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슬픔의 끝엔 차가운 감동이 있다[문학]

글 입력 2016.02.2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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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떠올려 보자. 이미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인물이거나 존경하는 유명 인사의 생도, 화제의 인물도 좋다. 그나 그녀의 삶이 꽤 괜찮아 보이는가? 조금의 시련은 있었겠지만 멋지고 감동적이고 화려해서 한번쯤 살아볼만한 인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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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점 자기계발서 코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수많은 성공신화에 휩싸여 살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생에 대한 긍정적인 이상향을 품고 있는 자라면 반드시 주변의 지지에 힘입어 목표에 닿을 수 있을 거라는 신화 말이다. 삶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다 줄 꿈, 그 동력이 되어줄 젊음과 건강, 기쁨과 활력의 원천인 사랑. 그 신화들 속에 자신을 대입시키다보면 모든 것이 내 의지에 달려있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자의식이 과잉되는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은 어떠한가. 의식적으로, 계획대로 무언가를 하려 해도 무수한 변수가 생긴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들, 건강을 잃어버린 가장들, 가슴에 어떤 이상을 품어야 하는지 모르는 학생들. 고통과 권태에 지친 이들이 꾸준히 펼쳐보는 가판대의 자기계발서들은 유흥가를 밝히는 네온사인 불빛처럼 무상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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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펜하우어]

  알고 있는 성공신화가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은 스스로 불구가 된 감정에 휩싸이기 쉽다. 자책이 쉬워진다는 뜻이다. 이 불능의 고통, 슬픔, 허무에 집중하고 깊이 공감했던 이가 그 유명한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다. 맹목적인 의지의 상태가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절대 만족될 수 없다는 진실. 고통이 없기 위해선 욕망을 거세하거나 속세를 잊는 수밖에 없다는 그의 주장은 참으로 무력하다.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현대인의 입장에선 굉장히 무례하고 괘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미래에 대한 불길한 점괘를 받은 것처럼 꺼림칙하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현대인의 바로 그러한 태도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자들 아니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에 대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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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프레데리크 시프테]

  슬픔이나 고통만큼 솔직한 감정은 없다. 그것만큼 자기 자신을 잘 대변하는 감정은 없다고 본다. 내가 무엇에 분노하는 사람인지, 무엇에 냉소적인 사람인지, 무엇을 잃는 게 가장 두려운지 생각한다면 아주 부끄러운 상태의 나 자신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순간마다 어떤 반응을 보이도록 하는 성격은 부모의 영향이나 가정환경, 교육, 사회적 분위기 등의 환경적 요인으로 발달된 것이 크기 때문에 그 부끄러움이 순전한 자기 몫이 될 이유는 없다.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눈에 띄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글쓴이인 프레데리크 시프테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부재라는 큰 상실의 상태를 겪어왔고 그래서인지 평범한 일상에서 죽음과 슬픔, 허무와 고통을 성찰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는 슬픔을 논하지 않고선 인생의 본질을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문장에서 우울증 말기 환자의 기운이 느껴지거나 청승맞은 감정이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강단지고 자신만만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쾌한 자들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한량없는 환희가 내게는 모욕이다. 열광하는 자. 출사표를 던지는 자. 의욕에 불타는 자를 나는 멸시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그러면서 약간의 두려움도 품는다. 낙관론자들은 감옥과 묘지를 채워 넣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삶을 사랑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인가? 나는 자각 없는 사람들을 멀리한다. 인간은 어차피 조건적인 삶을 향유할 수밖에 없으며, 죽음은 인간의 삶에 대한 애착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걸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을 멀리할 뿐이다.” _<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 서문에서

  어떤 굳은 믿음이 있다하더라도, 할 수 있는 모든 예상이 빗나갈 수도 있고 처음에 가졌던 확신조차 부정당할 때도 있기에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는다고 해서, 괜찮은 척 한다고 해서 슬픔이 사라진다고는 할 수 없다. 빛과 암흑. 양쪽이 다 존재하기 때문에 둘 다를 인지할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삶의 양면성을 받아들이면 삶의 의미도 달라진다. 사랑에 실패한 젊은이의 자기연민이 잃어버린 상대방에 대해서도 번져가는 것, 자기 자신을 잠시 멈추게 만든 병 때문에 죽음에 대해 겸손해지는 것, 만인으로부터 추앙받는 사회적 꿈이 아닌 억압된 자기욕망에서 발견하는 꿈. 자기 고독을 아는 것. 그것이 무작정 희망을 갖고 구체적인 인생 계획을 세우기 이전에 있어야할 단계이지 않을까 싶다. 일방적이고 독보적인 성공신화에 눈이 머는 타성에 젖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더더욱 슬픔과 고통은 내 삶에서 적대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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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

  끝으로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끔찍한 신탁대로 되지 않기 위해 살던 곳을 떠나 스핑크스를 물리치고 테베의 왕이 되어 운명을 극복했나 싶었으나 이미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해 자식까지 낳은 오이디푸스. 책을 단지 글로서만 읽었던 어린 시절엔 이야기가 막장 드라마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엔 오이디푸스를 연민할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더 읽고 나서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언가가 두려워서 불길한 결말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서 궁색하게 변명하고 멀리 돌아왔던 삶, 혹은 나의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뒤틀려버린 꿈과 사랑. 그리고 그 어긋난 결말의 무게.

  멋지게 강단 한 가운데 서있는 것만이 생의 전부가 아니다. 조명 가득한 무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을 걷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는 순간도 있다. 그 뒷모습에 대고 끝없이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미 그들 눈엔 당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의 어둠을 기억해줄 수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이 있다. 나 자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당신 자신 말이다. 슬픔의 끝엔 차가운 감동이 있다. 그 순간에도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이 있다면 그것이 지니는 숭고한 힘은 우리 생의 그늘 속에서도 잔잔하게 빛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출처>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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