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마그리트와의 운명적 만남 [시각예술]

르네 마그리트에 대해
글 입력 2016.02.2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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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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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저것이 파이프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14살의 나에게 굉장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한 그림의 제목이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미술 수업은 그리기나 만들기를 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중학교 1학년이 되니 선생님께서 미술사를 가르치신다. 
프린트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미술사조와 화풍, 연도, 작가들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수업 내용이 지루해서 선생님 설명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교과서를 펼쳐 그림들을 보곤 했다. 

어느 날 교과서에서 발견한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아무리 보아도 파이프를 그린 그림인데 그림의 제목에서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도대체 왜?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예쁘고 따뜻한 느낌의 그림을 좋아했던 
내가 르네 마그리트라는 
초현실주의 화가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는 ‘충격’과 ‘역설’을 통해 사고의 신비로움을 드러낸 인물이다.

그의 그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그린 듯하지만, 
종종 이런 오브제들을 예기치 않은 문맥으로 제시함으로써, 
친숙한 것들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내가 앞에서 언급했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에는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파이프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 아래에는 마그리트가 쓴 'Ceci n'est pas une pip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프랑스어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뜻이다. 

모순어법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맞는 말이다.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오직 파이프의 이미지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 통해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는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작가로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유명하다. 

'데페이즈망'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오는 기법이다.
생소한 배경에 친숙한 사물을 기괴하게 배치하여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화면을 구성해낸다. 

심리적 충격을 주어 보는 이의 마음속에 잠재되어있던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초현실주의를 통해 현실을 본능적이고 잠재적인 꿈의 경험과 융합시켜 
실재하는 현실 그 자체를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하고 
초월적인 현실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표현 방법에는 고립, 변경, 사물의 잡종화, 크기의 변화, 이상한 만남, 이미지의 중첩, 패러독스 등이 있다.

르네 마그리트는 양복재단사와 모자 상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다. 

그의 그림에서 유독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는 중절모와 양복을 입은 신사들이 이를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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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마그리트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린 마그리트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어머니의 시체를 강에서 건져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드레스 자락으로 얼굴이 덮인 채 강물 위에 떠 있었던 어머니의 이미지는 
마그리트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그가 나중에 작품들을 제작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로 '연인들'에서 두 남녀는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묘사되어 있다. 

그는 브뤼셀에 있는 왕립 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를 시작하고 
포스터 및 광고 디자이너 등의 다양한 직업들을 하다가, 
브뤼셀의 한 화랑과 계약을 맺으면서 회화 작업에 전념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의 첫 전시회에서 혹평을 받아 파리로 간 그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초현실주의에 대한 관심이 키운다. 
그 후, 화랑과의 계약 만료로 파리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게 된 
그는 브뤼셀로 돌아온다. 

1940년대 중후반에 들어 마그리트의 작품은 좀 더 밝고 가벼워지고 또 더욱 실험적이 되었다. 
그는 야수주의의 그림들을 우스꽝스럽게 모방해 그렸다. 
이는 아마도 전쟁이라는 어두운 시대를 견뎌내고, 
초기 작품들의 특징이었던 염세주의와 폭력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마그리트는 관람자들이 의문을 갖고 도전하도록 만드는 작품들의 제작에 열중했다. 
마그리트는 생전에도 미술가로서 유명했지만, 
사후에 그의 명성은 작품들과 그것들이 끼친 영향으로 더욱 높아졌다. 

몇 세대에 걸쳐 미술가들과 영화제작자들이 그의 그림들에서 영감을 얻었다. 
두 번이나 제작된 영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는 
마그리트의 '남자의 아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남자의 아들’은 커다랗게 확대된 사과에 의해 얼굴이 가려진 중산모를 쓴 남자를 그린 작품이다. 

마그리트 같은 미술가들은, 
과거에는 고상한 엘리트층에게만 알려져 있었으나, 
이제 그의 이미지들은 대량 생산되는 록 음반 표지에 실림으로써 수많은 대중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현대의 대량 생산 기술과 대중문화에 힘입어 그의 이미지들은 더 많은 대중들에게 친숙해졌다. 

여러 뮤지션이 자신들의 음반 재킷 표지로 마그리트의 이미지들을 사용했다. 
마그리트의 지속적인 인기가 음반 사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미국의 유명한 컬트 만화인 심슨 가족의 ‘공포의 나무 위의 집 4’는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을 참고했고, 
온라인 비디오 게임 '혐오의 왕국'은
 '사람의 아들'과 '이미지의 배반'에서 영감을 얻었다. 

마그리트의 아이디어는 후대 상업 광고에도 또한 꾸준히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접할 수 있다. 
이는 내가 마그리트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마그리트의 '골콩드'는 한국에서도 공공 미술의 형식으로 인용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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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에서 2007년 사이 신세계 백화점 본관 리노베이션 공사의 
알루미늄 막 위로 '골콩드'가 크게 확대 인쇄되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또 2009에서 2010년 사이 서울스퀘어 건물 전면에 LED를 설치한 미디어 작품 가운데에도 
우산을 쓰고 낙하하는 변형된 '골콩드' 동영상이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몇 년 전 방영된 무한도전 달력 제작편에서는 
가수 길이 '골콩드'를 패러디한 화보를 찍었으며 스마트폰 갤럭시의 광고에도 등장한 바 있다. 

