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모네, 빛을 그리다 리뷰

기술이 예술을 만났을 때(When Technology Met Art)
글 입력 2016.01.12 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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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빛을 그리다 전시 리뷰
기술이 예술을 만났을 때 (When Technology Met Art)


썸네일.jpg

 
 전시라고 하면 생각나는 풍경은 비슷하다. 벽에 걸린 그림들, 줄지어 선 사람들, 다가가지 말라는 빨간 선, 작게 쓰인 그림 설명을 보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 하지만 용산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컨버전스 아트 전시, ‘모네, 빛을 그리다’ 전시는 매우 색달랐다. 미래의 기술이 과거의 예술에게 행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 방향성을 제시함과 동시의 모네의 작품세계와 삶을 보기 편함과 동시에 아름답게 구성해두었다. 

 이 전시에서 가장 두드러졌던 부분은 ‘컨버전스 아트’라는 것이다. 말만 들었을 때에는 ‘컨버전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용산전쟁기념관에서 보여주었던 전시는 확실히 그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전시 팜플렛을 참고하면 관람 포인트는 총 다섯 가지이다. 



1. 컨버전스 아트, 예술과 디지털의 만남
2. 영원한 인상주의자
3. 사랑의 메시지 전파
4. 모네의 초대
5. 모네, 동시대의 화가들과 만나다.



본 전시는 다섯 가지 테마를 전시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아름답게 전달한다. 본 전시는 모네의 전시를 이전에 예술의전당 등의 장소에서 본 사람들조차도 모네의 작품을 새로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1번, ‘컨버전스 아트, 예술과 디지털의 만남’이다.



기술이 예술을 만났을 때


 기술이 예술을 만난다-라면, 복원이라든지 엑스레이로 찍어본 모나리자 그림 뒤에는 다른 스케치가 있다든지 하는 뉴스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본 전시에서 기술은 예술을 만나서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본 전시에서 진짜 모네의 작품들은 한 점도 없다. (Replica로 몇 점 있기는 하다.) 다만 디지털로서 화면에 매우 크게 그것을 복원해두는데, 만약 단순히 모니터에만 띄워두었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모니터로, 포털사이트에 모네를 검색해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본 전시에서는 그림들이 살아 움직인다. 그가 그렸던 수련 연작들이 이어져서 나타나고 초상화들이 눈을 깜박이며 바다를 그려낸 수많은 작품들은 파도로 일렁이고,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는 하얀색 거품을 일으킨다. 매우 섬세한 방식으로 그러한 움직임을 표현해냈다. 
 특히 모네는 인상주의자로서 그 현장이 보여주는 인상 그대로를 색채로 표현해내고자 하였다. 색채가 형태보다 먼저였으며, 그 무엇보다도 우선인 사람이었다. 모네는 “장님이 처음 눈 떠 본 세상처럼 순수하게 눈에만 의존한 이미지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따라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각에, 다른 날씨에 그려낸 작품들도 많았기 때문에 360도로 펼쳐진 거대한 스크린 속에 앉아 잔잔히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작품들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 실제로 내가 그 장소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서 본 전시장에는 어느 전시장보다도 앉아있을 공간이 많았다. 매우 중요한 감상포인트였기 때문이다.


낚시꾼.jpg
(낚시대를 드리우는 낚시꾼)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예술이 기술을 만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기도 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파도에 맞추어 일렁이는 배(응픙외르의 낚시배들)라든지 낚시꾼이 계속해서 낚싯대를 드리우는 등의 작은 역동성을 통해서 모네의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넣은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꽤 좋았다. 그러나 초상화의 깜박임은 매우 어색했다. 눈꺼풀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겠지만 굳이 초상화들이 눈을 깜빡일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배의 일렁임 등의 그래픽에 비해서 초상화의 눈 깜박임에는 너무나 무성의한 처리가 눈에 띄었다.
 양산을 든 여인에서 긴 치마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그래픽은 너무나 낭만적이었지만 수련 연작이 그려진 화면이 마치 해리포터가 빗자루를 타고 날아가는 속도로, 숲 속을 뚫는 로빈 후드의 화살에 타있다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숲속을 파고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다소 과했다. 몇몇 작품은 그것이 복제품일지언정 그저 그림으로서 두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컨버전스 아트를 강조하다보니 모든 것에 움직임을 두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었던 것 같다. 차라리 이보다는 영화 해리포터 속 움직이는 그림들이 훨씬 사실적이었다(물론 그들은 정말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었고, 그 위에 유화 느낌이 나는 처리를 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네의 그림과 컨버전스 아트가 꽤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모네의 그림이 인상주의이고, 풍경화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상에서는 단순히 그림 뿐만이 아니라 모네가 살아생전에 남겼던 말들이나 그의 동료들이 모네의 작품에 대해 혹은 모네에 대해 평가한 어구들을 인용하여 보여주는데, 그 중에서 인상깊었던 모네의 어구 중 하나가 다음과 같았다. 


“사물을 보는 과감한 방법이 관객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모네가 살아있을 때, 모네의 작품들은 굉장히 큰 이슈를 불러일으켰다. 어떠한 명확한 형태도 없이 색채만을 강조한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시를 진행한 이들도 모네와 비슷한 사람들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의 작품들을 영상으로서 각색하고 재창조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 그림만을 보았을 때와 영상으로 보았을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오랑주리.jpg

 
 이 전시장에는 모네의 수련 연작이 전시되어있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을 그대로 재현한 공간이 있다. 물론 그림들은 영상이 되어 조금씩 움직인다. 몇 년 전,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 느낀 위압감이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느낄 수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원작의 느낌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재창조물을 만들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며, 영상이 띄워진 스크린으로는 부족한 감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 영상들과 스크린도 충분히 흥미로웠으며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것이 전시회를 주관한 사람들이 생각한 ‘사물을 보는 과감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본 전시는 영상을 활용해서 생동감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모네가 많은 연작을 만들어낸 루앙 대성당을 작은 크기로 흰 색으로 만들어낸 뒤 그곳에 빛을 비추어 색이 다르게 보이도록 만들기도 했고, 루앙대성당의 작은 창문 틈으로 모네의 작품들이 작은 영상이 되어 움직이도록 넣어두기도 했다. 여러모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것은 전시회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루앙대성당 구조물도, 어떤 대단한 의미를 준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그렇게 작은 화면에서 만나는 움직이는 영상들은 다소 조잡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지금까지는 본 전시가 시도한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지만, 전시의 본질은 역시 ‘모네’다. 그의 작품들과 그의 일생, 그가 사랑한 사람들과 그를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자신의 아이를 낳고 가난한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카미유,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들, 친구들. 사람들 뿐만 아니라 지베르니에 대한 연작들을 본다면 자연스레 느껴지는 모네의 지베르니에 대한 애착과 사랑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매우 따뜻하고 섬세하며 대담하면서도 익숙하다. 그리고 영상을 통해서 설명들도 보다 읽기 좋은 형태로 제공한 것도 좋았다. 

 모네는 인상주의의 대표화가이며 그는 빛으로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이제 영사기의 빛을 통해서 새로운 형태로 관객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새로운 시도이기에 미흡한 점들도 분명했지만 예술이 기술과 만나면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꽤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솔직해지자면, 과연 그 원작을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을까? 나는 이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전시가 흥미로웠던 것은, 이 형태의 전시가 모네의 원작을 훼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 그의 작품들을 보다 쉽게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감상방식과 그 전달은 예술의 수용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앞으로의 컨버전스 아트도 기꺼이 볼 의향이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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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운영팀 김나연


[김나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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