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9] 신발책
글 - 최정란
글 입력 2016.02.25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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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9신발책글 - 최 정 란지하철을 타면 책이 잘 읽힌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제법 많은 부분이 지하철을 타고 읽은 것이다. 지하철에서는 집중이 잘 된다. 이따금 가벼운 책 한 권을 들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보다는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타고 시내로 나가는 동안 책을 읽는 때가 많다. 재미있는 책일 때는 내릴 역을 놓치게 된다.그런데 지하철에서는 왜 책을 더 자주 읽게 되나. 내 경우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불편해서가 하나의 큰 이유 같다. 멀뚱멀뚱 건너편 좌석의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은 참 머쓱하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난감하다. 거기다가 눈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은 정말 처치곤란이다. 그 시간이 몇 초간 지속 되면, 마주 볼 수도 시선을 거둘 수도 없어 속으로 쩔쩔맨다. 먼저 거두자니 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계속 바라볼 수도 없고.우리나라의 도시에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인 경우는 별로 없다. 지하철 안에서 만이 아니라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표정도 비슷하다. 무심한 시선을 넘어 경계하거나 멸시하거나 슥 훑어보는 시선일 때, 타인의 표정을 바라보는 일은 슬프다. 삶이 각박해서 일 수도 있겠지만, 어려서부터 친절한 표정을 짓는 습관이 안 되어 있어서 일 것이다. 위아래를 훑어보는 눈길이라도 만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아래로 눈을 내려 책이나 읽는 수 밖에. 무리해서라도 무거운 책을 지고 다니는 이유이기도하다.어쩌다 책이 없는 날은 난감하다. 그럴 때는 시크한 척 눈을 내리깔고 책 대신 신발을 읽게 된다. 신발책은 종류도 다양하다. 운동화, 하이힐, 구두, 부츠, 군화, 샌들, 슬리퍼. 대충 큰 카테고리로 분류해도 이 정도다. 재질, 높이, 디자인에 따라 세부 카테고리로 분류하면 그 종류는 어마어마하다. 지하철 한 량에 타고 있는 사람 가운데 똑 같은 신발을 신은 사람은 거의 없다.잘 닦인 구두, 먼지 묻은 구두, 한쪽 굽이 닳은 구두, 굽이 높은 구두, 굽이 낮은 구두가 저마다 입을 연다. 아, 오늘 회의는 길고 지루했어. 많이 걸었지만 아무 곳에도 도착하지 못했어. 어떻게든 나를 크게 보이게 하고 싶었지. 조금 높은 곳의 공기는 더 신선할 것이라 기대했지. 내 허영에 생의 발목이 상하는 줄 몰랐어. 레드카펫을 걷고 싶었지만, 오늘도 비포장도로였어. 바르게 걷는 줄만 알았지, 걸음의 방향이 비뚤어진 걸 몰랐어. 내가 걸어온 인생의 방향도 비딱했을까. 출발점에서 조금 어긋난 각도 때문에 원래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서 얼마나 거리가 멀어졌던가.구두는 수다스럽다. 구두는 때로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구두에 실려 오는 것이다. 구두가 책보다 더 많은 페이지를 가지고 있을 때가 많다. 나는 두꺼운 구두책들을 다 읽지 못하고 목적지 역에서 내리곤 한다.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있으면 타인과 눈길 마주칠 걱정이 없기는 하다. 그래도 오래된 습관 때문인지 지하철을 탈 때 책이 없으면 안절부절 못하는 불안이 남아있다. 구두를 읽기 시작하고부터는 그럭저럭 견딜만한 양으로 그 불안이 줄어들어 다행이다.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은 평일의 중년남자의 등산화다. 조금 기가 죽어있고 침묵한다. 이봐요. 등산화. 입을 열어보시오. 여전히 묵묵부답. 말 안해도 짐작되는 것이 있다. 억, 내릴 역을 놓친다. 남의 신발을 읽다가 약속에 지각하게 생겼다. 음, 아무거나 읽으려드는 것도 병이다. 형광 연두빛 승리의 여신 로고를 양 옆에 달고 있는 내 낡은 자주빛 운동화는 어떻게 읽혔을까. ( the E)
최정란(시인)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ART insightArt, Culture, Education - NEWS[김민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