이렇듯 정말 유명한 마그리트의 대표작, 
중절모에 레인 코트 차림의 신사가 떼로 등장하는 
'골콩드' 혹은 '겨울비'라는 제목의 이 그림은 
재현된 이미지만 놓고 보면 영락없는 ‘인간비’를 그린 것이다. 

중절모와 코트 차림의 사내는 르네 마그리트가 자신의 작품에 수없이 등장시킨 그의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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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포즈를 취한 무개성한 개인들의 열거는 
현대 조직 사회가 박탈한 도시인의 개성을 보여준다. 

중력에 지배당하는 비라면 지면을 향해 떨어지겠지만, 
조직에 얽혀 사는 우리의 형편을 반영하듯, 
인물들은 허공 위에 불안정하게 붙잡힌 군상으로 표현되었다. 
쓸쓸한 현대적 삶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 많은 관람자가 이 그림을 유독 선호한다.


내가 꼽은 또 하나의 인상적인 그의 대표작은 '피레네의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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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능시험 언어영역에도 등장했던 그림이다. 
기출문제를 풀어본 학생이라면 마그리트는 몰라도 '피레네의 성'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피레네의 성'에는 자연 법칙을 천연덕스레 거스른 초자연적 현상이 그려져 있다. 
요새 모양의 성이 육중한 바위 정상에 솟아있고, 
기괴한 바위는 해변 위로 중력 저항 없이 마치 UFO처럼 떠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실현될 수 없는 백일몽을 뜻하는 프랑스식 관용어, 
‘허공 위의 성곽’을 비틀어 쓴 것이다. 
자연 법칙을 극적인 방식으로 넘어서기 위해 그는 거대한 바위를 등장시켰다. 

돌덩이를 자주 등장시킨 1950년대를 일컬어 특별히 마그리트의 ‘석기 시대’라 이르기도 한다. 

예술가이면서 미술 저술가인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관찰되는 중력 저항 현상을 두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견지에서 사물을 바라본 것이라 풀이한다.
 
상대성 이론은 이제껏 예측 가능하던 시공간에 대한 관점을 소멸시켰고, 
그 이론이 발표된 시대를 살던 마그리트가 
시공간의 상대성을 이미지화했으리라는 해석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심층 해석보다 
그림에서 관찰되는 초자연성, 
중세 건축 양식의 성곽, 
유령이 출몰할 것만 같은 분위기 등의 요소로부터 
마그리트와 친분이 깊던 소설가 에드거 앨런 포의 고딕 소설에서 받은 영향을 
기괴함의 시원으로 파악하는 해석도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고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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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일탈을 보며 기괴함을 느낌과 동시에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상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가 믿어왔던 중력과 위치관계는 언제나 옳을까? 
저 멀리 어디엔가 공중에 집을 짓고 사는 세상이 존재하진 않을까?

마그리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 그림은 아무런 의미도 감추고 있지 않은 가시적인 이미지이다. 
그것은 신비를 불러일으킨다. 
내 그림을 본 사람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지?'라며 간단한 자문을 한다. 
신비라는 것이 
아무런 숨겨진 의미 없이 단지 불가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작품 또한 의미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놓고 시험에서 정답을 고르듯이 
숨은 의미를 찾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상식으로부터의 유쾌한 일탈을 그대로 느끼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뿐이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하는 과목은 항상 미술이었고, 
미술과 관련된 진로를 생각해본 적도 많았다. 
그림을 잘 그리지는 못하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며 감상하는 것은 더욱 좋아한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인해 
미술에 대한 흥미를 한층 더 높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술 자체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미술 작품을 보고 “이 그림은 색채가 참 예쁘고 아름답다.”라든지
 “표현을 사실적으로 잘했구나.”와 같은 단순한 표면적인 감상이 아니라

 작품이 지니는 메시지나 
작가가 작품을 그린 의도에 대해서도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생각을 일찍 하게 되어서
 더 다양한 분야의 현대 미술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팝아트, 설치미술, 행위예술 등과 같이 
독특하고 재미있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이루어진 르네 마그리트와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마그리트가 아니었으면 
미술 작품 감상으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기쁨을 알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나에게는 큰 영향력을 준 작가이다. 

기발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마그리트의 작품은 항상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준다. 

물론 그의 작품 대다수를 완전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의 작품들 중에는 시사하는 바가 어렵고 심오한 개념을 다룬 작품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하지만 그의 철학을 확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렇기 때문에 르네 마그리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중에 유럽을 여행하게 되면 
꼭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마그리트 박물관을 방문할 것이다. 

그곳에서의 마그리트와의 또 한 번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반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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