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 삶의 벚꽃엔딩 [예술철학]

좋은 비평이라는 것
글 입력 2016.03.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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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기에서 봄 내음이 나는 날이었다. 늦은 오후, 나는 다시 좀비처럼 올라온 벚꽃 엔딩 차트를 들먹이며 애인과 농담을 주워삼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애인이 입을 열었다.


“전에 벚꽃 엔딩 한 줄 리뷰 중에 기억이 남는 문장을 본 적이 있어.”
“에? 뭔데?”
“언젠가 지구에서 봄이라는 계절이 사라진다면
봄을 느껴보지 못한 후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대. 
이게 봄이라는 계절이었어, 
이런 느낌이었단다, 하고.”


그러게, 벚꽃 엔딩에는 우리가 느끼는 봄의 끄트머리가 들어있겠다, 라고 중얼거렸다. 더럭 노래를 듣고 싶어졌다. 우리가 느끼는 봄은 어떤 걸까, 듣고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창 밖을 바라보며 벚꽃 엔딩을 함께 들었다. 워낙에 많이 들어서인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감흥이 별로 없는 노래였는데, 이번에는 그 노래에서 내가 보냈던 봄들이 들렸다. 혼자 도서관을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울음을 터뜨렸던 봄날이 있었고, 내 첫사랑과 대학교 중앙 잔디밭에 앉아 맥주를 마시던 봄날이 있었다. 모의고사를 보고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으러 달려가던 봄날이, 아파트 단지에 흐드러지게 핀 목련 아래서 슬러시를 아껴 먹던 봄날이 떠올랐다. 묘하게 코 언저리가 시큰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이제 다시 오지는 않을 봄들이 생각났고 매년 봄이 되면 그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이 이해가 갔다.



 

비평은 많은 경우 독선으로 시작해서 독선으로 끝난다. ‘내가 이 작품을 이렇게 느꼈어. 그러니 이 작품은 이러한 거야’ 라는 전제를 미리 깔고 있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어쨌든 비평은 ‘문학작품을 정의하고 그 가치를 분석하며 판단하는 것’이며, 나에게 전달된 가치가 실제 문학 작품의 가치와 동일하다는 전제 없이는 문학작품을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창작자 뿐 아니라 수용자에 의해서도 창작이 되는 감각 및 사유 경험이다. 보는 사람마다 다른 것이 예술이며 느끼는 것도 다른 게 당연하다. 나에게는 가치 없는 작품이라도, 다른 이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경험을 선사해 줄 수 있다. 그들의 감동에다 대고 ‘이 작품은 원래 가치가 없어. 가치 있다고 느끼는 네가 틀린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인 동시에 상대에 대한 폭력이다.
 
나는 비평을 하고 싶지만, 폭력을 휘두르고 싶지는 않다. 내가 느낀 예술에 대해서, 내가 해석한 예술에 대해서 글을 쓰고 싶지만 그 예술작품 전체를 규정하고 정의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간극에서 긴 시간 동안 길을 찾지 못했는데, 벚꽃엔딩을 들으면서 그 실마리를 찾았다. 애인이 들려준 그 리뷰 한 줄 덕에 벚꽃 엔딩은 의미 없는 ‘벚꽃 좀비’에서 내 봄들을 기억하는 노래가 됐다.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전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추억과 아련함과 미묘한 떨림으로 벅차오른다. 누군가의 글 한 줄로, 난 전에 느끼지 못했던 값진 경험을 했다.

리뷰라는 건, 비평이라는 건, 이럴 때 가장 가치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예술에서 가능한 감각적, 사유적 경험의 범위를 최대한 넓혀 주는 것. 그리하여 감상자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더 많은 것을 보며 더 적극적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
좋은 비평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 예술은 이래’, 라는 규정과 정의내림이 아니라 ‘이 예술을 이렇게 느껴 볼 수도,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어’라고 제안하는 비평을 해야 겠다. 그래서 내 비평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보고, 더 많은 의미들을 세상 곳곳에 부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은 비평이지 않을까.

봄이 왔다. 나는 벚꽃 엔딩을 들으며 캠퍼스를 걸을 것이고, 걸으면서 내가 지나온 봄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이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벚꽃엔딩을 들으면서 걷던 그 시절로, 이 학교를 기억하겠지. 좋은 노래를 남겨준 것, 그리고 내 삶의 조각을 그 안에 저장해준 것에 대해 저 리뷰를 쓴 사람에게 감사를 전한다.


[이단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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