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권리가 있는가, 이방인 [문화 전반]

글 입력 2016.02.02 0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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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주인공 뫼르소의 아랍인 살해를 중심으로 양분되어 있다. 1부에서 알제의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인 뫼르소는 마랑고의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고 마랑고로 간다. 장례식 특유의 예법에 무감한 그의 태도에 양로원 사람들이 놀란다. 장례식 이튿날 그는 해변에서 옛 사무실 동료 마리 카르도나(Marie Cardona)를 만나 코미디 영화를 본 후 집으로 와서 동침한다. 평범하고 무심한 일상생활이 계속된다. 어느 날 같은 층에 사는 이웃 레몽(Raymond)과 친구가 되는데, 이 관계가 삶의 일상적 흐름을 끊는 계기가 된다.
  뫼르소는 변심한 아랍인 애인을 벌주려는 레몽의 음모에 수동적으로 이끌려 들어간다. 며칠 후 레몽, 뫼르소, 마리 일행이 레몽의 친구 마송(Masson)의 초대로 해변으로 놀러갔을 때 일행을 미행한 레몽 애인의 오빠 일행과 싸움이 벌어진다. 레몽이 다치고 싸움은 끝났으나 뫼르소는 가슴이 답답해서 혼자 그늘진 샘을 찾아간다. 싸움의 와중에 흥분한 레몽으로부터 빼앗은 권총을 품에 지닌 채……. 샘에는 이미 레몽 애인의 아랍인 오빠가 와서 그늘 속에 누워 있다. 팽팽한 대치 속에서 아랍인이 칼을 꺼냈고, 칼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눈이 먼 뫼르소는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것도 여러 차례…….
  2부는 재판과정을 담고 있다. 뫼르소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는 듯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재판을 관찰 혹은 구경한다. 예심과 본심에서 그에게 쏟아진 질문은 아랍인 살해 경위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종교적·도덕적 관례를 따르지 않는 뫼르소의 행동 하나하나가 스캔들을 일으킨다. 사실 프랑스인의 아랍인 살해는 식민국 프랑스의 법정에서는 치명적인 범죄가 아닐 수도 있다. 뫼르소가 법정의 질문에 요령 있게 답했다면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피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법정이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즉 거짓말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는 동안 뫼르소 역시 인간이기에 지극한 공포를 느꼈지만 마침내 '세계의 다정스런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감히 슬퍼할 권리가 있는가


  어머니의 죽음에 초연한 주인공, 뫼르소.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타인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는 것과, 나의 기쁨이 상대의 기쁨이 되기 힘든 법이다. 냉정한 생각이지만 인간의 무관심을 꿰뚫어본 알베르 카뮈의 통찰력에 기반한 인물이 바로 뫼르소가 아닐까. 그러나 정말 뫼르소가 완전한 무관심의 상태였는지, 또 이 일에 관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고 있지 않은지는 소설의 전개 속에서 추측가능하다.
  다음은 이 책의 역자인 김화영 씨가 쓴 작품 해설에서 일부 발췌해온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겉보기와 달리 실제로는 자신도 모르게 뫼르소의 죄의식을 유발한다. 즉 그는 어머니의 죽음의 “그늘” 밑에서 살아간다. 소설의 1부는 죽음이 던지는 암시적인 영향들로 점철되어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뫼르소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아 보이지만 달라진 그의 ‘시선’이 모든 대상들을 변모시킨다. 그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낯설고 이상한 곳으로 변한다. 이른바 ‘낯설게 하기’의 작용이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1장의 장례식은 어떠한가? 그것은 어렴풋하게 용해되어 끈적거리는 세계로 뫼르소에게 일종의 환각 상태를 연출해 보인다. 그가 장례 행렬의 뒤를 따를 때 견딜 수 없이 쏟아지는 햇빛의 영향, 즉 일종의 액화 현상과 검은 색이 그러하다. “녹아서 갈라터진 아스팔트”, “콜타르의 번쩍거리는 살”, “검은 반죽으로 이겨서 만든 것 같은” 마부의 모자 등 온통 검은 색이 주조를 이룬다. 갈라진 아스팔트의 “끈적거리는 검은 빛깔”, 사람들이 걸친 상복의 “흐릿한 검은 빛깔”, 니스 칠한 영구차의 “검은 빛깔” 등 단조롭기만 한 흑백 톤으로 돌변한 장례식 풍경 때문에 뫼르소는 어리둥절해한다. 한편 어머니의 시신을 지키며 밤샘을 하는 영안실의 모습은 악몽 속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노인들이 밤샘을 위하여 실내로 들어올 때의 침묵, 그러나 “눈이 아플 정도로 뚜렷이 드러나 보이는” 모시리 하나하나, 그리고 눈부신 빛은 그 장소를 짓누르는 침묵을 더욱 공격적이고 기괴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 “아무 말 없이 그 눈부신 빛 속을 슬며시 들어온” 노인들은 악몽이나 환각 속의 인물들인 양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들의 눈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얼굴 한가운데 광채 없는 빛만 보였다.” 그들은 모두 “문지기를 둘러싸고 나와 마주 앉아서 고개를 꾸벅거리고만” 있다. 그 이전에 이미 양로원 마당을 가로지를 때 뫼르소는 노인들의 떠드는 소리가 “앵무새들이 나직하게 재잘거리는 소리 같다”고 느낀다. 거기다가 페레스 영감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또한 어떠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인상은 우스꽝스럽다. “검은 점들이 박힌 코 밑에서 입술이 떨리고 상당히 가느다란 흰 머리털 밑으로 축 처지고 귓바퀴가 야릇하게 말린 흉한 귀”를 가진 그는 장례 행렬을 따르다가 결국 “꼭두각시가 해체되어 쓰러지듯” 기절해 버린다. 이런 모든 것은 부지불식간에 뫼르소에게 일종의 죄의식을 자극한다. 죽음의 고통을 마음속에서 억압하듯 “말수가 적은” 그는 고통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묘사를 통해 암시할 뿐이다.
