) “육체는 슬프다, 아아!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다 읽었구나.”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책조차 다 읽어버렸으므로 다음 연에서 시인은 “달아나리! 저곳으로 달아나리! 미지의 거품과 하늘 가운데서”라고 말한다.
세월호(사고)는 일차적으로 비명에 세상을 뜬 (대부분) 어린 사람들에 대한 슬픔, 육체의 유한성과 허약함, 어떤 덧없음을 사무치게 일깨웠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걸, 그것조차도 극진히 보내지 못하고 ‘육체 가진 것들’의 저열함, 비겁함, 권력과 제도가 가진 그 파렴치한 욕망의 거대한 구덩이를 남김없이 드러내면서 우리 사회를 윤리적 열패감-도덕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망연한 사태였고 그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희망도 슬프다’가 안팎 없는, 아니 안과 밖, 하늘과 바다, 물결과 구름, 그 모두에 내재된 작가의 시점과 심상을 빛(아마도 달빛)을 만재滿載한 창을 통해 보여준다면 ‘달빛이 우리를 구하다’는 보다 직접적으로 망연자실한, 그러나 그렇게 있을 수만도 없는 우리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래서 작가는 앞서 ‘...군함도...’에서 그랬듯 ‘달’에게 의지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범죄의) 파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달‘빛’에 의한 구원을 바라고, 바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느낀다. ‘...우리를 구하다’ 이므로.
이것은 도덕적으로 오갈 데 없이 갇힌 우리의 망상이다. 그런데 이 망상은 아도르노의 말에 의하면 이런 성질을 갖기도 한다.
 
“우리가 구원을 희망할 경우 희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음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한순간이나마 숨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지만 그러한 희망인 것이다. 모든 명상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울의 이중성을 항상 새로운 모습과 착상 속에서 참을성 있게 추적하여 묘사해 나가는 것이다.
진리란 가상의 모습에서 언젠가는 가상 없는 구원이 솟아오르리라는 망상과 분리될 수 없다.”
 

조금 더, 그냥, 그리고 9개의 달-낙락장송:
김정헌의 작업은 사회적 시선으로, 다채롭다.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그는 공적 주제-역사, 정치, 사회의 제 문제를 다각적 층위에서 사유하고, 그것을 매우 다양한 회화적 방식으로 탐사, 접근, 구축해 낸다. 자칫 강퍅해질 수도 있는 주제를 특유의 유머와 표현의 거리 조절로 단정하고 부드럽게 마무리 짓는다.
 
“불꽃은 낯선 것을 전혀 용납하지 않고 자신이 미치는 것을 가차 없이 자기 자신으로 변화시키는 순수성을 지녔다.
불꽃은 그것을 갈라놓더라도 그 각기 작은 불꽃이 고유한 불꽃을 닮는 그런 마술적인 통일성을 지녔다.
끝으로 불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그 빛의 숭고한 진실성을 지녔다.”
이것은 거의 한 세기 전 시인인 아폴리네르의 말이다. 그리고
 
“시인이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돼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시다운 시는 금후의 과제이다.”
한국전쟁 중 생사불명이 된 청년 시인 유진오兪鎭五의 말이다.
 
이 오래됐다면 오래된 두 진술 사이에 김정헌이 구상했고 실천해 온 ‘큰 그림’이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시대에 대한 하염없는 (책임지지 못했다는) 민망함과 (그래도 책임지려고 노력 했다는) 수줍음은 때때로 아름다움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모종의 출사표이자 고백과도 같은 ‘9개의 달-낙락장송’이 있다.
언제나 그렇듯 여정旅程이 시작된 곳에서 다시 새로운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다.





김정헌, 고풀이, 2016, 캔버스에 아크릴, 91x91cm.jpg

김정헌, 고풀이, 2016, 캔버스에 아크릴, 91x91cm
 
김정헌, 달빛, 2015, 캔버스에 아크릴, 40x40cm.jpg

김정헌, 달빛, 2015, 캔버스에 아크릴, 40x40cm
 
김정헌,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 2015, 캔버스에 아크릴, 93x93cm.jpg

김정헌, 아몰랑 구름이 떠있는 수상한 옥상, 2015, 캔버스에 아크릴, 93x93cm
 
김정헌, 달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격파하라, 2015, 캔버스에 아크릴, 73x91cm.jpg

김정헌, 달의 중력으로 군함도를 격파하라, 2015, 캔버스에 아크릴, 73x91cm
 


 
[나유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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