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저녁편지5] 오디션

어제는 오디션이 있는 날이었어요.
글 입력 2016.01.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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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저녁편지5
 
오디션
 
글 - 최 정 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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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오디션이 있는 날이었어요. 기존 단원들의 파트를 이동시키는 약식 오디션이었어요. 알토에서 메조소프라노로, 메조소프라노에서 소프라노로 이동한 단원은 노골적인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내심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어요. 반면 소프에서 메조로, 메조에서 알토로 이동한 단원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데, 약간의 낭패감이 섞인 서운함이 살짝 내비쳤어요. 보이지 않는 우울과 우쭐이 잠시 강당을 오갔어요.
 
색깔과 성량과 컨디션에 따라 해마다 파트를 이동해요. 사실 어느 파트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게 아니라 모든 파트가 다 중요하고, 파트의 차이는 신분이나 지위의 높낮이가 아니라 목소리의 높낮이 차이일 뿐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자리의 수직이동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단맛과 쓴맛을 맛보게 되는 인간사회의 오랜 습관이 아마추어 합창단에서도 예외가 아닌가 봐요. 저는 승진에서 누락된 만년 평사원 같은 기분이 들어요. 실은, 아웃 안 된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제 파트는 알토2B예요. 알토 가운데서도 투 비는 더 내려갈 자리가 없어요. 다행이지요. 이 년 전 오디션을 받고 정식단원이 되었어요. 일찌감치 포기해. 당연히 떨어질 것이라고 가족이 놀려댔지요. 못 들은 척 욕실 문 닫아걸었어요. 샤워기 틀어놓고 저녁 내내 지정곡을 연습했지요.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응시는 해봐야지요. 아뿔싸! 설상가상, 다음날 아침 목이 쉬었어요.
 
더하기도 빼기도 안 되는 목소리네요. 지휘자가 솔직하게 말했어요. 다시 말하면 있으나 마나래요. 운이 좋았어요. 입단 오디션 지원자가 정원보다 부족했어요. 포기하라는 말씀 안 하시니, 험난할 것이 뻔한 앞날을 모른 척하고, 밍기적거리며 눌러앉았어요. 가문의 영광이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겠지만, 기뻤어요. 노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머리수를 채우려고 가입시킨 것 이라 짐작되지만, 서로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니까, 윈윈.
 
어제는 앉은 자리에서 아, 소리를 길게 내는데, 목에서 가늘게 떨리는 귀신소리가 났어요. 다들 웃었어요. 저도 웃었지만, 그로테스크한 제 목소리가 쑥스럽고 민망했어요. 여행 끝에 많이 피곤했던가 봐요. 푹 쉬고 연습하면 다시 산 사람의 목소리로 부활하겠지요. 다른 단원들에게는 음계를 바꾸어가며 여러 음정을 부르게 하는데, 제 순서는 아주 짧게 지나갔어요. 기대할 것이 없나 봐요.
 
단원 모두가 저보다 노래를 잘 해요. 무엇인가 그 자리에서 가장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은 모두의 무시를 견딜 권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아무도 무시하지는 않아요. 다만 제 자격지심이지요. 합창단에만 가면 주눅이 들어요. 어느 집합에서든 그 집단에서 요구하는 능력이 가장 부족한 사람이 되면 절대로 아는 척, 잘난 척 할 수 없어요. 덕분에 제 구멍 숭숭한 영혼을 교만의 늪에서 건져 올리고 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언제인가 정말 겸손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몰라요.
 
제 모자람 덕분에 다른 단원들이 돋보이면 좋겠어요. 모두에게 바닥을 깔아주는 저를 보며 약간의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껴도 좋겠어요. 그러고 보니 꼴찌의 역할이 참 중요해요. 두드러지게 하는 일 별로 없어도 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제 몫을 다 하는 새끼손가락처럼. 없으면 손이 기형이 되니까요. 오래 전 새끼손가락을 걸었던 다정한 약속을 생각하니, 제 부족함이 사랑스럽기까지 해요.
 
노래할 때 외에는 거의 벙어리처럼 지내요. 함께 있으면서 동시에 혼자 있는 시간,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 없음으로 존재하는 소극적 수처작주도 있을까요? 마음 속 깊이 스스로 합창의 주인이라 생각해요. 맡은 파트의 주변부에서 튀거나 불협화음 보태지 않고, 조금 모자란 듯 N분의 1의 목소리를 더하면서 합창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이 좋아요.
 
스스로의 어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여전히 많이 비틀거리면서 저는 조금씩 더 잘 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어요. 느리고 늦기는 하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더 잘 하게 되겠지요. 기뻐요. 언제인가 당신 앞에서 두려움 없이 노래할 날을 생각하면. 그전에 노래와 침묵이 동거하는 아이러니의 날들을 잠시 더 즐겨도 될까요? ( the E )




최정란 (시인)

2003 국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여우장갑], [입술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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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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