  2장,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항구의 바다에서 수영을 하다가 마리와 만났지만 함게 집으로 온 그녀가 다음 날 아침에 돌아가고 나자 뫼르소는 발코니에서 밖을 내다보며 무료하게 오후를 보낸다. 그는 어머니가 죽고 난 뒤에서야 어머니와의 관계가 어떠한 것이었나를 깨닫는다. 어머니가 죽기 전에는 습관, 무심함, 일상생활이 지배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겉보기에는 무심한 듯한 그의 생활은 이제부터 그 죄의식 속에서 살인 장면까지 이어진다. 우선, 마리와 자고 난 뒤 처음 찾아든 생각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여느 때처럼 셀레스트네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유를 이렇게 표현한다. “왜냐하면 틀림없이 식당 사람들이 질문을 할 텐데 나는 그게 싫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어머니가 양로원으로 간 것이 이미 삼 년 전인데도 “이제” 아파트가 그에게는 “너무” 커 보인다. 그의 의식에는 여전히 장례식 날의 내면적 충격의 흔적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것이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풍경이 어제의 일, 영안실의 그 눈부신 빛이나 얼떨떨했던 그 느낌을 되살려 놓는다. “가로등은 젖은 도로를 비추고 전차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빛나는 머리털, 웃음을 띤 얼굴, 혹은 은팔찌 위에 불빛을 던지는 것이었다.”
  3장에서 5장까지도 여전히 어머니와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환기된다. 사무실 근무로 복귀한 3장은 뫼르소와 사장의 대화로 시작된다. 사장이 어머니의 나이를 묻자 그는 “한 육십쯤”되었다고 어물어물 대답한다. 이것은 심리적인 거리낌의 암시가 아닐까? 이 장에는 같은 거주지 안에 파트너를 상실한 세 남자들이 동시에 등장한다. 이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뫼르소는 어머니를 잃었고 레몽의 모르인 정부는 그를 버리고 집을 나갔고 살라마노 영감은 개를 잃었다. 개는 그의 아내가 죽은 뒤 고독해서 키운, 이를테면 아내의 대용이다. 살라마노는 개에 대하여 “항상 여기 있는 거예요.”라고 말함으로써 뫼르소와 어머니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뫼르소가 상을 당했다고 하자 레몽은 “자포자기 하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 그들 세 인물은 각기 비슷한 상실의 영향권 속에 있다.
  1부 4장의 살라마노와 개는 보다 직접적으로 죽은 어머니를 상기시킨다. 이 장은 개를 잃은 영감이 옆방에서 우는 소리를 들으며 뫼르소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장면으로 마감된다. “그의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러고는 벽을 통해서 들려오는 괴상한 소리로 나는 그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어머니의 생각을 왜 했는지 모르겠다.” 이 까닭모를 어머니 생각이야말로 심리적 암시가 아니겠는가. 5장에서는 자동인형 같은 키 작은 여자, 살라마노 등이 환각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뫼르소는 식당에서 자동인형 같은 “이상한” 여자와 합석한다. 이 에피소드 직후에 그는 아내가 죽자 외로워서 개를 얻어 키우는 살라마노의 하소연이 이어진다. 이 에피소드는 사실상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암시로 연결된다. 개의 “진짜 병은 노쇠병인데 노쇠병은 고칠 도리가 없다”고 살라마노는 말하는 것이다. 자연사의 암시다. 그 말에 이어 영감은 “그리고 엄마가 그 개를 몹시 귀여워했다고 말했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가엾은 자당님’이라고 말했다. 엄마가 죽은 뒤 필시 내가 매우 상심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과묵한” 화자는 다른 사람의 말이나 외적 정황을 자신의 심경이 반사되는 거울로 만든다.
  결론적으로, 뫼르소의 의식의 내용이 어떤 것이건 암시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뫼르소에게 엄마는 결코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을 정독해 보면 우리는 화자 뫼르소의 무심한 듯한 어조의 진술이 암암리에 ‘어머니의 죽음’의 영향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뫼르소의 아랍인 살인 이후 벌어지는 재판 과정 중, 검사는 뫼르소의 살인에 대한 옳고 그름을 가리기 보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심원 앞에서 집요하게 호소한다.


  이윽고 다시 그의 말이 들려왔다. “그가 하다못해 후회하는 빛을 보이기라도 했던가요? 여러분,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 피고는 단 한 번도 자기의 가증스러운 범행을 뉘우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나에게로 돌아서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계속해서 통렬한 비난을 퍼부었는데, 사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는 했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을 그다지 뉘우치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토록 악착스럽게 덤벼드는 것이 나에게는 의외였다. 그에게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내가 진정으로 무엇을 뉘우치는 일이란 한 번도 없었다고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항상 앞으로 일어날 일, 오늘 일 또는 낼일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물론 나의 처지에서는 누구에게도 그러한 어조로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누군가를 다정스럽게 대하거나 호의를 보일 권리가 없는 것이었다. 검사가 나의 영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다시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썼다.
  검사는, 배심원 여러분, 나는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사실상 나에게는 영혼 같은 것은 있지도 않고, 인간다운 점도, 인간들의 마음을 지켜 주는 도덕적 원리도 찾아볼 길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하고 그는 이어 말했다.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가 얻을 수 없는 것이 그에게 결여되어 있다고 해서 나무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법정에 있어서는 관용이라는 소극적 덕목은, 그보다 더 여렵기는 하지만 더 고귀한 덕목, 즉 정의라는 덕목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특히 이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심리적 공허가 사회 전체를 삼켜 버릴 수도 있는 구렁텅이가 될 경우에는 더욱이 그러합니다.” 그가 엄마에 대한 나의 태도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심리 중에 한 말을 그는 다시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저지른 범죄를 이야기할 때보다 훨씬 더 길었다. 어찌나 길던지, 결국은 그날 아침의 더위밖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적어도 차석 검사가 말을 멈출 때까지는 그랬다.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어 다시 매우 낮지만 매우 자신 있는 목소리로, “여러분, 바로 이 법정은 내일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잔학한 범죄 앞에서는 상상력조차 뒷걸음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 사회의 율법이 가차 없는 처단을 내리기를 감히 기대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범행이 불러일으키는 전율감은, 나의 무감각함 앞에서 느끼는 전율감보다는 차라리 덜할 정도라는 것을 자신은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또 그의 말에 따르면, 정신적으로 어머니를 죽이는 사람은, 자기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를 등지는 것이었다. 어쨌든 전자는 후자의 행위를 준비하는 것이며, 말하자면 그러한 행위를 예고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이었다. “여러분, 나는 확신합니다.” 하고 그는 목소리를 높여서 덧붙였다. “피고석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이 법정이 내일 판결을 내리게 될 살인죄에 대해서도 유죄하고 말한다 해도, 여러분은 내 생각이 너무 과장되다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검사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닦았다. 끝으로 그는, 자기의 의무는 괴로운 것이지만 단호히 그것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율법을 무시하고 있으므로 그 사회와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인간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장 기본적인 반응도 보일 줄 모르는 사람이므로 인정에 호소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람의 목을 요구합니다. 사형을 요구해도 나의 마음은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짧지 않은 재임 기간 중 나는 여러 번 사형을 요구한 일이 있지만, 이 괴로운 의무가 오늘처럼, 신성한 지상명령에 따른다는 의식과, 흉악무도하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찾아낼 수 없는 한 사람의 얼굴을 앞에 놓고 느끼는 혐오감에 의해 보상받아 균형을 회복하고 빛을 받는 것처럼 느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알베르 카뮈가 '뫼르소의 살인'과 전혀 무관해 보이는 '어머니의 죽음'을 재판 과정에서 검사를 통해 다시 상기하게 만든 까닭은, '뫼르소를 이루고 있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인 '무관심'을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보여주고 싶었기에.' 라고 생각한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 인용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기에 회의감에 젖어서 '삶은 가치 없다.' 고 의식하라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것이기에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주제를 추론할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내내 ‘무관심’의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에 처한 뫼르소는, 역설적이게도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 을 깨닫고 '삶의 찬가' 를 토해낸다. 



<참고 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스토리 요약 (알베르 카뮈, 2004. 1. 15., ㈜살림출판사)
[세계문학전집] 이방인 (알베르 카뮈, 2011. 3. 25., 민음사)
[작품 해설] 이방인 (김화영, 2011. 3. 25.,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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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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